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4장. 일부러 그런 거야
양항의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전쟁터의 한쪽 모퉁이에서 동경한은 여송을 마구 괴롭히고 있었다.
여송도 실력이 나쁘지 않았고, 며칠 전 파경호에서 동경한과 겨룬 적이 있어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오늘 동경한이 그에게 결투를 요청했을 때, 여송도 거절하지 않고 통쾌하게 맞섰다.
하지만 며칠 사이 동경한의 실력은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한차례 접전을 치르고 난 뒤 여송이 참패했다. 심지어 반격할 기회도 없이 동경한에게 압살당해, 꼴이 아주 초라해졌다.
‘이 녀석 갑자기 약 처먹었나? 왜 이렇게 강해진 거야?’
여송은 맞아서 시퍼렇게 부은 얼굴로 도망쳤다.
“도망쳐? 감히 도망쳐? 어디 더 도망쳐 봐.”
동경한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뚱뚱한 몸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멋진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몸을 날려 여송의 앞길을 막고 귀싸대기를 거세게 후려쳤다.
여송은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동경한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어느샌가 그는 손의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찰싹-
여송은 반쪽 얼굴이 마비된 듯했다.
가차없이 후려치는 동경한의 행동에 여송은 피를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도 나름 일등 세가의 공자인데, 보는 눈이 많아 소문이라도 나면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라는 거야?’
여송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동경한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동경한은 금세 거리를 좁히며 또 따귀를 날렸다.
찰싹-
여송은 울화가 치밀어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막을 수 있는 초식도 막지 못하고 또 따귀를 철썩 얻어맞았다. 이에 그의 두 눈마저 빨개졌다.
“눈치코치도 없는 놈은 전성에서 꺼져.”
동경한은 욕을 퍼부으면서 신나게 여송을 두들겨 팼다.
“누님!”
여송은 허공을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누님은 개뿔.”
동경한이 또 따귀를 날렸다.
하늘에 있던 추억몽은 아래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젓고는 여송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다.
여송이 양준 관저에서 쫓겨난 이튿날, 그녀는 여송에게 사적으로 찾아가 이번 계승 싸움에 참여하지 말고 전성을 떠나라고 말해 주었다. 눈치 없는 여송이 사람을 잘못 건드려 여씨 가문에 화를 부를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송은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처를 치료한 뒤, 양항에게 의탁해 양준과 적대하려고 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구조를 요청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동경한이 그를 죽일 리는 없었다.
‘이렇게 혼내 줘서 교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쩌면 계승 싸움이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테니.’
전쟁터는 이내 조용해졌다. 양항이 공중에서 추락한 뒤로 모든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었다. 오직 동경한만 여송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여송의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에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양항 관저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번 전투로 손실이 막대했고, 사상자도 절반이 넘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는 누구도 이런 결말을 생각하지 못했다. 양항의 실력이 가장 강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약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누군가 치러 와도 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준이 가지고 있는 힘은 소리 소문 없이 어느새 모든 양씨 가문 공자들을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영기를 가져와.”
양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순은 몸을 날려 양항 관저의 중전으로 들어가 영기를 들고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누구도 막는 사람이 없었고, 또 누구도 감히 막지 못했다.
영기를 빼앗겼다는 건 양항이 진정으로 탈락되었음을 의미했다.
땅바닥에 누운 양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전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너희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겠다.”
양준은 아직 살아 있는 무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다섯째 형님 저택에 있는 모든 물자를 내 저택으로 옮겨 둔 다음 전성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말거라. 그러지 않으면… 모조리 죽일 것이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강도 행위를 질책하는 이도 없었다. 이는 양준이 마땅히 얻어야 할 것들이었다.
오늘밤의 살육전을 두 눈으로 지켜본 무인들은 전성에 남아 있을 용기도 없었다. 게다가 양항은 방금 전에 이미 양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양항이 나서서 말한다면 그에게 의탁하러 왔던 사람들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해 못한 사람 있나? 이해 못한 사람은 떠나지 말고 모두 남아.”
양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아래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막내 공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얼른 소리치며 대답했다. 그들은 양준 무리가 또 살육을 벌일까 겁났다.
