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7장. 봉신전
일반 무인의 경우, 실력이 강한 고수들이 펼치는 수단을 보고 나면 마음에 그늘이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 그늘은 전투는 물론이고, 수련하는 중에도 심리적 장애물로 작용해 평생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양준은 끈기가 있고 무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커 그런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고, 도리어 그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만약 기연과 타고난 재능까지 따라 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큰일을 해낼 것이 분명했다.
영구는 여러 생각들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지금 관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추 소저는 오늘 밤 아마 밤잠도 설칠 거야. 낮에 공자님께서 혼자 움직이는 걸 그렇게 반대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으니, 지금쯤 아마 걱정하고 있을 텐데. 일찍 돌아가면 추 소저도 마음을 놓을 수 있잖아.’
추억몽은 그동안 아무 불만도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 영구는 양준 앞에서 말한 적은 없지만, 이러한 상황들을 모두 알고 있기에 그녀가 잠 못 이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갈 곳이 한 군데 더 남았어.”
양준은 무기력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영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없이 양준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서야 두 사람은 우뚝 솟은 커다란 궁전에 다다랐다. 궁전의 큰 입구에는 지키는 이도 없고, 대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버려진 궁전 같았다.
영구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커다란 궁전은 다름 아닌 전성의 중심에 있는 성지, 봉신전이었다.
이곳은 중도 8대 세가에 속한 신유 경지 이상의 태상장로 여덟 명이 진을 치고 있는 궁전이었다.
‘이곳에는 왜 오셨지?’
영구는 의문이 들었다.
봉신전의 편액을 바라보며, 양준은 극도의 무기력함을 느꼈다. 방금 전 양위 관저를 떠날 때, 그의 귓가에 갑자기 장로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에게 봉신전으로 오라고 했다. 이는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가 부르는 것이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여덟 명의 태상장로들의 감시 하에 있는 모양이었다. 사소한 움직임도 그들을 속일 수가 없었다.
양준은 남에게 제어당하는 느낌이 너무나 불쾌했다. 불만이 있으니, 당연히 안색도 좋지 않았다.
정문 앞에 이르자, 그가 미처 자기소개를 할 사이도 없이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영구를 데리고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간 뒤에야 다시 대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 사이 그림자 하나도 얼씬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양준은 신유 경지 이상 고수의 실력에 대해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봉신전 안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사방의 벽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어 어두운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우뚝 서 있는 돌기둥에는 수많은 금수들이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었다.
보석과 기둥을 바라보는 순간, 양준은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들은 두서없이 배치된 게 아니라 그중에 형용할 수 없는 현묘함이 내재돼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살펴보면 알아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해 걸었다.
봉신전의 원기는 순수하고 자연 그대로였다. 분명 궁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첩첩산중에 있는 것처럼 새소리와 벌레소리가 들리고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도 들려왔다.
곳곳에 신비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양준이 호기심에 차서 둘러보는 것과 달리, 영구는 안에 들어선 뒤부터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표정은 더욱 침착해져 있었다.
안내하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준은 누군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왠지 두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꼬불꼬불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순간 앞쪽이 훤해졌다.
양준과 영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곳에 다다라 있었다.
그곳은 봉신전 가운데 있는 한 전당이었다. 눈앞의 원탁 위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여덟 명이 서로 십몇 장 정도를 사이에 두고 팔각으로 앉아 있었다. 여덟 명 모두 속세를 벗어난 듯 고아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커다란 빛을 뿜는 구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양준과 영구가 도착했지만, 여덟 명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신기하고 현묘한 법결(法訣)을 쥐고서 미간을 좁히며 심사숙고하다가 또 미소를 지으며 한가운데 떠 있는 구체에 원기를 주입하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원기가 주입되면, 구체도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양준과 영구는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해 빛나는 구체를 지켜보면서 여덟 명의 움직임에 내재된 깊은 뜻을 깨치려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양준은 순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른 곳에 와 있었다. 그는 원래 전당에서 멀리 떨어져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푸른 하늘 아래, 푸른 잔디를 밟고 서 있었으며 주위는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와 꽃향기로 넘쳐났다.
