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2장. 드디어 이날이 오고야 말았네요
공중에 뜬 채로 전체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던 추억몽은 이미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이번 전투는 양준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이 오지 않는다면 그들의 손해는 매우 클 것이다.
‘그 녀석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비우다니.’
추억몽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소순이 갑자기 귀를 움직이며 씨익 웃었다.
“추 소저,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추억몽은 기뻐하며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양준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옆에 멈춰 선 양준은 아래쪽을 훑어보더니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전투 상황은 그가 예상한 것과 비슷했다.
“난 또 안 오는 줄 알았지 뭐야.”
추억몽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양준이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은 무슨.”
추억몽은 기분이 언짢아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곧 빨간 입술을 떡 벌리더니 멍하게 양준을 바라보며 놀란 말투로 물었다.
“너 또 경지를 돌파했어?”
추억몽은 지금 신유 경지 1단계라서 신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양준이 일부러 기운을 숨기지 않는 이상, 그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양준이 왜 늦게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돌파가 코앞이니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표정이 바로 풀어지며, 심지어 양준의 경지 돌파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응.”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진원 경지 9단계에서 한 단계만 더 오르면 신유 경지였다. 지금 그의 몸에 흐르는 기운은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제부터는 네 뜻대로 해.”
추억몽은 진지한 얼굴로 화두를 눈앞의 전투에 돌렸다. 그녀는 양준이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모조리 죽이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어. 적당할 때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소순을 데리고 양항을 잡는다면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고수들도 회유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회유는 어려워.”
“어렵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추억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양준이 다른 건 다 좋은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결정한 사안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말해도 바꿀 수 없었다.
사실상 죽고 죽이며 손에 서로의 피를 묻힌 상황에서 살아남은 무인들을 회유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회유하지 못한다면 그런 줄 알아.”
양준은 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추억몽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를 흘겨보았다. 겉으로 언짢아하는 듯했지만 그녀도 양준의 생각에 찬성하는 바였다.
단목 가문도 계승 싸움 첫날 밤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다섯 명만 남았다. 만약 그때 양항과 양영이 다섯 명을 회유했다면 그들이 포섭되었을까? 피맺힌 원한 관계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오늘밤 전투로 양항 저택의 세력들은 모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런데 어떻게 양준에게 의탁하러 올 수 있겠는가? 설령 그들이 의탁하러 온다고 해도 앞으로 양준 관저의 기존 조력자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는가? 다들 서로를 원수로 볼 텐데 매일 함께 있다가는 분명 소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양준이 아무리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피맺힌 원한까지 내려놓게 할 수는 없었다.
“회유하지 못한다면 속전속결로 끝내.”
추억몽은 심호흡을 하고,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준이 왔으니 영구와 소순을 데리고 전투에 참여해 양항을 제압할 수 있었다. 양항의 현재 방어 실력으로는 두 명의 혈시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준은 음산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
“속전속결? 나 이제 왔는데?”
“어쩔 생각인데?”
추억몽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들이 희망을 잃게 할 거야.”
양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추억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잊지 마. 저들이 희망을 잃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한테 의탁하려 할 거야. 그러면 나와 적이 되는 거지.”
그리고 그들이 의탁할 사람은 분명 양소일 것이다. 양소와 양항은 친형제였으니 이 점은 의심할 것도 없었다.
양준이 웃는 것을 보고 추억몽은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양준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양항은 곧 양준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불을 뿜을 듯한 눈빛으로 위쪽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했다.
“막내야!”
양준은 미소를 짓더니 화사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다섯째 형님, 좋은 밤입니다.”
그런 양준의 태도에 양항은 화가 나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좋지. 막내 넌 역시 독하구나. 내가 많이 배웠다.”
양준은 미소를 서서히 거두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소순, 영구, 따라와.”
소순은 잔인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의 영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양준은 전쟁터의 한 곳을 향해 곧장 뛰어내렸다.
원래도 수세에 몰려 있던 양항 관저의 무인들은 양준과 두 혈시가 가세하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무인들은 양준의 공격에 머리가 아팠다. 양준에게 반격하자니,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인다면 두 명의 혈시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반격을 하지 않자니, 양준의 개인 전투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유 경지의 고수라고 하더라도 그의 일격을 막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양준은 이르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사람들을 때려눕혔다. 거의 무인지경으로 적진을 누비고 있었다.
