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47화 (447/853)

제 447장. 간도 크다

그는 앞을 막아선 말끔한 얼굴의 남자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몸을 날려서 그냥 지나치려 했다. 지금은 비보를 챙기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상대는 굴하지 않고 또다시 그를 막아섰다.

동경한은 냉소하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몸을 감싼 기운이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양준의 동맹이면 여기를 지나갈 생각은 하지 마.”

남자는 고개를 쳐들고 으스대며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여씨 가문의 도련님이었군.”

동경한은 눈앞의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사람과 물자를 가지고 양준의 관저로 의탁하러 왔던 여송이었다.

하지만 여송은 눈치 없이 추억몽의 부추김에 넘어가 양준을 화나게 하고 쫓겨났다가 또 곽성진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까지 했었다. 그 한 번의 원한으로 여송은 양준을 증오했다. 그는 전성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바로 양항을 찾아가 의탁하였고 양준을 전성에서 쫓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계승 싸움에 참여한 공자들 중에서 양준을 특별히 증오하는 사람은 총 세 명 있었다. 향초, 남생, 그리고 눈앞의 여송이었다.

이 셋은 각자 다른 이유로 양준을 증오했는데, 양준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이번 전투에서도 그들은 비보를 다툴 때면, 오로지 양준의 동맹들만 공격했다.

여송은 냉소했다.

“동경한, 너와는 척을 진 게 없지만 네가 양준을 돕는 것 자체가 아주 기분이 나빠. 충고 하나 하자면, 더 큰 화를 입기 전에 양준 곁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죽음을 자초하지 말고.”

“어디 한번 해보지 그래.”

여송이 자신을 이곳에 잡아두려 한다는 것을 알아챈 동경한은 쓸데없이 말을 섞기 싫었다. 말을 마친 그는 공중을 가르는 번개처럼 신속하고 용맹하게 몸을 날렸다.

풍운쌍위도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보호했다.

여송의 안색이 차가워지더니 소리쳤다.

“어림도 없지. 당장 저들을 막아.”

여송의 옆에도 똑같이 신유 경지 7단계의 고수가 두 명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풍운쌍위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여송의 팔에서 갑자기 검은색 빛이 방출되더니 그의 얼굴빛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빛에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음산한 기운은 이내 여송의 손바닥으로 주입되더니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순간, 그의 두 손에 검은 원기 덩어리 두 개가 만들어졌다. 대야만 한 크기의 원기 덩어리는 엄청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윽고 여송이 원기 덩어리를 휙 내던졌다. 원기 덩어리 두 개는 서로 엉겨서 빙빙 돌더니 곡선을 그리며 동경한을 향해 덮쳤다.

여송도 어쨌든 일등 세가의 공자인지라 여태까지 수련하면서 어느 정도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진원 경지 7단계인 그의 실력에 비보까지 결합하자, 공격의 위력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 일격에 적중되면 늪지에 빠진 것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동경한은 여송보다 경지가 높았으나 양측 모두 비보를 사용하고 있는 탓에 이 정도 경지의 차이는 미미할 정도였다. 정말로 싸우게 된다면 동경한이 여송을 이길 수는 있겠지만,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원기 덩어리를 본 동경한은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 한 번에 그의 뚱뚱한 몸이 날씬해지며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가볍게 중얼거리자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전해졌다. 곧이어 초승달 모양의 바람 칼이 무수히 나타나더니 원기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격렬한 원기가 한데 부딪히자 모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여송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이 동경한은 이미 번개처럼 그의 옆을 지나치고 없었다. 더 이상 뚱뚱하지 않은 그의 몸은 바람의 기운을 감싼 채, 바람의 오묘함을 띠고 있었다. 그의 속도는 순간적으로 극한에 이르렀다.

여송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송 때문에 시간을 지체한 탓에 그 신혼 비보는 이미 다른 무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다행히 그 사람은 진원 경지 8단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동경한의 맹공격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경한과 경지는 같으나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그 무인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신혼 비보를 내던졌다. 무심결인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신혼 비보가 향한 곳은 마침 구경꾼들 쪽이었다.

여송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비보를 쫓아갔다.

동경한은 그 무인을 힘껏 째려보고 나서 재빨리 비보를 향해 날아갔다.

