제 434장. 나쁜 자식
앞쪽에서 살가운 표정으로 내내 웃음꽃을 피우는 하응상과 양준을 바라보며, 남초접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그녀에게도 양준과 친해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그녀는 기회를 잡지 않았고, 양준이 가장 어려울 때 그를 버렸다. 그녀가 후회하고 다시 돌아봤을 때, 기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로 능소각을 떠나 동씨 가문에 의탁하면서 남초접은 능소각의 모든 것을 더는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양씨 가문의 계승 싸움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녀는 다시금 양준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당초에 버린 것이 얼마나 귀중한 보배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가소롭게도 그때 당시 그녀는 양준을 한낱 모래알이라고 생각했었다.
“남 낭자!”
그녀 옆에 있던 동경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양준은 나이가 어리지만 밖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일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본인의 출신과 실력 때문에 기가 좀 센 편이죠. 그리고 뒤끝도 있고요. 하지만 진심을 보인다면 언젠가 마음을 열 겁니다. 그 역시 사람이니까요.”
동경한의 말에 남초접은 눈을 깜빡이고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동경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말해 본 겁니다.”
그러고는 곧 옆에 있는 동경연과 한담을 했다. 정말로 무심코 한 말인 듯했다.
남초접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동경한과 양준에 대해서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체면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앞쪽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같은 좋은 기회는 이제 더는 없을 것이다.
*반 시진 뒤, 사람들은 양준의 관저에 도착했다.
관저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조용했다. 영기를 지키고 있는 곡고의와 하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추억몽이 데리고 나갔던 것이다.
양준은 약왕곡 사람들을 대전에 모시고, 하인들에게 차를 대접하게 하느라 바삐 보내다 보니, 하응상과 몇 마디 대화할 시간도 없었다.
약왕곡 사람들은 가식이 없고 인사치레를 할 줄 모르는 데다 양준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다 보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한 시진이 지나서 추억몽이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녀는 그들을 데리고 전성의 곳곳을 구경했을 뿐,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행동만으로도 다른 양씨 공자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양준은 자신의 조력자들을 일일이 진택에게 소개했다. 진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기에서도 연단사의 거만함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양준의 체면을 봐서 고개라도 끄덕이는 것이지, 평소라면 진택은 아마 이들을 만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추억몽은 얼른 약왕곡 사람들에게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진택은 그나마 추억몽의 체면을 봐주어 웃는 얼굴로 추씨 가문에 인물이 났다고 칭찬했다. 이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
곧 모든 배치가 적절하게 마무리되었다.
추억몽이 바삐 보낼 때, 양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공격 태세를 취하는 바람에, 그의 원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때문에 다른 후보자들이 불만을 참지 못하고 연합해 습격할 것을 대비해, 오늘 밤에는 반드시 방어 체계를 다시 구축해야 했다.
양준은 밤 늦게까지 줄곧 바삐 보내다가 비로소 쉴 틈이 생겼다.
그가 쉬러 가려는데 추억몽이 막아섰다.
“뭐야?”
양준은 어둠 속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의아해서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이 시간에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는데?”
추억몽이 앞길을 막아서며 양준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네가 알 바 아니야.”
추억몽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야릇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 사저 만나러 가는 거지?”
“맞아.”
양준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딱 봐도 둘 사이가 평범하지 않더라고. 같은 문파야?”
그녀는 속이 살짝 쓰렸지만,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맞아. 능소각 출신이야.”
“진택이 네 사저한테 되게 공손하게 굴더라? 별로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던데, 이상하네. 뭐 또 다른 내막이 있어?”
그녀는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약왕곡 사람들의 처소를 배치하면서 진택과 하응상의 대화를 직접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분명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에 그녀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양준은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이들도 네 계획에 있던 조력자들이야?”
“그렇기는 한데, 생각보다 많이 왔어.”
추억몽은 허허 웃었다.
“약왕곡 출신의 연단사 서른 명이라. 그중 한 명은 현급. 너 정말 대박이다. 만약 이 소식이 알려지면 분명 더 많은 세력들이 우리 쪽으로 올 거야.”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좋은 점이 있으면 안 좋은 점도 있는 법. 네가 나보다 더 잘 알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남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많은 시선이 너에게 집중되었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속해 시기를 기다릴 거야?”
