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9장. 절대 나약하게 물러서지 마
밤이 깊어지자 커다란 중도는 마치 잠에 빠진 용이 드넓은 대지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은 은하의 모래알처럼 세상을 수놓고 있었다.
답운구 세 마리는 번개 같은 속도로 남문을 통과해 양씨 가문의 전용 통로에 들어섰다.
문지기들이 물어볼 틈도 없었다. 그들이 떠나간 다음에야 문지기는 잠에서 깬 듯이 다급히 쫓아갔다.
“막내 공자께서 가문으로 돌아가시는 길이다. 비켜라.”
당우선이 뒤돌아 고함을 지르자 문지기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막내 공자라면… 양준!’
양준의 이름은 이미 중도에 널리 퍼져 모르는 이가 없는데 누가 감히 무례하게 굴겠는가? 문지기들은 터덜터덜 입구로 돌아와서는 기운을 차리고 임무에 집중했다.
*양응봉의 저택.
수련을 하고 있던 양응봉과 동소죽은 답운구가 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다급히 밖으로 나와 살펴보았다. 그러자 양준이 밖에서 영구와 당우선 두 사람을 거느리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이니?”
양응봉은 순간 당황했고, 동소죽은 눈물을 흘리며 와락 달려들어 양준을 덥석 안았다. 그리고 양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그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계승 싸움이 시작된 뒤로 두 모자는 만난 적이 없었다. 가문에서는 동소죽이 양준을 보러 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
양준은 민망함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당우선과 영구가 아직 뒤에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앞으로 그들 앞에서 어떻게 위엄을 세우라는 말인가?
말하면서 뒤를 쓱 돌아보니 당우선과 영구 모두 시선을 내리깔고 발끝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마음속의 그리움을 다 터놓은 동소죽이 양준의 손을 잡고 눈물을 머금은 채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아, 어쩐 일로 돌아온 것이냐?”
양응봉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장로전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양준은 대답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양응봉은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장로전이라…….”
양응봉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도 양씨 가문의 직계이긴 하지만, 양씨 가문에서의 지위가 그리 높은 것은 아니라 장로전의 일을 그에게 알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양응봉은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어미가 맛있는 거 해줄게.”
동소죽은 말하면서 당우선에게 손짓했다.
“우선이도 와서 도우렴.”
“네.”
방 안은 불빛으로 환했다.
세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았고, 영구와 당우선은 엄숙한 표정으로 양준의 뒤에 서 있었다. 동소죽이 아무리 열정적으로 권해도 그들은 함께 식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장로전에서 왜 널 중도로 부른 것이냐? 무슨 일이라고 말은 하지 않더냐?”
양응봉이 물었다. 갑자기 아들이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 장로전의 명령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어요.”
양준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로전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했으니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 것이 밤이라,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장로전에 가서 상황을 살펴야 했다.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없느냐? 장로전 눈에 띌 만한 짓을 했다던가?”
“아버지는 지금 그 사마를 말씀하시는 거죠?”
양준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때문에 절 불러들이신 건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의 존재는 이미 양립정 태상장로님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께서는 그가 계승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셨고요. 하지만 계승 싸움이 종료되면 즉시 전성을 떠나야 한다고 하셨지요.”
“태상장로님도 널 불렀더냐?”
양응봉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양립정은 양씨 가문의 조상 뻘 되는 인물이었다. 양응봉도 그를 본 적이 없는데 아들이 만났다니……. 양응봉이 보기에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양준이 그의 얘기를 꺼낼 때, 표정에 불만이 있는 것을 보니 태상장로와 양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준아, 어찌 되어도 우린 양씨 가문의 사람이다. 사마와 결탁하는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거라. 괜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고.”
양응봉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당연히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양씨 가문은 창운사지의 사마와 대치하는 전쟁을 치르면서 항상 통솔자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양준이 사마와 결탁한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게다가 실력이 강한 사마가 계승 싸움에까지 참여하지 않았는가. 만약 양준이 정말 사마의 도움으로 양씨 가문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사람들은 다른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도 있었다.
“사마의 일이 아니라면…….”
양응봉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그렇다면 영구가 봉원주를 풀어낸 일일 수도 있겠구나.”
