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2장. 거절하겠다
양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맑은 눈을 반짝였다. 그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이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양응호는 표정이 바뀌더니 물었다.
“네가 이번 계승 싸움에 참가한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이것이냐?”
“예.”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양씨 가문의 가주만이 능소각의 이름을 바로 세울 수 있으니까요.”
“넌 정녕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세상을 휘두르는 권력을 가지고 싶지 않느냐?”
양응호가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양준은 입을 삐죽이더니 비웃음을 담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어 좋을 게 뭔가요? 번거로운 일들 때문에 그 위치에 오르면 수련할 시간조차 제대로 없겠는데요. 백부님이야말로 가장 좋은 예가 아닙니까? 신유 경지 이상이라지만 제가 보기엔 신유 경지 이상 중에서 실력이 좀 못하지 않습니까?”
“무엄하다!”
양진은 버럭 화를 내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감히 가주 앞에서 이토록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을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양응호는 손을 내저으며 양진의 질책을 제지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신유 경지 이상 중에서 난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야. 오히려 최하위에 있는 셈이지. 이는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된 자의 비애다. 이 점을 알아챘다니, 참 놀랍구나.”
그러고는 잠깐 쉬었다가 다시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왜 양씨 가문의 가주가 항상 신유 경지 이상이었는지 아느냐?”
“왜입니까?”
그의 말을 들은 양준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기록에 의하면 양씨 가문의 역대 가주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신유 경지 이상이었다. 신유 경지 이상은 이 세계의 정상이었고, 여기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굽어살피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매번 양씨 가문의 가주는 이런 천부적인 재능과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게다가 양응호는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쉰 살 정도인데 이 나이에 신유 경지 이상에 올랐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자질이 이렇게 엄청난 사람이 왜 또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들 중에서 최하위란 말인가?
“양씨 가문에는 가주를 신유 경지 이상으로 만들 저력이 있기 때문이란다.”
양응호는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놀라운 말을 했다.
이에 양준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방금 무심결에 양씨 가문의 기밀을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대략 짐작이 갔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허허!”
양응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면 힘들고 번거로운 일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면 좋은 점도 많단다. 우습겠지만 난 네 아비와 자질로 비교한다면 오히려 뒤떨어지는 편이었지. 하지만 네 아비는 몸이 좋지 않아 실력이 늘지 않았어. 허나 요즘은 왠지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그러면서 슬쩍 양준을 훑어보았다.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양준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고수하며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내 얘기부터 하자꾸나. 만약 내가 스스로 수련했다면 지금쯤 그래도 신유 경지 정상에는 올랐겠지. 내 자질은 내가 잘 알고 있단다. 신유 경지 정상이 내 한계였어. 오십 년을 더 준대도 난 신유 경지 이상은 못 올랐을 것이다. 많은 무인들이 그렇지. 신유 경지 정상에 오른 고수는 많고 많지만, 신유 경지 이상에 오른 사람은 매우 적지. 하지만 내가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된 뒤 즉, 5년 전에 이미 신유 경지 이상에올랐단다.”
양준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가주의 자리가 지금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것입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양응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안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내가 알려주기는 힘드니 여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백부님께서는 저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겁니까?”
양준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정말 가주의 자리에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단지 거기까지였다.
“그저 얘기를 해본 것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거라.”
양응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준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럼 제가 말씀드린 요구는요?”
양응호가 대답했다.
“내게 능소각의 이름을 바로 세울 힘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 요구에 응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이 조건을 빌미로 널 계승 싸움에서 탈락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거절하겠다.”
그 말을 듣고 양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문의 이름을 바로 세우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해야지. 아니면 혈시 몇 명이 줄어든다고 계승 싸움에서 질 것 같으냐?”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백부님, 자극 요법은 저한테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실력으로 증명해 보거라.”
양응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혈시는 반드시 불러들일 것이고, 네 손해도 가문에서 보상해 줄 것이다. 네 요구사항을 말하거라. 내가 오늘 장로전까지 걸음한 것은 바로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양응호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에서 결정한 일에 대해 자신이 아무리 소란을 피운다고 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생각에 잠겼던 양준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절 따르는 혈시, 그리고 앞으로 저를 따르고자 할 혈시까지 포함해서 전부 제 소유로 해주십시오.”
양응호는 몸을 흠칫 떨더니 놀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진을 포함한 장로들도 입을 떡 벌린 채 멍해졌다. 양준이 이렇게 욕심이 많을 줄 몰랐던 것이다.
“이 요구는… 너무 황당하군.”
양진은 코웃음을 쳤다.
혈시들은 항상 양씨 가문에만 충성을 바쳐 왔지,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다. 양준이 말한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일곱 명의 혈시들을 그의 소유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제 요구사항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승낙을 할지 말지는 백부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양준은 엄숙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양씨 가문의 가주로서 큰일을 많이 겪은 양응호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누구도 그에게 이런 요구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정말 무례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에 양준의 다른 요구사항을 거절했는데 지금 또 거절한다면……. 게다가 이는 처음부터 가문이 양준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 꺼낸 제안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혈시 중 대다수는 계승 싸움에 참여도 못 할 텐데, 그들의 충성을 얻어서 무얼 하려는 것이냐?”
“다 쓸 일이 있습니다.”
양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양응호는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해주마.”
양준은 놀란 표정으로 양응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통쾌하게 허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양진은 더욱 놀라서 다급히 제지했다.
“가주님, 아니 됩니…….”
“괜찮습니다.”
양응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준이도 양씨 가문의 사람이니, 혈시가 그의 사람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양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말이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됐습니다.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원래부터 이번 일은 가문의 잘못이니 말입니다.”
양응호는 이에 대해 더 얘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요구를 들어주겠다. 혈시는 가문에서 힘을 적지 않게 들인 이들이니, 잘 활용하도록 해라.”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그리고 계승 싸움에 어떤 혈시를 남길 것인지 정해야 한다. 한 번 정하면 다른 혈시들은 계승 싸움에 그 어떤 힘도 보탤 수 없다.”
“지금 당장 정해야 합니까?”
“그래.”
양준은 좀 난감했다.
계승 싸움에서 맨 처음부터 그를 따른 사람은 곡고의와 영구였지만, 도봉과 당우선은 가장 먼저 만나고 그를 중도로 데려온 이들이었다. 소순, 나해, 엄령행과의 친분은 깊지 않아 잠시 제쳐둔다 해도 네 명의 혈시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난감한 것도 잠시, 양준의 눈빛은 굳센 의지로 빛났다.
“그럼 영구와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결정이 빨라서 좋구나. 역시 우리 양씨 가문 사람이야.”
양응호는 칭찬을 하더니 말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넌 이만 전성으로 돌아가 보거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양준은 예를 올리고 느긋하게 장로전에서 물러갔다.
문밖에 있던 당우선과 영구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초조하게 양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장로전에서 오가는 소리를 들었는지라 양준을 대신해 마음을 졸였다.
양준이 나오자, 두 사람은 감격한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이 둘을 계승 싸움에서의 조력자로 삼은 것은 그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장로전에서 나온 뒤,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