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5장. 연이은 패배
“신유!”
양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가요?”
엽신유가 하늘하늘 걸어오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지난번에 부탁드린 그 고수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엽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못 찾았어요. 파경호에서 나타난 뒤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요.”
“계속 알아보세요.”
양소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자를 꼭 찾아내서 제게 협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파경호에 나타난 신비한 고수가 여덟 번째 현급 비보를 가져갔다. 양준뿐만 아니라 양소도 똑같이 그자의 정체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이런 신비한 재주를 가진 고수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양소는 양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 기대감 때문에 양소는 여력을 남기지 않고 열심히 고수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이날 밤, 양준은 갑자기 양항을 공격했고 맏이인 양위는 사람을 거느리고 가서 양소의 발을 묶었다. 두 곳은 모두 형세가 급박했다.
양신은 이 소식을 듣고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양영에게 소식을 전해 함께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섰다. 양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영기를 빼앗아 그를 탈락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양위, 양소, 양준, 양항 네 사람은 모두 몸을 뺄 수가 없고 휘하의 무인들이 분산되어 있었다. 때문에, 설령 그들이 관저를 비운다 하더라도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이에 자신감을 가진 양신과 양영은 옆에 남은 혈시 한 명과 자신의 세력에서 7할의 무인들을 데리고 양준의 관저로 향했다.
그들은 속전속결로 양준 관저의 수비를 뚫으려고 했다. 양신이 야망이 큰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터였다. 이 결정은 아주 정확했다.
하지만 양신은 형세를 잘못 파악했다.
그는 양준과 양항이 아주 오랫동안 싸울 것이고, 자신과 양영이 손쉽게 양준의 영기를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두 사람이 영기를 가지고 돌아갈 때에도 양준과 양항은 아직 승부를 가르지 못했을 터였다. 이는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간적 차이였다.
두 대열은 재빨리 움직여 곧 양준 관저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들이 맹공격을 펼치자 양준 관저의 무인들은 무기력하게 뒤로 물러났다. 관저에 남아 있는 세력이라고는 만화궁, 비우각, 향씨 가문, 영월문, 혈전방, 귀왕곡이 다였다. 이 사람들이 어찌 양신과 양영이 데려온 무인들의 공격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추억몽과 곽성진도 자리를 비우자, 모든 이들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이때, 만화궁의 대사저 한소칠이 나서서 위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녀의 지휘 하에 사람들은 그제야 질서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상대와의 현저한 실력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피하기 바빴다.
양신과 양영은 이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얼른 사람을 시켜 중전으로 가서 영기를 빼앗아 오라고 명령했다.
곡고의는 혼자 힘으로 적들을 막아 냈다. 그는 패혈광술로 무장하여 무시무시한 기세로 영기를 지켰다.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곡고의가 꿈쩍도 하지 않자, 양신과 양영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바로 이때, 부하가 뛰어와 양항이 패배했다고 보고했다. 그것도 깔끔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고. 또한 이미 양준은 휘하 무인들을 데리고 양항 관저에서 떠났다고 했다.
양신과 양영은 깜짝 놀라 더 이상 뜸을 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직접 혈시들을 데리고 선두에 서서 공격을 펼쳤다. 양준이 돌아오기 전에 전투를 끝낼 생각이었다.
곡고의의 실력은 대단했지만 결국은 혼자인지라 양신과 양영 옆의 혈시들 중 어느 한 명으로도 그를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두 공자와 두 혈시까지 나서자 곡고의는 결국 수적으로 밀려 중전을 지킬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이 손만 뻗으면 영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순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마치 아주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노인은 손쉽게 영기를 빼앗으러 온 무인들을 막아 냈다.
양신과 양영은 두 눈이 벌개졌다. 승리가 코앞인데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네가 나타나 길을 막다니……. 하지만 그들이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휘하의 무인들에게 끊임없이 앞으로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노인의 실력은 너무 강했다. 게다가 곡고의와 양준 관저의 신유 경지 무인들까지 함께 힘을 합치자 중전에는 바람 하나 새지 않는 방어막이 생겼다.