비보는 공중에서 빛을 흩뿌리며 구경꾼들의 머리 위쪽으로 날아갔다. 앞서 비보를 탐냈다가 사람이 죽는 것을 봤는데 누가 감히 비보에 손댈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누구도 비보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오직 한 남자와 두 여인만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스물예닐곱 살 되는 남자와 쌍둥이 자매는 경악한 눈빛으로 날아오는 비보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비보가 날아오는 궤적을 보니 누군가 막지 않는다면 분명 세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질 터였다. 어쩌면 머리가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세 사람은 잠깐 주저했지만 남들처럼 피하지 않았다.

곧 예상대로 비보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이 손을 뻗어 비보를 잡았다.

“간도 크다.”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뻔히 죽은 사람이 있는데 피하지는 않더라도 덥석 잡으면 어떡해.’

구경꾼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매는 요염하고 아름다웠다. 만약 비보를 잡았다는 이유로 죽는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비보를 쫓아오던 여송과 동경한도 이 광경을 똑같이 보았다. 먼저 도착한 여송이 미친 듯이 웃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낭자, 내놓으시오. 그러지 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

동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도 속으로 초조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구경꾼들은 비보를 차지하는 이가 동경한이든 여송이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먼저 도착하는 사람에게 비보를 넘겨주는 것이 당연했다. 만약 이 비보가 정말 여송의 손에 들어간다면 다시 빼앗아 오기 힘들었다.

여인은 여송을 힐끗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죠.”

요염하기 그지없는 미소는 유혹적이었다. 그 모습에 여송은 눈이 커다래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정신을 놓는 순간, 여인이 손에 든 비보를 던졌다.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가던 비보는 여송을 지나쳐 동경한을 향했다.

초조해하고 있던 동경한은 하마터면 비보에 머리를 맞을 뻔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비보를 잡고는 놀란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왠지 눈앞의 여인이 낯설지 않았다.

이내 여송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손을 뻗어 여인을 잡으려고 했다.

여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일격을 날렸다.

이윽고 기이한 기운이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장막으로 엮이더니 여송의 공격을 가뿐히 해소했다. 심지어 그를 공격해 공중제비를 몇 번이나 돌게 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놀라움에 찬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동경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도 요염하고 연약해 보이는 여인에게 이런 실력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리 젊은 여인이 한 번의 공격으로 일등 세가의 공자가 뒷걸음질치게 만들다니. 이런 능력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흥!”

여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혐오로 가득 찬 표정을 짓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와 같이 있던 두 명도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여송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트집을 잡을 마음조차 사라졌다. 동경한과 접전하다가 열세에 처했어도 이 정도로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인은 일반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나 동경한보다도 더 강한 것 같은데.’

여송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몸속의 진원도 불안정해졌다.

일등 세가 출신의 사람과 겨루어서 졌다면 모를까, 이름도 모를 구경꾼 여인에게 지다니. 그는 순간 체면이 크게 깎이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 멍하니 있던 그는 부하더러 여인을 잡아들이게 한 다음, 한껏 괴롭히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여송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 같은 무기력감에 빠졌다.

“여송, 비보는 내가 가져간다.”

동경한은 손에 든 비보를 흔들더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풍운쌍위도 상대 고수와 싸우지 않고 바로 동경한의 옆으로 돌아왔다.

“두고 봐.”

여송은 이를 갈았다.

동경한이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 공자, 충고하는데 지금이라도 중도를 떠나.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죽게 될 거야. 내 사촌 동생을 건드리고 잘 지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럼 내가 죽나, 양준이 먼저 죽나 잘 지켜봐.”

여송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동경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양준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이곳은 전쟁터의 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았다. 신비한 여인의 강한 실력도 일부 사람들만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금방 그녀의 존재를 잊었다.

오직 동경한만이 날아가는 길에 미간을 찌푸린 채, 쌍둥이 자매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분명 이런 자매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또 낯설기도 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는 그 여인의 실력이 더 마음에 걸렸다.

‘나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열 번째 비보가 나타나자, 모든 무인들이 피 끓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까지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주인이 정해진 비보는 몇 없었다. 나머지는 아직 쟁탈 중이었다. 일단 누군가 비보를 손에 넣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집중 공격을 받기 때문에 상대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 더 급했다. 목숨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보의 주인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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