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59화 (459/853)

제 459장. 죽여!

장내 분위기는 순식간에 굳어졌다. 다섯 무리는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다들 두려움에 떨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중년 남자를 지켜보았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 벙어리들인가?”

지마가 사나운 표정으로 차갑게 일갈했다.

이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사람들의 귀청을 때렸고, 고막이 울려 윙윙거릴 정도였다. 모두 저도 모르게 몇 걸음이나 뒷걸음 치면서 공포에 떨었다.

누군가 입을 떼고 이 난국을 타파하지 않으면 일이 수습되기 어려울 듯했다.

다섯 무리는 서로를 힐끗거리다가 처음 보기종에 말을 걸었던 신유 경지 6단계 무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공손하게 공수하며 물었다.

“대협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뇌주(雷州) 정광문(定光門)에서 온…….”

지마가 그의 말을 끊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광문? 들어 본 적 없다.”

정광문도 일등 세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중년 남자는 마치 그들을 삼류 세력 대하듯 했다. 그럼에도 신유 경지 무인은 감히 화내지 못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재 중도 양씨 가문의 둘째 공자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년 남자의 실력이 강한 만큼 그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정광문은 눈에 차지 않더라도, 중도 양씨 가문은 알 거라 생각하여 양씨 가문 공자의 이름을 댄 것이었다.

‘둘째 공자의 이름을 내세우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둘째 공자?”

과연 중년 남자는 흥미가 동하는 표정이었다.

“이름이 뭐냐?”

“양소입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더니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양씨 가문을 내세운 게 제법 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지마는 고개를 돌려 다른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감히 빼지 못하고 앞다퉈 자신의 문파와 따르는 공자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래 미소를 짓고 있던 중년 남자는 그들이 말하는 공자의 이름을 듣더니 낯빛이 점점 더 불쾌해졌고, 나중에는 거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중년 남자의 표정을 살피다가 가슴이 서늘해지며 손발에 식은땀이 쫙 났다.

“너희 중에 양준을 위해 일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구나?”

지마는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은 매우 음산하고 차가워 보였다.

“대협! 저희가 양준을 돕기 위해 가는 중입니다.”

도양이 눈알을 굴리더니 서둘러 공수하며 말했다. 그 역시 어떤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챘던 것이다.

“그래?”

지마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더니 표정이 풀어지며 크게 웃었다.

“좋아, 좋군. 젊은 녀석이 안목이 훌륭하구먼! 양준을 열심히 따르면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대협.”

도양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암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도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방금 전 도양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굴하게 굽신거리는 소인배의 전형이었다.

‘보기종의 체면을 완전 구겼군!’

“음, 너희가 양준을 도우러 가는 길이라니 나도 이 일을 좌시할 수 없겠구나! 너희의 안전은 내가 책임지마.”

지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말에 귀왕곡과 보기종 사람들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강한 고수가 나타나 그들을 지켜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중년 남자에게 감격해 마지않았다.

반면 다섯 무리는 표정이 암담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중년 남자에게 덤비지 못했다. 강한 신식을 통해 그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챘던 것이다.

다섯 무리의 대변인 격인 신유 경지 6단계 무인이 공수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협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하는 한편, 손을 흔들고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섯 무리가 몇 걸음 물러서자 낄낄낄 야릇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저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왠지 괴로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언제 너희한테 가도 좋다고 했느냐?”

지마의 눈동자는 위험하고 차가운 빛으로 번뜩였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동시에 음산한 기운이 퍼져 나가며 다들 등골이 서늘해졌다.

모두들 얼굴빛이 급변해 더는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대협께서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신유 경지 6단계 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온몸의 진원을 가동시켰다.

“오늘 기분이 썩 괜찮아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안목이 없고 시야가 좁아 사람을 잘못 따르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지마가 여유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뜻을 알아챈 다섯 무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유 경지 6단계 무인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저희가 하는 일에 대협께서 왈가왈부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쪽수가 훨씬 많은데, 대협께서 어떻게 감당하시려는 겁니까?”

말하는 사이, 다섯 무리는 점차 한데 모였다. 모두들 무거운 표정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생사를 같이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런 강한 고수와 맞서게 되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데 뭉치게 되었다. 다만 상대가 적정선에서 물러서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지마는 그들이 뭉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오히려 더욱더 흥분하더니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쪽수가 이렇게 많으니 간만에 좀 성에 차게 죽일 수 있겠구나.”

