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0장. 침입
양준은 발길이 닿는 대로 하응상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동안 하응상은 줄곧 단약을 제련하다 보니 오늘에야 쉴 수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방문은 열려 있었다. 문 앞에 다가간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방 안에는 하응상뿐만 아니라 남초접도 있었다. 두 여인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양준이 나타나자, 두 여인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셨어요?”
양준은 따로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하응상과 남초접은 서로 마주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여자들끼리 하는 얘기야. 넌 몰라도 돼.”
남초접이 양준을 흘겨보며 말했다.
“다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얘기해 주세요.”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남초접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양준은 말하면서 하응상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서 여유 있게 남초접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사제……!”
하응상은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양준이 두 손으로 꼭 안고 있어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순간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고 속눈썹이 떨려 감히 옆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다.
“뭐 어때요?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양준은 허허 웃으며 대담하게 행동했다.
남초접의 얼굴에 떠올랐던 기쁜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해 안 할게.”
그러고 나서 사뿐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하응상이 만류하려는데 양준이 몰래 그녀를 간질였다. 순간 그녀는 긴장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장 민감한 아랫배를 간질였던 것이다.
양준은 남초접이 눈치채고 빨리 떠났으면 싶었다.
‘사저하고 둘만 있고 싶은데, 눈치 없이 방해하고 말이야.’
남초접이 나가는 순간, 양준이 손을 흔들어 부드러운 경풍(勁風)을 내보내자 방문이 쾅 닫혔다.
문 밖에 있던 남초접의 미소가 굳어졌다. 얼굴에는 온통 씁쓸함뿐이었다. 양준의 의도를 알기에 더욱 속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사실 하응상과 마찬가지로 양준의 사저였다. 똑같이 천천히 알아 가고 익숙해지는 단계를 거쳤지만, 지금 그녀와 하응상은 양준의 마음속에서의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무심코 한 선택 하나로 인생의 많은 것이 바뀌기 마련이다. 남초접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옷깃을 여몄다. 문득 초가을의 날씨가 무척이나 쌀쌀하게 느껴졌다.
하응상은 귀를 기울여 남초접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제, 이제 내려 줘.”
“계속 이렇게 있으면 안 돼요?”
양준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음……!”
하응상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절 좋아하세요?”
양준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난처한 질문을 했다.
하응상은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싫으신가 보네요.”
양준이 낙담한 척하면서 탄식했다.
“그런 게 아니야.”
하응상은 순간 당황해서 연신 손을 내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양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옆방에 있던 몽무애는 연신 눈을 희번덕거렸다. 화가 치밀어 옆방으로 달려가 양준을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식이 너무 악랄하고 뻔뻔스러워. 얌전하고 귀여운 응상이를 저리 괴롭히다니.’
“사제, 지금 괜히 장난치는 거지?”
하응상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면사포로 가린 볼이 부풀어 오른 것이 훤히 보였다.
양준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간의 피곤함과 노고가 모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또다시 난처해하며 양준을 추궁할 틈도 없이 머뭇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사제는 남 사저 안 좋아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대답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요.”
“왜? 남 사저는 너를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방금 전에도 네 얘기를 했어.”
“바로 그 때문이에요. 만약 제가 양씨 가문의 자제가 아닌, 그저 능소각의 제자일 뿐이었다면 사저는 저를 다르게 대할 건가요?”
“아니! 신분에 상관없이 넌 내 사제야.”
“사저는 그렇지만, 다른 이는 모르는 일이에요. 남 사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지금 남 사저가 저를 신경 쓰는 건, 아마 제 신분 때문일 거예요. 만약 언젠가 제가 더는 양씨 가문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남 사저는 아마 또 태도를 바꿀 거예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남 사저를 피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남 사저가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사저가 너무 훌륭한 거예요.”
양준이 고개를 가볍게 젓고서 설명했다.
하응상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양준은 그녀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하지만 세상 물정에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심성이 착해 인간을 추악하게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맞다. 제 단약은요?”
양준이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하응상은 무릎에서 뛰어내려 침대로 가더니 보자기를 꺼내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보자기를 열자, 단약 여섯 병이 보였다.
“세 병은 진원을 수련할 때 써. 다 양성의 단약이야. 나머지 세 병은 신식을 수련할 때 쓰면 돼. 시간에 쫓겨서 이만큼밖에 못 만들었어.”
그녀는 못내 아쉬워하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단약들은 모두 현급 하품으로, 양준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혼원단과 마찬가지로 원래 천급 상품이었으나, 하응상이 제련하자 모두 한 등급 높아져 현급에 이른 것이었다.
