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1장. 지마가 나서다
깊은 구덩이 속에는 어느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얼굴이 흐릿하여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고, 온몸에서는 하늘을 찌를 듯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또한 짙은 붉은색의 눈동자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의 고함소리와 함께 지면에는 커다란 핏방울이 가득 솟아났다.
팡- 팡- 팡-
핏방울이 터지면서 지면은 붉게 물들었고, 곧 진득진득하고 미끄러워졌다. 마치 땅속 깊숙한 곳에 피의 샘물이 있어 끊임없이 피가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건 도대체 무슨 물건이야?”
양항 관저의 무인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사람이라고 하자니 눈동자에 인간으로서의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고, 오직 살육만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니, 인간의 모든 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마의 커다란 혹이 좀 이상해 보일 뿐이었다.
“대협, 저게 무엇입니까?”
추억몽 역시 얼굴빛을 달리했다. 그녀는 진작부터 지마에게서 꺼림찍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을 보니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추억몽은 아래쪽의 괴상한 사람을 내려다보며 왠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껄껄… 저건 내가 직접 만든 괴뢰혈마(傀儡血魔)라네.”
지마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본인의 작품에 대해 무척이나 의기양양해했다.
추억몽은 이마를 문지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혈마는 이미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지면 위에 고인 핏물은 진득진득하고 강한 흡착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핏물에 젖은 무인들은 아무도 벗어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혈마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한 무인 앞으로 달려가더니 그 무인을 한 손으로 내리쳐서 피 안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피 안개는 다시 혈마의 몸에 흡수되어 그의 실력을 올려 주었다.
연이어 붉은 그림자가 번쩍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핏물에 엉겨 있던 무인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혈마는 여전히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혈마가 가는 곳마다 핏물이 퍼져 나갔고, 일단 핏물에 물드는 순간, 신유 경지 5단계 이하 무인들은 갖은 애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저놈을 죽여라.”
양항도 혈마의 놀라운 살상력을 알아보고, 휘하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유 경지 6, 7단계 무인들은 혈마와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비보를 선보이며 가장 강한 무공을 펼쳤다.
혈마는 속도가 빨라 몇 차례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수적으로 우세를 차지하는 적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상대 역시 무자비하게 혈마의 두 다리를 때려 부쉈다. 혈마는 곧 피바다에 쓰러졌다.
“별것 아니었네.”
양항은 이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불안했던 마음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런 괴물이 인파 속을 헤집고 다니게 놔두면 혈마의 전투력이 어떤지를 차치하고, 실력이 낮은 무인들에게는 위압감을 줄 수 있었다.
“대협……!”
추억몽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양새가 험상궂고 무시무시한 괴뢰혈마가 이렇게 약하다니!
지마는 낄낄낄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 보게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다리가 부서진 혈마가 손으로 반만 남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반신의 다리가 끊긴 부분은 미친 듯이 핏물을 빨아들였다.
핏물을 빨아들이자, 끊겼던 다리가 한동안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무엇인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혈마의 두 다리가 멀쩡해졌다.
“말도 안 돼.”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양항 관저의 무인뿐만 아니라 추억몽 일행도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절단된 두 다리가 재생할 수 있다니. 저… 저것이 정녕 사람이라는 말인가?’
이 기괴한 광경은 사람들의 견식을 벗어나 있었다.
“나도 놀러 가야겠다.”
지마가 비릿하게 웃더니 무지갯빛으로 변한 채 아래쪽으로 날아갔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파혼추가 그의 어깨에서 핑그르르 회전했다. 파혼추는 마치 영성이라도 있는 듯이 놀라운 원기 파동을 내뿜었다.
파혼추는 이미 현급 비보의 수준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지마에게서 전해지는 기이한 기운과 강한 압박감에 양항 관저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당우선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 제 곁에 계십시오.”
양항은 입술이 바싹 마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득 궁지에 몰린 느낌이 들었다.
두 혈시 가운데 도봉은 현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관저에 이제 더는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가 없는데 어떻게 저 음침한 기운의 고수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당우선 혼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우선이 전투에 나서면 누가 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누군가 지켜보는 것이 느껴지자, 양항은 심지어 정신이 빨려 나가는 듯한 공포감까지 들었다.
양항이 공포에 휩싸여 있는 동안, 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각종 음산하고 수상쩍은 무공을 연이어 펼쳤다. 파혼추도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지마는 무인지경에 들어선 듯 홀로 양항의 세력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혈마가 옆에서 소동을 일으키자, 양항 관저는 순식간에 흉흉해져 이들을 전혀 막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 우리가 안 와도 됐을 거 같지 않아?”
