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7장. 중년 남자의 정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누구도 눈앞에 있던 무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방금 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면, 누구든지 중년 남자의 짓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음산하고 포악한 기운이 폭발하며 술집 전체를 뒤덮었다.
중년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낄낄낄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웃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모두 기혈이 들끓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또한 온몸의 피도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낄낄낄…….”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방자해졌으며 더없이 괴이하고 음산했다.
“마침 배고프던 참이었는데, 먼저 이렇게 달려들어 주니 사양하지 않겠다. 훗날 주인이 따진다 해도, 나도 할 말이 있거든.”
중년 남자는 말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퍽, 퍽, 퍽-
순간, 무인들의 몸속에서 활짝 핀 붉은 장미와 같은 빛이 폭발했다. 오장육부가 산산이 흩어지고 피가 땅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눈에 띄는 원기가 몸에서 튀어나와 중년 남자에게 흡수되었다.
중년 남자의 마른 몸은 점점 불어났고, 어느덧 풍채가 늠름해졌다. 유독 변하지 않는 것은 가느다랗고 긴 눈동자에 담긴 차가운 빛과 음험함 그리고 악랄함이었다.
삽시간에 술집 2층은 지옥으로 변했다. 스무 명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벌벌 떨면서 반항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가련한 표정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면서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직 부족해.”
중년은 배를 두드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음산한 눈빛으로 살아남은 열몇 명을 덮칠 듯이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에 열몇 명은 바닥에 바싹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채 거듭 용서를 빌었다.
중년 남자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더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곧 그의 신형이 움찔하더니 검은 안개로 변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떠나간 다음에야 살아남은 이들은 비로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저리 흉포한 자가 왜 우리는 놔준 거지?’
중년 남자의 잔인한 성정으로 볼 때, 열몇 명을 더 죽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서로를 훑어보다가 그들은 놀랍게도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방금 전에 양준을 지지하던 이들임을 알아차렸다. 반면 양준을 반대하던 이들은 죄다 죽었다.
다들 위험에서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주위의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광경을 둘러보자 모든 이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방금 전에 먹은 음식을 깡그리 토해 냈다. 그들 모두 무인인 만큼,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누구도 이처럼 공포스러운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자들의 육신은 거의 산산조각 나 있었다.
*석성 밖, 검은 안개가 나타나더니 중년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먼 곳에 있는 전성을 바라보다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주인이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 모습으로 찾아가면 깜짝 놀라겠지?”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곧 후회했다.
“너무 늦게 돌아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으려나. 이럴 줄 알았다면 창운사지에 그리 오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양준을 떠올리자, 중년 남자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사실 그와 양준의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신혼 상태로 양준의 몸을 빼앗으려다가 오히려 상대에게 낙인을 찍히고 제압당했다. 그렇게 한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겉으로는 온순하고 충직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줄곧 상대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양준에게서 잠재력을 발견했다. 그는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탓에 기억력은 별로였지만, 안목은 있었다.
양준은 일반 무인과 달리 온갖 신비함으로 가득 했다. 둘이 밤낮으로 꼭 붙어 있어도 비밀을 다 알아내지 못했고, 되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그는 속셈을 털어 버리고 양준의 성장을 몰래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곤룡골에서 사마의 육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양준은 그의 신혼이 사마의 육체를 차지하게 허락해 주었다. 그때 당시 그는 양준이 자신을 의심할까 걱정했다. 만약 양준이 정말 사마의 육체를 차지하지 못하게 했다면, 아마 양준을 원망하면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시도를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양준은 허락해 주었고, 그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곰곰이 되새겨 보면 양준은 그에게 무척 잘 대해 주었다. 사마의 육체 때문이라도 그는 양준을 도와야 했다. 그리고 그의 신혼에는 양준의 낙인이 찍혀 있기에 만약 양준을 화나게 하면 소멸될 수도 있었다.
지마는 마음을 정하자, 단호한 표정으로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찾아가면 안 될 거 같아. 만약 주인이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물으면 창운사지가 좋아서 바위에 새긴 약속을 잊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강한 신식을 넓게 펼쳤다.
원래는 근처에 이용할 핑계 거리가 없는지 찾아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신식을 펼치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신혼 파동이 전해졌다.
“어?”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멀리 그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르자,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 신형이 움찔하더니 검은 빛을 감싸고서 번개같이 사라졌다.