그는 혈시들에 대한 양씨 가문의 규칙을 역이용했다. 규칙의 허점을 이용해 무뢰한에 가까운 수법으로 상대가 공격을 막아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양항의 관저는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 나갔고, 절망에 찬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양항의 표정은 분노에서 낙담으로 바뀌었다. 그는 양준이 도대체 어찌할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양준은 이미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와 영기는 신경 쓰지 않고 두 혈시를 거느리고 사람들 속을 오가며 맹공격을 퍼부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무인 한 명이 갑자기 양항의 앞에 나타났다.
절망하고 있던 양항은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다급히 물었다.
“둘째 형님은?”
오늘밤 관저가 습격받자마자, 양항은 이미 사람을 보내 양소에게 지원을 요청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다섯째 공자님, 둘째 공자께서 지원을 못 오실 것 같습니다.”
“뭐라고?”
양항은 순간 당황해서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된 일이냐?”
“대공자께서 사람을 이끌고 지금 둘째 공자의 관저에서 소란을 피우는 중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양항은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휘청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하필 내가 공격을 당한 순간에 큰형님이 둘째 형님을 견제하고 있다고? 설마 막내가 큰형님이랑 손을 잡은 건가?’
“공자님, 둘째 공자께서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무인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뭐라고 했는데?”
양항의 눈에는 실낱 같은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둘째 공자께서…….”
무인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패배를 인정해. 막내가 널 죽이진 않을 것이니.’”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곧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패배를 인정하라고?”
양항은 그 말을 되뇌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나 양항이 어떻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겠어?”
절망에 빠졌던 그는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양준!”
그의 고함소리는 전성의 절반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한창 살육을 벌이던 양준은 그 소리에 바로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덤덤한 얼굴로 양항을 굽어보았다.
“막내야, 모두가 널 간과하고 있었구나. 나조차도. 난 진 게 억울하지 않아. 하지만 날 이기려면 정면으로 맞서야 할 거야. 할 수 있겠어?”
양항의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승자는 당연히 자신이라는 듯 의기양양했고, 전혀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좋죠.”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양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만 저도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말해.”
양항은 심호흡을 하더니 마음을 가라앉힌 듯했다.
“오늘밤 여기서 살아남은 형님의 조력자들을 모두 전성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양항은 멍해졌다가 곧이어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냉소하였다.
“남은 사람들이 둘째 형님한테 의탁할까 봐 그러는 거냐?”
“형님 생각에는요?”
양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양준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지금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화근을 없앨 수도 있었다. 양항은 자신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양준이 정말 그런 짓을 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근을 남겨 놓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 사람들을 살려 두면 나중에 분명 적이 될 것이 분명한데, 누구라도 화근을 남겨 놓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양준은 너무 매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지 않아 이런 요구를 제안한 것이었다.
“좋다.”
양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당우선을 데리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패배는 기정사실이지만 갈 때 가더라도 멋있게 가야지. 미적거리는 건 양씨 가문에 어울리지 않아.’
당우선은 반 걸음 나서며 양항의 앞을 막았다. 그녀는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드디어 이날이 오고야 말았네요.”
곡고의와 영구에게 사고가 없었다면 당우선과 도봉은 양준의 곁을 보필하며 웃는 얼굴로 그의 승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당우선이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양준과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번에는 끼어들지 마. 이건 나와 막내 사이의 일이다.”
양항도 당우선과 양준의 관계를 알고 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섯째 공자님!”
당우선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보조개가 옴폭 파였다.
“혈시는 혈시들의 규정이 있습니다. 공자님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 혈시들이 계승 싸움에 참여한 이유입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공자님의 허락과 상관없이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양항은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도봉과 당우선을 선택한 것은 일부러 양준의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도봉과 당우선의 충성심을 여러 번 의심했었다. 특히 양준을 적으로 두고 있을 때, 그는 두 사람이 공과 사를 분간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당우선은 여전히 혈시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우선이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영구가 갑자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