양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얼른 돌아가자.”
추억몽은 무거운 얼굴로 불안해하며 말했다.
“원래는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했는데 네가 시간을 끌어서 너무 오래 걸렸어. 저택에 남아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 양영이랑 양신이 움직일지도 모르고.”
지금 양준의 저택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양신과 양영이 이쪽 소식을 알게 된다면, 양준의 관저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영기를 노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곡고의가 지키고 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일부러 시간 끈 거야.”
“뭐라고?”
“여섯째랑 일곱째 형님은 아마 벌써 움직였을걸?”
양준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해?”
추억몽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물론이지.”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조금도 걱정되지 않아?”
추억몽은 조급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째서 양신과 양영이 소식을 알도록 일부러 시간을 끈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영기는 무사할 거야.”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곡고의 혼자서 중전의 영기를 지키기는 버거울 테지만, 저택에는 몽무애도 있지 않은가.
몽무애는 비록 말로는 계승 싸움에 끼지 않겠다고 했으나 정말 위기가 닥쳐온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양준은 이에 대해 자신이 있었다.
“오늘밤은 기회야.”
양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여섯째 형님 저택이랑 가까우니 우린 그쪽으로 가자.”
추억몽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룻밤 안에 일을 얼마나 벌여 놓으려는 거야?”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양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오늘밤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는 여러 날 앞당겨 현급 비보 하나를 흡수했고, 지마가 돌아왔으며 영구가 회복되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의 우세였다. 이런 우세는 한 번 노출되어 버리면, 다음 번에는 다른 공자들도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기에 효과가 별로 없었다.
*양소 관저.
양소는 쓴웃음을 지으며 무인들을 거느리고 저택 앞에서 양위와 대치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하룻밤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목이 쉴 지경이었지만 싸우지는 않았다.
양소는 양위가 그의 발을 묶어 두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물론 싸울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양소의 곁으로 와서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양소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동시에 누군가 양위의 옆으로 와서 같은 말을 전달했다.
잠시 뒤, 두 형제가 시선을 마주치자 양소가 입을 열었다.
“큰형님, 막내가 무슨 속셈인지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양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양항이 탈락한 것은 두 사람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양준 측이 거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양위나 양소 모두 막내가 다섯째를 이기더라도 처참한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격과 수비에서 수비인 양항이 시간적, 지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다들 놀라움과 함께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큰형님,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저희끼리 손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막내가 이렇게 강한데 이번에 다섯째를 이겼으니 세력이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지금 손을 잡지 않는다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양위는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양소가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막내의 지금 추세로 제 추측이 맞는다면 다음 목표는 여섯째 아니면 일곱째일 겁니다. 그 둘을 이기고 나면 우리가 되겠죠. 설마 아직도 막내랑 손잡아서 절 먼저 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양위는 고개를 저었다.
“막내랑 함께 행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막내가 여섯째와 일곱째를 이기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해. 막내의 다음 목표가 우리임이 확실시됐을 때 손잡아도 늦지 않아.”
양소는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됩니다.”
“이제 이곳에는 볼일이 없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양위도 길게 말하지 않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떠나갔다.
양위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양소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막내야, 너는 휘하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두고 있기에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것이냐?”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아까 소식을 전한 사람을 찾아서 양항 저택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이내 지마의 잔혹한 수단을 전해 들은 양소는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말했다.
“사마가 아니냐?”
“제가 봤을 땐 행동거지가 사마 쪽으로 보였습니다. 다섯째 공자 저택의 무인들도 거의 그자가 혼자서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자만 아니었어도 다섯째 공자가 그렇게 참패하진 않았을 겁니다.”
비보 쟁탈전이 있기 전에 공자들의 조력자는 수적으로 거의 비슷했다. 약간씩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별반 크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도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자신의 허점을 보이는 격이었다.
하지만 비보 쟁탈전이 끝난 뒤, 양준 관저의 실력은 다른 형제들과 월등한 차이를 보였다. 이에 대해 양소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잔혹한 사마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거지? 왜 난 전에 한 번도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