*백 리 밖,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인원수는 서른 명 정도 되었지만, 선두에 선 이는 신유 경지 4단계일 뿐이었다. 그 외 신유 경지가 몇 명 더 있었고, 대부분은 진원 경지 무인들이었다.
주위에서 많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날아가면서 일행을 겹겹이 둘러쌌다. 하지만 공격을 날리지 않고 그냥 바싹 따르기만 했다.
따라오는 무인들도 한 무리가 아니라 여러 무리인 듯했다. 그들 사이도 서로 경계하고 있었다.
“이 자들이 보통 끈질긴 게 아니야. 열 며칠을 꼬박 쫓아오다니.”
달아나는 무리 속에 예쁜 소녀가 달려가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큰일이야. 이러다가 전성에 가지 못할 수도 있겠어.”
그녀 옆에 있던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형, 우리 이제 어떡하지?”
소녀가 초조해서 물었다.
“상황을 지켜보자.”
남자도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문파의 장로 뒤를 따를 뿐이었다.
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 차가운 표정의 여인이 다가왔다. 여인은 몸매가 날씬하고 허리가 잘록했으며 외모만 보면 보기 드문 미녀였다. 이상한 점은 양손을 흰 천으로 꽁꽁 동여매 손의 본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일행 중 많은 이들이 양손을 흰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양손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도 사형, 도저히 안 될 거 같으면 여기서 갈라져 따로 가자. 저들의 목적은 우리 귀왕곡이니, 여기서 갈라지면 보기종은 안전할 거야.”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반짝였다. 며칠간 쫓기다 보니, 그녀는 정말로 화가 치밀었다.
도양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냉 사매,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야. 저 자들이 정말 귀왕곡만을 노리는 거 같아?”
“다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잖아.”
냉산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무리들은 일행을 바싹 뒤쫓으며 때때로 위협했지만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개중 가장 큰 원인은 보기종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귀왕곡은 그저 그럴듯한 구실일 따름이었다.
몇 달 전, 계승 싸움의 소식이 창운사지에 전해지자 귀왕곡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냉산도 진학서 일행과 마찬가지로 양준의 이름을 듣고 긴가민가했다. 양씨 가문 막내 공자가 그녀가 알고 있는 양준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후에 여러모로 알아본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양준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귀왕곡에서 신분이 낮지 않았다. 즉시 곡주인 귀려에게 문파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계승 싸움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귀려는 허락하지 않았다.
귀왕곡은 어디까지나 창운사지의 문파였다. 제자들이 섣불리 창운사지를 떠났다가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귀려가 어찌 그들을 계승 싸움에 참여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는 냉산의 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신유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그녀를 감금했다.
그리고 감금된 그녀를 심혁과 정영이 몰래 풀어주었다. 세 사람은 전에 흉살사동에서 양준의 은혜를 입은 이들을 모아 몰래 중도로 떠났다. 그저 양준이 혼자 힘으로 여러 차례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흉살사동에서 만약 양준이 없었다면 귀왕곡의 제자들은 진작 죽었을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너무 돋보이는 표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창백하고 핏기라고는 없는 손이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사파 출신임이 밝혀질 수 있었다. 사파 사람들은 밖에서 돌아다니다 살해당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모두 양손을 흰 천으로 동여맸다. 겉보기에는 이상할지라도 일단 정체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냉산이 창운사지를 한 번 벗어나 본 적이 있었고, 나머지는 먼 길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창운사지를 벗어나자, 그들은 이리저리 숨어 다녀야 했다.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심혁은 도양을 찾아가 보기종의 이름을 내세워 함께 중도로 가는 것을 제안했다. 도양을 포함한 흉살사동에 갔던 보기종의 제자들도 반드시 양준을 도우러 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도양은 이미 양준의 전갈을 받았지만 문파의 고위층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양준과 알고 지내는 몇몇 이들만 데려가서는 양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귀왕곡 제자들이 보기종에 도착했을 때, 도양은 한창 곤경에 빠져 있었다. 냉산과 심혁 일행이 도착하자, 그는 크게 기뻐하며 몰래 보기종에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그 후 한동안 냉산 일행과 도양은 매일 조르고 다그치며 보기종의 고위층들을 거듭 설득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그들은 끝내 문파 고위층의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