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53화 (453/853)

제 453장. 오랜만이야

전성으로 돌아가는 구경꾼들 속에는 한 남자와 두 여인도 있었다.

남자는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의 접전을 떠올리면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직접 계승 싸움에 참여해, 싸우고 싶은 욕망을 해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 여인은 평온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옆에 있던 무인들이 빈번하게 시선을 던졌지만 두 여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에 익숙한 듯, 그녀들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녀들이 이렇게 순종적인 것을 보자, 많은 이들이 흑심을 품었다.

‘혹시 지금 다가가면 인연이라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교아, 미아, 몇몇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쪽을 보고 있는데 쫓아 버릴까?”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호교아의 아름다운 눈에 혐오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전성으로 돌아가자.”

양준이 아직 뒤에 있었다. 지금 시비라도 붙는다면 그에게 발각될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몇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시비를 피한다는 것은 뒤를 봐줄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세 사람의 나이는 많지 않았고, 실력도 고만고만해 보여서 상대하기 쉬울 것 같아 보였다.

이렇게 생각한 몇몇 사람 중에서 한 청년이 나서더니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하지만 청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그의 앞을 막았다.

그림자는 청년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호씨 자매와 방자기가 가는 길도 막았다.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진원을 돌리며 앞쪽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호교아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호미아는 생긋 웃었다.

그림자에게 가로막힌 청년이 분노해 소리쳤다.

“넌 뭐야!?”

양준이 고개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았다.

“마… 마… 막내 도련님……!”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볼 일 있어?”

양준이 미간을 좁혔다.

“아닙니다. 일 보세요.”

말을 마친 청년은 황급히 도망쳤다. 그의 일행도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아까 그들은 양준과 류경요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었다. 양준은 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휘하에 대량의 고수들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그들 같은 삼류 망나니 따위와 비교가 되겠는가?

“양준.”

청년이 떠나자, 방자기가 미소를 지으며 공수했다.

“방 사형, 오랜만이야.”

지난번, 태방산에서 작별할 때 방자기는 계승 싸움을 구경하러 오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그가 지금 이곳에 있다고 해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태방산에 있을 때, 풍우루와 혈전방 사람들 모두 시종일관 흔들림 없이 양준의 편을 들다가 하마터면 향씨, 남씨 가문과 싸울 뻔했었다. 때문에, 양준은 방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얘기들 나누세요. 하하!”

인사를 건넨 방자기는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마침 뒤에서 쫓아오던 곽성진 일행과 마주쳤다.

“어? 방 사형?”

남초접은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은 문파가 달랐지만 한 지역에 있었던 터라 이곳에서 다시 보니 친근하게 느껴졌다.

“능소각의 사매?”

방자기는 남초접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남초접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경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방자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손뼉을 쳤다.

“알겠어.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혈전방의 쌍둥이였어.”

지난번 능소각에 갔을 때, 그는 풍우루와 혈전방의 상황도 알아보았었다. 호씨 자매와 방자기는 각 문파의 젊은 세대 통솔자들이니 낯이 익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로 직접 얘기를 나눈 적이 없어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동경한은 이제야 그녀가 왜 비보를 자신에게 넘겨주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사람들도 눈치가 빨라서 호교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방지기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몰래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왔으면 찾아와야지. 왜 날 피해?”

양준이 호교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널 피했다고 그래?”

호교아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나 피한 거 아니야?”

양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성큼 다가가 캐물었다.

“아… 아니, 오늘에야 이곳에 온 거거든.”

호교아는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양준은 호미아를 힐끗 보았다. 호미아는 생긋 웃으며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언니를 팔아 넘겼다.

“그래, 그럼 왔으니 우리 관저로 가자.”

양준은 호교아가 민망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더는 따지지 않았다.

호교아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우린 그냥 전성에 놀러 온 거야. 계승 싸움에 낄 생각 없거든. 안 가.”

“미아 넌 안 갈래?”

양준이 미소를 지으며 호미아에게 물었다.

“난 갈래.”

호미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야!”