“당연하지.”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약왕곡 사람들이 오면서 일으킨 반향만 생각하고 그들의 전투력을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들이 나한테 오면서 몇몇 형님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오늘 온 사람들은 모두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아. 형님들이 조금만 냉정해지면 이 점을 간파하고 더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추억몽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다가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내가 들떠서 깜빡했어.”
설령 연단사들이 왔다고 해도, 양준 쪽 조력자들의 무공이 질적으로 향상되려면 적어도 석 달은 걸려야 했다. 이것 또한 재료가 충분하다는 전제에서였다.
석 달이면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공자들의 관저에도 연단사가 있었다. 물론 그 연단사들의 수준은 약왕곡 사람들과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약왕곡 사람들은 적어도 석 달 뒤에야 양준 쪽 세력의 경지를 높여줄 수 있었다. 또한 최소 여섯 달이 지나야 다른 관저 무인들과 실력 격차가 벌어질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양씨 가문 공자들이 약왕곡의 연단사들이 왔다는 소식에 놀라 야단법석을 떤 것뿐이었다.
추억몽은 한참 생각한 뒤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적어도 몇 달간은 약왕곡 일행이 너희 형제들에게 그리 위협적이지 않겠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약왕곡의 영향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렇지. 형님들이 이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지가 문제지.”
양준이 씩 웃었다. 어둠 속에서 흰 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추억몽은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 요즘 들어 나한테 살갑게 구는 것 같은데.”
“그래?”
양준도 순간 당황했다.
돌이켜 보니 사실이었다. 예전의 추억몽은 너무 영리하고 이해타산이 많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계승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그녀가 추씨 가문을 이탈하면서까지 자신을 찾아오자, 그제서야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태도도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 매력을 깨닫고 날 좋아하기 시작한 거야?”
추억몽이 가볍게 웃으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양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그녀에게 다가갔다.
추억몽은 순간 얼굴빛이 달라지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으나 바로 벽에 막혀 버렸다.
다음 순간,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양준은 경망스러운 모습으로 한 손으로 담을 짚고, 다른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한 치도 안 되는 거리였다. 추억몽은 덮쳐 오는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양준을 이곳에서 막고서 대화를 시도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그런 말로 양준을 자극하지 말아야 했었다.
“뭐 하는 거야? 왼쪽 오십 장 떨어진 곳에 향천소가 사람을 거느리고 매복하고 있고, 오른쪽 삼십 장 떨어진 곳에는 곽씨 가문의 두 고수가 숨어 있어. 그리고 내 앞쪽 팔십 장 떨어진 지붕 위에는 단목 가문의 세 고수가 지켜보고 있고. 그러니 허튼 수작하지 마.”
그녀는 호흡이 가빠지며 눈을 깜빡였다.
“뭐가 무서워서 그래? 우리 동맹이잖아. 난 그냥 너랑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뿐이야.”
양준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잖아. 좀 떨어져 봐.”
추억몽은 한 번도 이처럼 초조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양준의 공격적인 눈빛을 감히 바라볼 수 없어 몸을 벽에 바싹 붙였다. 그러나 도망갈 길이 없었다.
“더 가까워질 수도 있는데, 한 번 해볼래?”
양준이 소리 없이 사악하게 웃었다.
추억몽은 고개를 들어 양준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화를 삭이던 중, 양준의 눈빛에 담긴 교활함과 득의양양함을 보고는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뻗어 양준의 목을 감싸 안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좋아, 해봐. 나한테 이러고 네 사저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나 보자.”
양준은 눈을 깜빡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꼬집고는 크게 웃으면서 놓아주었다.
“장난치는 건 괜찮은데, 진심이면 감당 못 해.”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추억몽이 충격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양준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나쁜 자식!”
추억몽은 왠지 서러움이 밀려와 아픈 볼을 매만졌다.
‘나쁜 놈, 여자를 아낄 줄도 모르고. 손이 왜 이렇게 매워.’
그녀는 한참 동안 억울해하다가 양준이 사라진 곳을 지켜보며 실의에 빠졌다. 양준은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멋진 남자였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일 수도 있었다. 이런 남자라면 그녀에게 어울릴 만했고, 그녀 또한 양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추억몽은 양준에 대해 감히 어떤 생각을 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남자를 옆에 묶어 둘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양준과 함께하는 것보다 이 남자가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최종적으로 어떤 높이에서 중생을 굽어보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날이 오면,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곁에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