만약영액은 벌모세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약을 제련하는 과정에 한 방울을 첨가하면 단약의 품질을 높일 수도 있었다. 또한 연단진결에서 얻은 영진까지 더하면, 하응상은 손쉽게 단약을 제련할 수 있었다. 만약영액과 영진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응상의 지금 수준으로는 보름 내에 이렇게 많은 단약들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준에게도 그렇게 많은 현급 재료들이 없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양준이 마음 아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리는 무슨. 요 며칠 연단하면서 실력이 또 향상되었어. 이제 거의 신유 경지 2단계가 되어 가. 난 단약을 많이 만들고 싶어. 그러면 빨리 성장해서 너도 돕고, 사부님도 도울 수 있잖아.”
하응상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연단을 하는 게 곧 수련이라니. 역시 약령성체라 달라!’
양준은 몰래 혀를 찼다.
또 한참 대화를 나누고서야, 그는 수련을 시작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양성 단약 세 병의 약 기운을 흡수해서 양액으로 바꾼 다음 진원을 담금질했다. 그런 다음, 다시 나머지 현단 세 병으로 신식을 수련하면서 연단진결의 비밀을 파헤쳤다.
몽무애가 전수한 신식 수련 방법은 그동안 줄곧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수련 방법의 도움으로 지금은 신식 회복이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양준이 수련하면, 하응상은 한쪽에 얌전하게 앉아서 힘을 회복하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양준은 저도 모르게 곤룡골의 동굴이 떠올랐고, 그때가 그리워졌다.
이틀 뒤, 하응상이 다시 연단방에 가서 단약을 제련하자, 그는 금세 고독감을 느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준의 실력은 한 걸음, 한 걸음 향상되었다. 진원 경지 9단계까지는 마지막 고비를 남겨 두고 있었다.
신유 경지가 코앞이 되자, 그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유 경지가 되면 더는 봉신전 태상장로들의 감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동틀 무렵이라 세상이 고요했다.
양준은 한창 연단진결의 비밀을 열심히 깨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미간을 살짝 구겼다. 이내 신식이 파도처럼 밖으로 퍼져 나갔다. 이와 동시에 몽무애의 방에서도 느껴질 듯 말 듯한 신식이 전해졌다. 양준의 신식과 비교했을 때, 몽무애의 신식은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 신식은 관저 전체를 한 바퀴 휩쓸고서 동시에 한 구석을 지목했다.
“죽고 싶은 게로군.”
양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모든 신식을 한 곳으로 모았다.
곧이어 현묘한 신혼기가 폭발했다.
어둠 속에서 자색 빛이 떠돌다가 경악에 찬 목소리와 함께 가냘픈 그림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누구냐!?”
그쪽 경계를 맡은 고수가 곧 눈치를 채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소리가 양준 관저에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많은 그림자들이 그쪽으로 날듯이 달려왔다.
가냘픈 그림자는 마치 자신이 발견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 얼굴에 놀라움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림자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몸에서 순간 잔물결이 겹겹이 퍼져 나왔고, 물결이 퍼져 나감에 따라 신형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신형이 거의 사라질 무렵, 귀신 같은 그림자가 쇄도하더니 서슬 퍼런 비수 두 자루가 몇 장 밖에서 춤추듯이 날아들었다. 영구였다.
신음소리에 이어, 그자의 신형이 부서졌다.
영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연신 뒤로 물러났다. 다시 시선을 고정하고 보니 침입자는 종적을 감추고 물안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멀리 백 장쯤 떨어진 곳에서 무지갯빛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구는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속도는…….’
슈욱- 슈욱- 슈욱-
수많은 그림자들이 땅에 내려섰다. 양준은 성큼성큼 걸어와 땅 위의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침입자가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소란이야?”
연단방의 문이 열리더니, 진택이 불쾌한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양준을 보자, 그는 불쾌함을 거두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누가 침입했습니다. 약왕곡 제자들은 무사합니까?”
양준이 얼른 물었다.
“아무 일 없어.”
진택이 고개를 저었다.
양준은 신식으로 한 바퀴 훑어보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약왕곡의 제자들은 다치지 않았고, 하응상도 무사했다.
연단방은 관저 전체에서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침투할 수 있는 이가 있다니?’
양준의 낯빛이 저도 모르게 음침해졌다.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관저 내, 인원 파악 실시해.”
그의 표정은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험악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