하늘에서는 누군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강한 원기 파동이 전해지면서 그는 거의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본 순간, 양준은 호흡이 정지되었다.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은 방금 원탁에 앉아 있던 여덟 명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이 펼치는 초식은 아무 흔적도 없었다. 어쩌면 초식이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손이 가는대로 규칙도, 궤적도 없이 움직였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모습이었다.
여덟 명은 한창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서로 적이 되어 엉켜서 싸웠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공중에서는 끊임없이 커다란 빛이 폭발했다. 그로 인한 거센 바람에 풀들이 쓰러졌다.
“어?”
누군가 놀라서 소리치며 싸움터에서 빠져나와 아래를 흘끔 보았다. 아래쪽에는 양준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었다. 작은 세계에 양준이 나타난 것을 발견한 그들은 모두 손을 멈추고 괴이쩍은 표정을 지었다.
“양씨, 자네 가문 자손이 아닌가?”
조금 퉁퉁해 보이는 노인이 물었다.
양립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를 가지고 양준을 보았다.
“양준이 여덟 어르신을 뵙습니다.”
양준은 재빨리 얼굴빛을 가다듬고 공손히 예를 표했다.
“우리 의식으로 들어오다니, 제법인데. 역시 양씨 가문의 후계자는 남다르군.”
키가 작은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들이 이미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무심하다고는 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양립정에게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양준이 이곳에 들어오자 그들은 모두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양립정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양준의 정신이 다시 아찔해지더니, 곧 양립정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음, 그래. 양준이라고 했나?”
양립정은 뒷짐을 지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했지만 혈색이 좋았다.
“네.”
양준은 비굴하지도, 도도하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양립정은 양씨 가문에 있는 신유 경지 이상 고수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정확하게 몇 대 조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백 세는 넘는 고령이었다.
몇 세대가 차이 나는 데다, 양씨 가문 자체가 원래 가족 간의 정이 메말랐기에 양준은 이 순간 식구를 만났다는 친밀감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느냐?”
양립정은 양준을 시험이라도 하는 듯이 다시 물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계승 싸움이 시작된 지도 한참 되었다. 양립정이 하필이면 왜 지금 자신을 부른 건지 당연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마가 전성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악한 기운에 봉신전에 있던 여덟 명의 태상장로들이 경계를 높인 것이다.
그들 여덟 명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젊은 세대 무인들이 창운사지의 습격을 받지 않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력이 막강한 사마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묻겠다. 그자는 어디 출신이냐?”
양립정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양준을 지켜보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양준의 영혼 깊숙이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립정이 감지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정체는 저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다?”
양립정은 눈썹을 찡그리며 언짢아했다. 양준이 고의로 숨기는 것이 아닌가 가늠하기 위해 그의 말과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양준은 지마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전승동천에서 그를 굴복시킬 당시, 지마는 영체로서 기억이 혼란스럽고 모호한 상태라 본인의 이름조차 몰랐다. 훗날 함께하면서 양준이 더는 그의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나, 창운사지 출신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양준은 양립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얼른 정색하고 말했다.
양립정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한참 동안 미간을 찡그리다가 말했다.
“원칙적으로 계승 싸움은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애초에 너희들의 인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그자 역시 네 인맥 중 하나이지. 그러니 내가 만약 그를 쫓아내라고 하거나 죽이라고 하면 넌 아마 수긍하지 못할 게다. 이는 너를 압박하는 것이고, 조용히 앉아서 전성을 지키려던 우리의 의도와 다르기도 하고.”
양준은 가슴이 서늘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에 너를 부른 것도 바로 이 일 때문이다. 그자를 계승 싸움에 참여시켜도 되고, 전성에 남게 해도 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만약 그자가 그 외의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돌아가서 그렇게 전해라.”
양립정은 냉담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리고 그자는 계승 싸움이 끝나는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양준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양립정은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로 양준 역시 그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이번 만남은 낯선 이와의 만남과 다를 바 없었다. 더욱이 양립정의 경고는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이만 가 보거라.”
양립정은 말을 마친 뒤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곧 하늘로 날아올라가 다시 다른 일곱 명의 장로들과 전투를 이어갔다.
이상하게도 양준은 가슴이 막히는 느낌이 들면서 떠나려고 해도 어찌 떠나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