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77화 (477/853)

제 477장. 여량이 찾아오다

양준의 관저.

각 세력의 무인들은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찾고 난 뒤, 너도나도 폐관 수련을 하러 갔다. 양준도 하응상을 찾아가 몸과 마음의 피로도 풀 겸, 단약도 받아 수련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막내 공자님, 여량이 와서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여량이라고?’

양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옆에 있는 추억몽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네 숙부님이 오셨다는데.”

추억몽은 그를 흘겨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여송 때문에 오신 거겠지.”

“네가 가 봐. 난 안 갈래.”

양준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널 보러 오신 거라잖아.”

“여송이 소란을 피운 게 두려워서 사과하러 온 거겠지. 내가 나가면 오히려 할 얘기도 못 할 거야. 너희는 친척이니까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겠지.”

말을 마친 양준은 추억몽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곧장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추억몽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양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인들에게 정원에 있는 재료들을 연단방과 연기방으로 옮기라고 지시하고는 밖으로 걸어갔다. 여량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대강 짐작이 되었다. 짐작이 가능하기에 난감할 따름이었다.

입구에 도착해 보니 여량이 서 있었고, 그의 뒤에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이 퉁퉁 부은 여송이 서 있었다.

어젯밤 동경한에게 실컷 혼난 그는 그의 잔인한 수단을 떠올릴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이가 갈렸다. 아직까지 그의 얼굴에 분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추억몽은 그 모습에 몰래 혀를 찼다.

‘글렀네, 글렀어.’

여량은 어색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계승 싸움은 젊은이들의 일이라 여씨 가문의 가주인 여량이 직접 양준을 방문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못난 아들이 한 짓이 너무나 한심한지라 그도 하는 수 없이 낯부끄러운 것도 참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양준의 관저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두 문지기에게 가로막혔다. 공교롭게도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은 바로 동씨 가문 사람이었다. 그들은 여송을 보자 비웃음을 날리며 비아냥거렸다. 여송은 그 말을 듣고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고, 여량도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어찌하지 못했다.

“숙부님!”

추억몽이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부르자, 여량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추 소저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시다니 황송하군요.”

여량은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여송을 노려보았다.

“어서 인사드리지 못해?”

여송은 내키지 않았지만 공수하며 말했다.

“누님!”

추억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따지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여량은 한시름을 놓았다.

‘추억몽이 나더러 들어오라고 하는 건 두 가문의 관계를 아직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야. 죄를 물을 의도는 없어 보이는군.’

이것은 그에게 아직 이번 일을 해결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편전으로 들어간 추억몽은 하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숙부님께서는 어쩐 일로 전성까지 오셨어요?”

“에휴!”

여량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추 소저, 염치 불고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여씨 가문의 미래와 비교했을 때, 제 체면이 뭐 대수겠습니까? 저놈이 천방지축 날뛰지만 않았다면 제가 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말을 마친 여량은 여송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무릎 꿇지 않고 뭐 해.”

여송은 순간 멍해 있다가 퉁퉁 부은 얼굴에 놀란 기색이 서렸다.

“제가 왜요?”

여량은 화를 내며 말했다.

“이 애비 말도 안 들을 테냐.”

여송은 목을 빳빳이 쳐들고 대들었다.

“싫습니다! 어려서부터 전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지 않으면 네 두 다리를 분지를 것이다.”

“하실 수 있으면 그리하시든가요.”

여송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그는 여량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여량이 그를 너무 애지중지 키웠던 것이다. 여량은 집안을 관리하는 데는 능했지만 자식을 가르치는 데에는 매우 서툴렀다.

부자가 옆에서 떠드는 것을 보고 추억몽은 눈썹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숙부님, 자식 교육을 하려면 이곳이 아니라 여씨 가문으로 돌아가서 하셔야죠.”

그녀의 말에 담긴 짜증과 싸늘함을 알아차린 여량은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들 앞으로 다가가 그를 힘껏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꾹 누르고는 속박을 걸었다.

