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54화 (454/853)

제 454장. 어린애 장난

양준 일행이 관저에 돌아오자, 추억몽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반갑게 맞이했다.

관저의 이인자로서 그녀는 혈전방과 풍우루가 찾아온 것에 감사를 표하고는 호씨 자매와 다정하게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수시로 양준을 향했다.

그녀는 호씨 자매가 양준을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저도 모르게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몰래 호색가라고 욕했다.

‘한 번 나갔다 오는데 미인을 두 명이나 데리고 오다니.’

양준 일행이 비보 쟁탈전을 마치고 돌아오자, 관저는 또다시 바빠졌다.

추억몽은 먼저 혈전방과 풍우루 사람들에게 처소를 배치했다. 각 세력들도 이번 쟁탈전으로 얻은 전리품과 사상자수를 세고 있었다.

이번 비보 쟁탈전에서 양준 쪽에서는 대략 삼사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신유 경지는 네 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진원 경지였다. 다행히 인원 손실은 오늘 도착한 혈전방과 풍우루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 일로 슬퍼하거나 울적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계승 싸움에 참여한 이상, 모두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얻은 비보는 총 이백 개 정도였다.

등급이 서로 다른 이백 개의 비보를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는 양준이 전적으로 추억몽에게 떠넘겨 그녀가 골머리를 앓게 했다.

이백 개는 얼핏 보면 많아 보이지만, 사실 분배하려고 하면 부족했다. 하지만 양준은 추억몽의 능력을 믿었다. 그녀라면 균형을 잘 유지해 비보 때문에 각 세력들이 불만을 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양준이 방으로 돌아와 보니 하응상은 탁상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줄곧 연단에 매진하고 있었다. 약왕곡 사람들이 이미 그녀의 연단술에 익숙해져 보조해 주고는 있지만, 지속된 연단으로 그녀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크게 지쳐 있었다.

문을 여는 기척에 잠이 깬 그녀는 양준이 무사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준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하응상은 이미 이런 다정함에 익숙해져 얼굴이 상기되는 것 말고는 예전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가볍게 그녀를 안아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침대맡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자,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순간 면사포를 벗겨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태껏 하응상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가장 많이 보았을 때가 바로 구음산 골짜기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살짝 면사포를 올렸을 때였다. 그녀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싶다고 얘기하면 그녀가 면사포를 벗을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신비스러움이 그녀의 매력 중 하나였다.

잠깐 망설이던 그는 면사포를 벗기려던 생각을 접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하늘에 걸린 조각달을 바라보니 하응상의 웃는 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영구!”

양준이 영구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마른 체구의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진원이 봉인되어도 영구의 은신술은 본능에 가까웠다.

“따라와.”

영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방에 도착한 양준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몽무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거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몽무애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영구의 덤덤한 얼굴에 드디어 표정이 나타났다. 몽무애가 관저에 왔을 때부터 그는 어쩐지 이 노인이 신경 쓰였다. 영구뿐만 아니라 곡고의와 소순도 마찬가지로 몽무애를 신경 쓰고 있었다.

몽무애의 강함과 신비로움에 세 혈시는 커다란 압박감을 느꼈다. 그들은 몽무애가 어느 세력 출신의 고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일반적인 신유 경지 정상이 아니라 한 고비만 넘으면 신유 경지 이상을 돌파할 수 있는 절정 고수였다.

세 혈시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모두 속으로 몽무애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어떤 실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양준이 자신을 데리고 이 노인에게 온 것을 보고 영구는 마음속으로 대략 짐작이 갔지만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당한 봉원주는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인 황구주가 손쓴 것이었다. 아무리 몽무애가 강하다고 해도 방법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구주는 신유 경지 이상이었고, 몽무애는 신유 경지 정상이니 그 차이는 매우 컸다.

“몽 주인!”

양준이 인사를 올렸다. 몽무애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의아한 얼굴로 영구를 힐끗 보았다. 그러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진원이 봉인되었군?”

영구는 잠자코 있었다.

“몽 주인, 그의 봉인을 풀어줄 수 있으십니까?”

양준은 스스럼없이 털썩 앉더니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어디 보자.”

몽무애도 거절하지 않고 영구에게 말했다.

“이리 와.”

영구는 양준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양준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몽무애의 곁으로 다가갔다.

영구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을 눈치챈 몽무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긴장 풀 거라. 네가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지만, 넌 지금 폐인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를 경계해 뭐 하겠느냐?”