그는 말하면서 얼굴빛이 포악해지더니 두 손을 쫙 핀 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잔인하게 웃었다.

“혈해봉천(血海封天)!”

이윽고 그의 등 뒤에서 핏빛이 나타났다. 핏빛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다섯 무리가 모인 곳으로 날아갔다.

그 누구도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핏빛에 완전히 뒤덮였다.

눈앞은 온통 핏빛 세상이었다. 하늘이 눈부신 붉은빛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대야 만한 핏방울이 끊임없이 터지면서 사람마다 피칠갑이 되어 그 모습이 매우 공포스러웠다. 팡팡 터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이건 뭐지?”

다섯 무리는 당황했다. 그들은 이처럼 괴이쩍고 음산한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일격을 시전했을 뿐인데 주위의 환경마저 변해 버렸다. 그들은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일제히 진원을 돌리고 신법을 펼치며 비보를 꺼냈다. 어떻게 해서든 핏빛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바닥 위의 핏물은 강한 흡착력이라도 있는 듯이 그들을 단단히 붙들어 두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선 땅은 마치 늪이라도 된 듯이 움직일수록 더 빨리 빠져들었다.

“낄낄낄……!”

지마는 또다시 이상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피바다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심지어 가늘고 긴 눈동자에서 이채를 내뿜는 것이 극도로 흥분한 듯했다.

귀왕곡과 보기종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 떨리는 눈동자로 피바다를 바라보았다.

다들 갑자기 나타난 중년 남자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중년 남자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다섯 무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더군다나 그는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공격을 날린 듯했다.

귀왕곡 자체가 사파라 수련하는 무공이나 공법이 음산하고 사악한 속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귀왕곡의 무공은 눈앞의 광경과 비교할 때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귀왕곡 제자들은 피로 물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기종 제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직 오암만이 서늘한 가슴을 부여안고 무심코 중년 남자를 힐끔 보았다.

중년 남자도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닌 듯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피바다에 갇힌 무인들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력과 무공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 형체가 험상궂게 변했다. 또한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고 다들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던 표정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광기와 살육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바다에 잔혹하고 사악한 기운이 숨겨져 있어 그들의 본심에 영향을 준 듯했다.

“죽여!”

누군가 울부짖더니 비보와 함께 무공을 펼치며 옆에 있던 동료를 덮쳤다. 동료는 곧 머리 없는 시체가 되었다.

“죽여! 죽여! 죽여!”

다섯 무리는 모두 귀신에 홀린 것처럼 연신 ‘죽여’를 외치며 옆 사람과 죽일듯이 싸웠다. 시체가 하나하나 늘어나면서 피바다는 점점 더 짙어졌다. 이내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지마는 희대의 볼거리를 구경하듯이 미간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다.

잘린 사지와 살점이 흩뿌려지며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

보기종과 귀왕곡의 몇몇 여제자들은 참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들고 한쪽으로 달려갔다. 곧 헛구역질을 하며 토했다.

그녀들은 이같이 피비린내가 나고 공포스러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이는 이미 그녀들의 심리적 한계선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지마는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힐끗 보더니 흐흐 나지막하게 웃고는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 각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피바다에 갇힌 다섯 무리는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고, 오직 대변인 노릇을 하던 신유 경지 6단계 무인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는 신유 경지 6단계에 불과하지만 다른 이들보다 실력이나 무공에서 많이 빼어났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해도,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그는 얼굴에 살기를 띤 채 좌우를 둘러보며 홀로 피바다에 서 있었다. 영혼이 사라진 지금의 그는 오직 살육 본능에 따르는 산송장에 불과했다.

“좋아! 살아남았으니 목숨은 남겨 두지.”

지마는 손뼉을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두 손을 흔들자 현묘하고 신비한 인법(印法)이 줄기줄기 그에게 날아갔다.

인법에 맞은 그는 마치 소용돌이라도 된 듯이 주변의 핏물을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기이한 장면에 귀왕곡과 보기종 사람들은 다시금 깜짝 놀랐다.

핏물이 주입되자 그의 몸과 얼굴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몸은 겹겹이 커지고 부어올랐으며 얼굴도 마구 일그러지면서 심지어 이마에 커다란 혹이 튀어나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핏물이 모두 흡수되었다. 그에게서 이제 더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불에 달군 인두처럼 붉어졌고 얼굴은 흐릿해졌다. 오직 눈동자만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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