여송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체면을 완전 구겼다고 생각한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적대감으로 가득 했다.

“더 고집을 부리면 아예 이 자리에서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여량은 음산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이 점을 눈치챈 여송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 소저께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여량은 몸을 숙이고 공수했다.

그녀도 여량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런 철없는 아들을 두었으니 누구라도 머리가 아플 만했다. 여송은 성정 면에서는 곽성진보다도 못했다. 곽성진은 방탕하고 제멋대로 살지만 안목이 있어 양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숙부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추억몽은 여송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빈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량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번에 사실 저는 중도로 가서 추 소저의 아버님을 한 번 찾아 뵈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이 녀석이 막내 공자님의 댁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가문에 서신을 보내 이실직고는 못할망정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전 여태 녀석이 막내 공자님을 위해 힘을 쓰는 줄 알고 있었지요. 이곳에 와서야 녀석이 다섯째 공자님에게 의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부님……!”

추억몽이 나지막하게 불렀다. 여량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여량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여량은 흠칫 놀라더니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추 소저, 혹시… 지금 막내 공자님의 심기는 어떻습니까?”

“심기요?”

추억몽은 망설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숙부님께서 필요 이상으로 이 문제를 크게 보고 계세요.”

“네?”

여량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준은 애초에 여송을 눈여겨보고 있지도 않았어요. 얘가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도 동씨 가문의 공자가 때린 거고요. 양준의 성격으로 여송이 정말 그의 화를 돋웠다면 어제 살아남았을까요?”

“감히 날 죽인다는 말이에요?”

여송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양준이 널 죽이나, 안 죽이나 한 번 시도해 보든지.”

추억몽의 안색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여송은 가슴이 서늘해져 방자한 표정을 거두었다.

“숙부님.”

추억몽은 여량을 돌아보며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여송이 그날 양준에게 쫓겨난 건 저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요. 저 애가 양준 관저에 남아 있는 게 적절치 않아 보였거든요. 숙부님 아들이니까 여송이 어떤 애인지 잘 아실 거예요. 쟤가 양준 관저에 있으면 조만간 비명횡사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입김을 좀 불어넣어 양준에게 핑계를 대서 쫓아내게 한 거예요.”

여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 소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제가 여송을 직접 찾아가 얘기를 나누었죠. 빨리 전성을 떠나라고 조언했는데도 무시하고 기어이 이곳에 남은 거예요. 양항에게 의탁한 것도 그가 원한 것이었어요. 양준은 심지어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요. 알았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이것으로 여씨 가문을 책잡을 일은 더더욱 없어요. 양준이 쫓아냈다고 남에게 의탁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지금 이렇게 된 것도 여송이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어요.”

그녀는 여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굴 탓하려면 하필 여송을 계승 싸움에 참여시킨 숙부님 자신을 탓하세요.”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습니다.”

여량은 부끄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아들이 어떤 재목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승 싸움처럼 큰일에 아들을 참가시켜 단련하게 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성격이 고쳐져 나중에 여씨 가문의 가업을 잇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전에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여송은 결국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던 것이다.

“양준은 여씨 가문을 탓할 생각이 없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양준이 정말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어도 여씨 가문은 이번 일로 흠 잡히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여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추세를 보니 양준이 양씨 가문의 가주 후계자가 될 것 같았다. 만약 어느 날, 양준이 화가 치밀어 계승 싸움에 있었던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여씨 가문은 큰 봉변을 당하게 될 터, 그렇게 생각하자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추 소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량은 연신 감사 인사를 올리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뜸을 들이던 그는 또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추 소저, 혹 막내 공자는 아직도 사람을 구하는 중입니까?”

추억몽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숙부님께서는 뭘 하시려고요?”

여량은 손을 비비며 웃었다.

“저는 이 녀석이 공을 세워 잘못을 면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자님의 말 한마디면 이번에 저희 여씨 가문에서 최대한 인력과 재물을 지원하겠습니다.”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아요.”

추억몽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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