말하면서 영구를 힐끗 본 그의 시선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여섯 명의 혈시들이 봉원주에 맞았고, 그중 다섯 명은 봉인되어 진원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독 영구만 무사했다. 봉원주는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인 황구주가 손쓴 것으로, 만약 가문에서 이 일을 자세하게 물으려고 양준을 중도로 불러들인 것이라면 말이 되었다.
“지금 추측해 봤자 별 의미 없잖아요? 내일이 되면 알겠죠.”
양준은 고개를 젓고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 밤은 푹 쉬거라. 하지만 장로전의 소환이라니… 분명 좋지 않은 일일 거야.”
양응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장로전에 몇 번 불려간 적이 있었지만, 매번 피투성이가 되게 처벌을 받거나 가법으로 다스려졌었다. 때문에 장로전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했다.
진지한 얘기를 그만두자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세 사람은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영구와 당우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들도 냉혹한 계승 싸움에서 잠깐 벗어나 짧은 시간의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밤이 그렇게 고요하게 지나갔다.
*이튿날, 양준은 부모님과 작별했다. 동소죽의 신신당부와 미련이 철철 흘러 넘치는 시선을 받으며 그는 당우선과 영구를 데리고 장로전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막내야.”
장로전에 거의 도착했을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양준이 고개를 돌려보니 양철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젯밤에 양준이 남문을 쳐들어와 가문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양씨 가문 전체에 퍼졌을 터이니 양철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셋째 형님!”
양준은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양철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난 그저 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단목 가문의 사람들을 데리고 복수를 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그분들이 절 도와준 것입니다. 고수를 다섯 명이나 보내 주셨으니 제가 형님께 고마워해야죠.”
계승 싸움 첫날 밤에 양준은 양철을 데리고 가문으로 돌아와 물자로 바꾸지 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양철이 그 답례로 단목 가문의 고수 다섯 명을 보내온 것은 양준도 꽤 놀랐었다. 그리고 그동안 전투를 하면서 단목 가문의 고수 다섯 명은 많은 힘을 보태 주었다. 그들 모두 신유 경지였고, 그중 한 명은 신유 경지 8단계라 발휘할 수 있는 역할도 적지 않았다.
양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장로전으로 가면 절대 나약하게 물러서지 마. 안 그러면… 손해를 보게 될 거야.”
깜짝 놀란 양준이 자세하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양철은 이미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양철은 개인 실력이 평범하고 계승 싸움에서도 아무 활약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양씨 가문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양응봉에 비했을 때, 양철 아버지의 지위는 훨씬 높았고 양씨 가문의 기밀에도 접촉할 수 있었다.
‘셋째 형님이 아버지에게서 뭔가 들은 건가?’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양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미 장로전에 온 이상, 마음을 편히 가져야 했다. 어차피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 곧 알 수 있을 터였다.
양준은 표정을 가다듬고 성큼성큼 장로전으로 들어갔다.
이는 양준의 세 번째 장로전 방문이었다. 첫 번째는 금우응의 일로, 두 번째는 혈시 일로 방문했었다. 여기 올 때마다 그는 양씨 가문의 백발이 성성하다 못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장로들이 참 할 일이 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영구와 당우선 두 사람을 데리고 장로전에 들어선 양준은 열몇 명이나 되는 장로들이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줄로 나누어 앉은 그들은 하나같이 위엄 가득한 얼굴로 덤덤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중간 상석에 앉은 사람은 바로 양준과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양진이었는데, 그는 더욱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진작부터 양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이 기세는… 심문이라도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계승 싸움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적은 없는 듯했다.
‘뭔 일로 이리 위용을 드러내는 거야?’
의구심이 들었지만 양준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공수하며 인사를 올렸다.
“양준이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영구와 당우선도 똑같이 예를 올렸다.
“너희 둘은 물러가라.”
양진은 영구와 당우선에게 손을 저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영구의 몸을 마구 훑어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열몇 명의 장로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과 눈빛에는 모두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본바탕이 상한 데다 또 봉원주까지 걸렸던 영구가 지금은 멀쩡하게 양준을 따라 가문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더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니 장로들이 주목할 만했다. 그들도 영구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영구와 당우선은 감히 양진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