그러면서 손을 뻗어 영구의 손목에 얹었다.

방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양준은 물잔을 입가에 댄 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몽무애에게 방법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영구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몽무애에게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은 듯했다.

“흐흐. 재미있구나. 봉인을 건 사람은 확실히 속박술에 조예가 있어.”

한참 뒤, 몽무애가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영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은 황구주 태상장로님입니다.”

“황구주인지 황팔주인지 알게 뭐냐. 들어본 적도 없다.”

몽무애는 입을 삐죽였다.

영구는 몇 마디 더 하려다가 양준에게 저지당했다.

항상 말이 없던 영구가 누군가와 따지려는 것을 보니 마음속으로 황구주를 몹시 존경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그를 얕보는 게 싫었던 것이다. 황구주는 유일하게 혈시 출신으로 태상장로에 오른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모든 혈시들의 우상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몽무애는 황구주의 속박술을 칭찬했지만, 영구가 듣기에는 너무 무례했다.

‘겨우 신유 경지 정상이면서 무슨 자격으로 신유 경지 이상인 황 장로님을 평가하는 거지?’

“몽 주인, 가능하신가요?”

양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럼.”

몽무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영구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몽무애를 바라보았다. 이런 대답을 듣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몽무애에게 어떤 신기한 수단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몽무애가 줄곧 그에게 신비하고 괴이한 인상을 주었기에 기대를 걸어본 것이었다.

신유 경지 이상의 인물은 양준도 만난 적이 있었다. 여사, 양응호, 그리고 양씨 가문의 몇몇 태상장로들이 모두 신유 경지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몽무애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양준은 몽무애의 실력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신유 경지 이상의 사람들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풀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차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몽무애가 큰소리를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몽무애는 그를 흘겨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릴까요?”

영구가 또 물었다.

사실 그가 스스로 봉원주를 풀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두 달 동안 끊임없는 노력을 들여야 했다. 만약 몽무애도 똑같은 시간이 필요하다면 스스로 하는 것이 나았다. 굳이 남에게 신세 질 필요가 없었다.

영구는 황구주를 안중에 두지 않고 거침없는 언사를 내뱉는 몽무애에게 호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몽무애는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었다.

양준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두 달이요? 아니면 스무 날이요?”

이렇게 물었지만, 양준은 속으로 후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틀.”

몽무애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양준과 영구 모두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준은 여태까지 자신이 몽무애의 능력을 저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몽무애는 절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선배님!”

영구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선배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 이틀은 너무…….”

“황당하다고?”

몽무애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만약 내가 이 속박술에 맞았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봉인을 해제했을 거다. 하지만 너한테 가해진 것이니 이틀이 걸리는 거지. 사실 나도 속박술을 좀 연구한 적이 있어. 이건 그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해.”

‘어린애 장난이라…….’

양준은 영구의 얼굴이 미세하게 파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목을 가다듬고서 물었다.

“몽 주인, 진짜 자신 있으신…….”

“싫으면 꺼져. 나도 너와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몽무애는 코웃음을 치더니 영구를 흘겨보며 말했다.

“네 실력으로는 최소 두 달은 있어야 봉인을 풀 수 있어. 혼자서 노력하든지.”

영구는 또 표정이 바뀌었다.

봉원주를 해제하는 데 두 달이 걸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력에 기초해서 스스로 짐작한 것이었다.

‘한눈에 알아채다니, 눈썰미가 대단하시군.’

미간을 찌푸리던 영구는 드디어 진지한 얼굴로 공수하며 말했다.

“제가 결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틀 뒤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영구도 몽무애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지 궁금했다.

“몽 주인, 한 번만 봐주세요…….”

양준이 웃는 얼굴로 몽무애를 바라보았다.

몽무애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넌 이제 나가. 이틀 후에 얘가 널 찾아 갈 거야.”

양준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영구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타이르고는 방을 나섰다.

다시 옆방으로 돌아와 보니 하응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연단하러 연단방으로 간 모양이었다.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양준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여인의 머리카락이었다.

오늘 파경호에서 여덟 번째 현급 비보를 가로채 간 신비한 고수에게서 잘라낸 것이었다. 누구도 이 신출귀몰하고 실력이 대단한 고수가 여인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 사이에 이미 그녀와 두 번이나 접전했지만 양준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그는 왠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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