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5장. 피가 강을 이루다
한참 뒤, 호수 바닥의 진법이 다시 반짝이자 검붉은 호수가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두 번의 경험으로 세 번째 비보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걸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곧 시작될 싸움에 구경꾼들은 좋은 각도와 위치를 차지한 채, 잠자코 기다렸다.
양준 대열의 사람들은 양준의 말 때문에 부러운 시선으로 호수 바닥을 바라보면서도 욕심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열에서는 모두 소매를 걷어붙이며 한바탕 크게 해보려고 벼르고 있었다.
슉, 슉, 슉-
백 줄기의 빛이 또 쏘아지면서 백 개의 비보가 나타났다.
“가라. 빼앗으려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죽여.”
양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주변의 사람들은 신속하게 출동했다.
그와 동시에 양신, 양영도 거의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하나같이 매서운 얼굴로 이곳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세 대열의 사람들이 뛰쳐나갈 때, 모든 이들은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다른 두 대열의 사람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바로 양위와 양준이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맏이와 가장 어린 막내는 방금 전의 수확에 만족한 듯, 더 이상 다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야, 저 두 사람은 왜 가만히 있어?”
구경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겁먹은 건가? 저래서 무슨 계승 싸움을 한다고?”
“빨리 나가. 멍하니 뭐 하고 있어? 멍청이들! 내가 다 답답해 죽겠어.”
“젠장, 이렇게 좋은 기회를 왜 잡지 않는 거야? 내 문파가 너무 후지지만 않았어도 아무 공자에게나 의탁해 오늘 비보를 빼앗는 건데.”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혼잡하게 들려왔다. 양준은 경악에 빠진 얼굴로 양위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물게 형님이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속마음을 내가 다 꿰고 있지’ 하는 듯한 뜻이 담긴 미소였다.
“돌아와.”
다음 순간, 양소도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력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흥분된 마음으로 활약을 펼치려고 한껏 준비했던 무인들은 이미 공중을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눈앞에 바로 비보가 놓여 있는데 양소의 명령을 듣고 어찌 바로 반응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행동이 빨라 재빨리 양소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이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얼굴로 눈앞의 비보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무인들이 비보를 건드리는 순간, 파경호 정중앙에서 원기가 연이어 폭발했다.
쿠르릉-
콰과과-
슈슈슉-
불길이 일렁이고,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었으며 우박이 쏟아졌다.
무시무시한 검빛이 폭발하더니 날카로운 얼음 기둥들이 기이하게 나타났다. 칼날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금색 실이 비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쏘아졌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양준과 양위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구경꾼들이 떠들고 있을 때, 비보를 다투는 무인들이 다른 경쟁자들을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엄청난 폭발소리가 들리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정적에 휩싸였다.
무인들도 무방비상태에서 공격을 당했다. 이들은 대부분 진원 경지의 무인이라 이런 액운이 닥칠 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하늘에서 터진 공격은 혼잡하기 그지없고 공격성도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수한 공격이 동시에 터졌다. 모래도 쌓으면 성을 지을 수 있고 낙숫물도 강을 이룰 수 있는데 진원 경지의 무인들이 어찌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눈 깜짝할 사이에 호수 중심에 모여 있던 무인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흩어졌으며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좀 멀리 떨어져 있던 무인들은 그제야 황망히 도망치며 더 이상 제자리에 머무르지 못했다. 처참한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의 눈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장내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오직 시체들이 호수에 떨어지며 내는 물 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음흉하군.”
양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터진 원기는 무인들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비보에 원인이 있었다.
세 번째 비보는 고수들이 사전에 진원을 주입해 놓은 것이었다. 누군가 그것들을 잡는 순간, 비보에 내재된 기운이 폭발하면서 무방비상태의 무인들을 공격하게 해 놓은 것이다. 비보를 다투는 무인들을 겨냥한 양씨 가문의 함정이었다.
앞에 두 번 비보를 내보내 무인들의 경계심을 낮춘 뒤, 세 번째에 살수를 뻗은 것이다.
“우리 방금 전 나갔더라면…….”
서소어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유명산에서 수련할 때, 그녀 역시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에는 오십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비보를 다투다가 목숨을 잃는 것을 직접 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몇십 명이나 죽는 장면은 그녀에게도 공포 그 자체였다.