호교아가 버럭 화를 냈다. 동생이 이토록 쉽게 넘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호미아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깔깔 웃었다.

“우린 겨우 이등 문파라서 가봤자 도움도 안 될 텐데, 가서 뭐 해?”

호교아는 난처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신경 쓰였구나.’

양준은 그제야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관저에 모여 있는 세력들은 영월문을 제외하고 모두 일등 세력이었다.

‘호교아가 열등감 때문에 줄곧 나를 피한 거였군.’

“교아, 너랑 미아는 훗날 세상의 정상에 설 인물이야. 문파에 너무 집착하지 마.”

양준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자매는 진원 경지 5단계였지만, 지금은 이미 진원 경지 8단계로 그와 같았다. 게다가 그녀들이 수련하는 동기연지신공도 뛰어난 무공이라 훗날 반드시 신유 경지 이상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호교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눈에 이채를 뿜으면서 기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자신들을 이렇게 높게 평가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곧 있으면 홀랑 넘어가겠는데.”

곽성진이 그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작에 넘어갔어.”

방자기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도도한 모습이 참 마음에 드는군.”

곽성진은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음, 생각 좀 해볼게. 결정되면 며칠 뒤에 미아와 함께 네 관저로 찾아갈게.”

호교아는 속으로 몰래 기뻐하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매혹적이었다.

양준이 그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왜?”

호교아는 의아한 얼굴로 양준에게 다가가더니 귀를 들이댔다.

양준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 자꾸 우물쭈물하면 네 비밀 공개해 버린다.”

“무슨 비밀?”

호교아는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양준의 뜨거운 숨결에 온몸이 긴장되고 피부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너 짝궁둥이라고. 한쪽은 크고 한쪽은 작잖아.”

말을 마친 양준은 몸을 바로 하고는 킬킬 웃으면서 호교아의 하반신을 슬쩍 훔쳐보았다.

불순한 목적이 다분한 그의 시선에 호교아는 몸을 흠칫 떨더니 얼굴이 상기되어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올지 말지 네가 알아서 해. 미아야, 가자.”

말을 마친 그는 호미아를 끌고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전성 방향으로 걸어갔다.

“양준, 너 왜 이렇게 변태야?”

호교아는 화를 내더니 이를 갈았다.

“변태?”

그 말을 들은 곽성진이 펄쩍 뛰어오더니 분노하며 말했다.

“양준이 낭자에게 무슨 짓을 했나요?”

“그쪽이 무슨 상관이에요.”

호교아는 그를 흘겨보더니 콧방귀를 뀌고는 급히 쫓아가 양준의 한쪽 팔을 잡고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너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해 봐. 가만 안 둬.”

“성격이 사납군. 양준 앞에서만 얌전한 건가?”

곽성진은 양준의 곁에 구름처럼 모여든 여인들의 수를 세어 보다가 그의 작업 솜씨에 연신 감탄했다.

혈전방과 풍우루에서 온 사람들은 호씨 자매와 방자기 세 사람뿐이 아니었다. 각 문파마다 스무 명이 넘었는데, 실력 면으로는 다른 세력에 비했을 때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일종의 성의 표시였다.

두 문파는 지난번에 능소각의 일로 연루되어 고수들이 모두 창운사지를 토벌하는 싸움에 파견되었고, 그래서 다른 세력들보다 피해가 더욱 심했다. 때문에, 이번에 온 이들 중에서 신유 경지는 서너 명밖에 안 되었고, 그 단계도 높지 않았다.

바로 이런 문제로, 호교아는 차마 양준을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계승 싸움에 참여하러 온 것이니 고수를 데리고 왔어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고수가 많지 않았다. 가장 등급이 높은 고수라고 해봤자 신유 경지 4단계였다. 신유 경지 3단계인 관지락도 그중에 있었다.

양준과 호교아는 웃고 떠들며 전성으로 돌아온 뒤, 그들이 묵던 여관으로 가 두 문파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왔다.

양준은 두 문파의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실력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더욱 성심성의껏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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