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2장. 고양이 앞의 쥐
얼마 지나지 않아, 관저 앞쪽에서 족히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걸어왔다. 추억몽은 무척 기뻐하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양준은 뒷짐 지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선두에 선 지마의 몸을 스칠 때, 저도 몰래 미소를 지었다. 다시 지마의 뒤로 시선을 돌리니, 흉살사동에서 만났던 귀왕곡 제자들이 모두 함께 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기종 사람들을 발견한 양준은 놀라움과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계승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죽절방을 통해 밖에 전갈을 보냈었다. 하응상은 양준의 전갈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보기종은 줄곧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관저의 기타 세력은 모두 스스로 찾아온 것이지, 그가 부른 것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보기종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양준은 큰 시름을 덜게 되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이 세 무리가 어떻게 함께 왔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궁금한 건 귀왕곡이든, 보기종이든 모두 선두에 있는 지마에게 무척이나 공손히 대한다는 것이었다.
‘지마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양준을 만나자 지마는 살짝 들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이끌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많은 이들 앞에서 양준과의 사이를 밝히기 어려워 공수 인사만 했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도련님!”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번 생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지마가 금세 난처해하며 얼른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이렇게 바로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오는 길에 일이 좀 있어서 그만.”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지.”
양준이 그를 노려보았다.
지마는 용서를 구하고서 얼른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양준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웃는 얼굴로 추억몽을 훑어보고는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예쁘장하게 생겼군. 이 정도면 주인의 옆자리에 서기에 충분하겠어.’
추억몽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지마에게 예를 올렸다. 지마에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양준을 도와주러 온 이였다.
귀왕곡과 보기종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오는 길에 두 세력의 사람들은 모두 지마의 강한 실력과 신비함을 직접 경험했었다. 귀왕인의 영체는 지마가 검은 안개를 불어 준 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곧 진화를 앞두고 있었다. 보기종의 오암도 더는 지마를 얕보지 못하고, 공손한 태도와 말로 대했다.
그런데 그런 이가 양준을 만나자, 마치 고양이 앞에 쥐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모두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양 사형, 오랜만이야.”
지마의 모습에 놀라 잠시 머뭇거리던 귀왕곡 제자들과 도양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는 길에 별일 없었지?”
양준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말하면서 지마 쪽을 흘끔거렸다. 양준은 지마가 또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봐 불안했다.
“응, 없었어. 작은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지 대협께서 도와주셔서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었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남의 은혜를 입으면 일 처리가 무르기 마련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이 어떻게 지마의 잔인한 수단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말이 끊이지 않았다.
추억몽은 옆에서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그중 양손을 모두 흰 천으로 감싼 일고여덟 명의 무인들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귀왕곡의 제자들인 듯했다.
보기종의 연기사들은 무척이나 반가운 존재였다. 특히 오암의 명성에 대해서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보기종에서 종주 다음으로 실력이 뛰어난 이였다.
오암은 연기에 필요한 불꽃을 수집하기 위해 대한국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으며 심지어 멀리 타국에까지 갔었다고 전해졌다. 그렇게 족히 이십 년의 시간을 들여 자신이 원하던 물건을 얻게 되었고, 신기한 영화(靈火)를 몸속에 흡수해 기어코 자신의 체질과 진원 속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현급 중품 비보를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연기사였다. 연기계(煉器界)에서 그의 명성은 연단계의 소부생 못지않았다.
연기는 연단보다 과정이 복잡하고 주기가 길며 재료가 많이 들어갔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비보보다 단약에 대한 수요가 많다 보니 오암은 소부생보다, 보기종도 약왕곡보다 명성에서 많이 뒤처졌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연기 방면에서 오암의 뛰어난 조예와 재능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었다. 오암 말고도 보기종에서는 거의 스무 명의 제자들이 왔는데 하나같이 뛰어난 연기사들이었다.
추억몽은 보기종을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양준과 함께 귀왕곡과 보기종 사람들을 관저에 들여 쉬게 했다.
그녀는 들뜬 나머지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고 걸음걸이마저도 경쾌했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 보니, 지금 양준의 휘하에는 조력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열몇 개의 크고 작은 세력들을 제외하고, 약왕곡과 보기종만으로도 모든 이가 시샘할 정도였다.
‘저 자식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모은 거야?’
추억몽은 앞쪽에서 걸어가는 양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온갖 잡생각을 하느라 그녀는 얼떨결에 양준을 따라 대전에 들어서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름다운 미래가 끊임없이 그려지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이 양준의 손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양준이 다른 형들을 모두 물리치고 계승 싸움에서 이겨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며, 다시금 가문을 이탈하고 양준을 돕기로 한 결정을 내린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인을 뵙네.”
한창 백일몽을 꾸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귀왕곡 제자들과 보기종의 오암에게까지 존경을 받는 지마가 지금 이 순간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주인이라고?’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실력으로는 지마가 어느 정도 수준의 고수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마에게서 관저에 있는 몇몇 혈시보다도 더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음산한 기운의 지마는 혈시보다 실력이 더 강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그가 본인을 낮추는 행동을 하면서 양준을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양준을 따르는 혈시조차도 그에게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양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일어나. 우리 사이에 이럴 필요 없잖아.”
“고맙네, 주인.”
지마는 기쁜 얼굴로 일어섰다.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추억몽이 놀란 것을 보고, 지마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린 다 같은 편이니, 나와 주인의 관계도 숨기지는 않겠네. 그래도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주인이 주목을 받는 걸 싫어하거든.”
추억몽은 얼른 놀란 표정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크흠!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사실 이런 때는 얼른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는 비밀이 적어야 더 안전한 법. 그러나 여성의 타고난 강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저리 신비하고 강한 고수가 왜 양준과는 마치 주종관계 같을까?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는 거지?’
“몸은 좀 어때?”
양준도 추억몽을 내쫓지 않았다. 앞으로 긴 시간 동안 그녀는 관저의 이인자로 있을 것이기에 그와 지마의 관계를 계속해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의심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툭 터놓고 알게 하는 것이 나았다.
양준이 묻자, 지마는 감격에 찬 표정을 하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몇 달 동안 움직이면서 충분히 안정됐네. 삼십 년간은 아무 문제없을 거라네.”
“삼십 년 뒤에는?”
양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달렸다네. 만약 이 껍데기와 완벽하게 융합할 수 있다면, 앞으로 바꿀 일은 없겠지. 하지만 만약 그게 안 된다면 삼십 년 뒤에 맞는 육체를 다시 찾아야 될 걸세.”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고맙네, 주인. 당분간은 문제없을 듯하네.”
“알겠어. 지금 크게 할 일 없으면 가서 사람 좀 만나고 와.”
“누구 말인가?”
“몽 주인!”
양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지마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지마는 얼굴빛이 살짝 바뀌며 꺼려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처음 대면했을 당시, 몽무애의 수단에 지마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노친네가! 오늘 제대로 따져야지. 모든 앙금을 확실히 매듭지어야겠어.”
지마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고는 웃으며 양준에게 한마디 건넸다.
“주인은 저 아가씨와 놀고 있게나.”
이내 양준의 얼굴이 흙빛이 되더니 손을 내저었다.
지마의 신형이 번쩍하며 곧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