“양준, 아주 너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곽성진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아까 양준이 이번에는 나서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양준이 너무 소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양준은 소심한 것이 아니라 뭔가를 눈치챈 것이었다. 방금 전에 뛰쳐나갔더라면 마찬가지로 손해가 막대했을 것이다.
이 점을 발견한 곽성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이들이 양준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대공자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편, 맹선의가 놀란 얼굴로 양위에게 물었다.
양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다만 막내가 움직이지 않기에 저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앞으로 막내를 따라 같이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씀은 양준을 보고 판단하셨다는 겁니까?”
“네. 막내가 워낙 신중해서요. 이번에도 그가 아니었다면…….”
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선의는 심호흡을 했다. 그도 더는 양준을 얕잡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공자들을 바라보니 양소는 두려움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늦지 않게 명령을 내린 덕분에 비보를 낚아채는 데 급급했던 무인 세 명만 잃었을 뿐이었다. 반면 양항, 양신, 양영은 얼굴이 새파랬다.
그들 대열이 가장 손해가 컸다. 세 번째 비보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뛰쳐나갔다. 때문에 공격이 터지자, 그들 대열의 조력자들이 거의 모두 직격탄을 맞았던 것이다.
각 대열에서 열몇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그중에는 경지가 좀 낮은 신유 경지 무인도 있었다.
양준과 양위의 영리함 때문에 그들의 무능함이 더욱 눈에 띄었고, 이에 그들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늘에 떠 있던 백 개의 비보들은 마치 아까 그 순간 모든 위력을 다한 것처럼 지금은 빛을 잃고 어두워져 있었다. 뛰쳐나왔던 무인들이 전부 물러가자 그것들은 호수 위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 크게 당한 탓에 누구도 감히 비보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나가도 돼.”
양준은 실눈을 뜨고 덤덤하게 말했다.
“뭣들 하는 거냐?”
곽성진이 호통쳤다.
곧이어 양준의 대열에서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뛰쳐나갔다. 젊은 세대의 통솔자와 신유 경지의 무인들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양위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는 양준과 함께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아직 자신의 대열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경호 위에 있던 무인들은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겁을 먹은 데다가 윗사람이 명령을 내리지 않으니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양항, 양신, 양영은 한참 머뭇거렸지만 끝내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뛰쳐나간 무인들은 비보들이 호수에 떨어지기 전에 모두 나누어 가졌다. 방금 전과 같이 갑작스러운 공격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뜻밖에도 두 대열의 수확이 대단했다. 그들은 양손 가득 비보를 들고 돌아왔으며 아무런 전투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양항, 양신, 양영은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양소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도 거리끼는 게 많아 차마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양준! 비보 쉰네 개야.”
곽성진은 수를 세더니 흥분하며 보고했다.
“그것도 전부 지급 상품이야.”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양위에게 돌렸다.
“큰형님네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양준은 확실하게 보았다. 자신의 사람들이 양위의 사람들을 공격했지만 그쪽에서는 방어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양위가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양준의 사람들이 비보를 몇 개 더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큰형님이 나와 동맹을 맺으려는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나올 리가 없잖아.’
“양준, 앞으로 어떡할 거야? 이번에도 지켜볼까?”
곽성진이 웃으며 물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바보도 아니고 방금 같은 좋은 일은 더 이상 없을 거야. 다음에는 다퉈야 해. 하지만 다음에는 상대의 공격뿐만 아니라 비보 자체에 공격성이 있을 테니 다들 조심해! 방어용 무공이나 비보를 전부 사용해. 죽지 말고.”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비보의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모든 이들이 적을 경계하느라 비보를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방비상태에서 연달아 공격이 이어지니 신유 경지의 무인도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겨우 비보가 세 번 나타났을 뿐인데 파경호에는 시체가 백 구도 넘게 떠 있었다. 천 개의 비보가 모두 나타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까?
이를 생각한 구경꾼들과 전투에 참여한 무인들은 모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양씨 가문과 다른 7대 가문의 이번 수법은 너무 잔혹했다.
“양준, 이 비보들을 어떡할 거야? 너무 많아.”
곽성진이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누구라도 그의 웃음에 담긴 의기양양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단목 가문의 다섯 선배님께 맡아 달라고 해.”
양준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비보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비보들은 모양새도, 크기도 달랐는데 작은 것은 귀걸이만 했고, 큰 것은 칼이나 창만 해서 몸에 지니고 있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반드시 맡아서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특별히 고수 몇 명에게 이 일을 시킨 것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