한참 실랑이질을 한 양신과 양영은 모두 절망에 빠졌다. 이상한 것은 양준이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의구심을 품고 있던 중, 두 사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서운 생각이 있었다. 때마침 무인 한 명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와 보고했다.
“여섯째 공자, 큰일 났습니다. 막내 공자가 사람을 이끌고 여기가 아니라 저희 저택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양신은 찬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양준 관저의 수비가 약한 틈을 타 영기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런데 양준도 양항을 치고 난 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섯째 형님……!”
양영은 처량한 표정으로 양신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자.”
양신은 감히 머뭇거리지 못했다. 이곳도 난공불락이라 뚫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자신의 관저에 불까지 났으니 어찌 이곳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양영은 이를 악물고 몽무애를 매섭게 노려본 뒤, 지체하지 않고 양신과 함께 떠나갔다.
길을 반 정도 가서야 양신은 그의 관저에 있던 무인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양신 공자!”
달려오던 무인도 양신과 양영 일행을 발견하고 다급히 다가오더니 훌쩍거리며 하소연했다.
“막내 공자가 너무 악랄했습니다. 관저에 들어오자마자 빼앗고 죽이고 약탈해서 저희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기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신은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서글픔과 절망이 드리웠다.
‘참 멍청하게도 졌구나.’
양항이 탈락된 것은 적어도 양준이 사람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양항은 실력이 부족하여 패배한 것이라고 해도 자신은? 자신은 이득을 탐내다가 방심해 자초한 실패였다. 양준과 양항의 전투가 이토록 빨리 끝나게 될 줄 몰랐고, 양준 관저의 수비가 이토록 강할 줄 몰랐던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결국 참담한 결과를 몰고 온 것이었다.
“여섯째 형님……!”
양영은 입을 꾹 다물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나지막하게 형님을 부르기만 했다.
양신은 곧 침착해지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일곱째야, 너는 날 데리고 가문으로 가서 물자로 바꾸거라. 그리고 내 저택에 남은 무인들도 전부 네가 데려가.”
“형님!”
양영은 감동받은 얼굴로 입을 달싹거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은 친형제이니 계승 싸움에서도 줄곧 서로 도와주었다. 지금 양신은 이미 영기를 빼앗겨 탈락되었으니, 그가 할 일은 당연히 양영의 세력을 키워 주는 것이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해! 막내 녀석이 욕심 많은 거 몰라? 내 관저를 공격했으니 이제 널 공격할 거야. 어서 돌아가.”
양신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양영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양신과 뭐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다급히 사람들과 함께 돌아갔다.
“여섯째 공자님, 공자님께서는 탈락하셨으니 이 나해(羅海)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양신의 옆에 있던 혈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양신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막내한테 의탁하러 가는 거지?”
나해는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만을 기다려 왔나 봐?”
양신은 비아냥거리면서 마음속의 분노를 표출했다.
나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희 혈시들은 왜 하나같이 다 막내한테 가려고 하는 거야? 막내가 무슨 힘을 갖고 있길래 너희들이 그렇게 따르려고 하는 거지?”
양신은 부럽고 샘도 났지만 또 깊은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혈시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습니다. 우리가 막내 공자님께 의탁하는 이유는 여섯째 공자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해가 대답했다.
“겨우 곡고의와 영구 두 사람을 기용했다는 이유로? 그것만으로 너희들이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예.”
나해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신은 가볍게 숨을 들이쉰 뒤, 실망에 찬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가 봐.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나해는 공수하더니 뒤돌아 떠나갔다.
나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양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게도 곡고의와 영구를 기용할 기회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씨 가문의 공자들 모두 그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막내인 양준만이 그럴 패기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곡고의와 영구를 기용했다면 지금 혈시들은 다 나한테 왔겠지? 그랬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내가 지금까지 버틴다는 전제하겠지.’
곡고의와 영구는 그때 부상이 심해 실력을 전성기의 3할 정도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감히 기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양신은 양준이 무슨 신통한 수단으로 곡고의와 영구의 상처를 낫게 했고, 또 어떻게 단시간에 힘을 키워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