곽성진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지마와 혈마는 공격 수단이 하나같이 강하고 난폭했다. 혈마는 말할 것도 없이 불사신과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 짧은 시간 내에 몇 번이나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멀쩡하게 재생되었고, 실력이 뛰어난 지마에게는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인파 속에서 종횡무진하며 사람들을 마구 죽였으며 수단 또한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났다.
추억몽은 한참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 둘만으로는 안 돼.”
그들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나, 호랑이가 늑대 무리를 당해 내지 못하듯이 양항 관저에도 고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대는 이미 혈마의 약점을 알아챈 듯했다.
혈마가 신속하게 재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피바다 때문이었다.
벌써 한성(寒性) 공법이나 화성(火性) 공법을 수련하는 무인들이 피바다를 얼음으로 봉인하거나 불로 태우고 있었다. 피바다의 면적이 줄어듦에 따라 혈마의 움직임도 점차 무기력해졌다.
지마도 이 사실을 알아채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손을 흔들어 혈마를 불러들였다.
“우리도 나선다.”
추억몽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양항의 세력이 혼란에 빠진 지금, 위기는 이미 타개되었으므로 이제 그의 세력을 야금야금 먹어 버리면 되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곽성진은 씩 웃더니 아래쪽으로 내려가 곧바로 고양풍을 찾았다.
“고 형, 한판 붙어 보죠.”
고양풍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곽 형, 제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둘은 싸워 본 적은 없었지만, 고양풍은 곽성진 같은 부잣집 도련님이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될지, 안 될지는 붙어 봐야 알죠.”
곽성진은 빙그레 웃으며 접선을 뒷덜미 쪽 옷깃에 꽂았다. 이내 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좋습니다.”
고양풍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맞붙어 싸웠다. 그들 곁을 지키던 신유 경지 5단계 고수 네 명도 서로 상대를 찾아 맞붙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지마의 공격을 피하던 여송이 동경한에게 찍혔다.
지난번 파경호 비보 쟁탈전 때 여송은 지속적으로 동경한을 겨냥하여 방해했었다. 심지어 여송 때문에 하마터면 천급 상품의 신혼 비보를 잃어버릴 뻔했다. 이에 동경한은 이를 갈았다.
그때는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해 그도 여송과 실랑이질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공격하는 쪽으로서 그는 지난 원한까지 모두 깨끗이 청산할 예정이었다. 안목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송을 어서 빨리 전성에서 내쫓아 버리고 싶었다.
호씨 자매와 관지락 일행도 아래쪽으로 달려들었다. 자매들의 몸에서는 옅은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빛무리가 그녀들의 생명과 진원을 하나로 이어 놓으며 원래의 경지를 뛰어넘어 신유 경지 못지않은 실력을 뽐냈다.
두 자매를 몰래 지켜보던 추억몽은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평범한 이들은 아니었군!’
자미곡의 범홍과 문심궁의 좌방도 각각 사람들을 이끌고 적을 찾아 공격했다.
단목 가문의 다섯 명은 진작부터 움직이고 싶었다. 그들은 놀라운 기세로 전력을 다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달려들었다. 이번 싸움은 그들의 복수전이었다.
“추 소저, 저는 여기 남아 소저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류비생이 정이 넘치는 얼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양준 관저에 있는 동안, 그는 추억몽의 전용 호위가 되다시피 해 그녀의 곁을 바싹 따라다녔다. 눈이 있다면 누구나 그가 추억몽에게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억몽은 여러 차례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하는 법. 더욱이 양준의 동맹이기에 추억몽도 너무 모질게는 대하지 못하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될수록 단둘이 있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괜찮아요. 소만이로도 충분해요.”
추억몽은 방그레 웃으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럼 저도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류비생은 잠깐 망설이다가 천원성의 사람들을 이끌고 싸우러 갔다.
공중에는 추억몽과 낙소만,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혈시 소순만 남았다.
양준이 오지 않으면, 소순과 영구는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설령 누군가 추억몽과 낙소만을 공격한다고 해도 그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따르는 이는 추억몽과 낙소만이 아니라 양준이기 때문이었다.
지마와 혈마의 교란으로 양항 관저의 무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동경한 일행이 내려갔을 때, 상대방은 제각기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추억몽이 바라던 바였다.
상대방은 인원수가 많기에 그들의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제각기 싸우게 된다면, 추억몽은 자기 쪽 세력이 어느 세력에도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연단방에서 매일 만들어 내는 현급 단약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추억몽도 며칠 사이에 자신의 무공이 일취월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며 거의 수련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어떠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