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4장. 제 식해로 들어오십시오
“오구(吳駒), 부총(傅聪), 공자님을 뵙습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한 말 다 들었지?”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잘 부탁해.”
“그럼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양준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물러갔다.
“너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두 혈시가 떠난 다음에야 추억몽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상황을 봐야지.”
양준도 마땅히 떠오르는 대책이 없었다. 비록 그의 손에 있는 세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혈시들이 많이 줄어들었기에 더 이상 거리낌 없이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양소의 세력이 강해진 만큼, 그쪽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이토록 크다니. 세상사 참 알 수 없었다.
이내 편전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수련하러 갔다.
양준은 모든 혈시들을 불러모았다.
오늘 아침에 새로 온 두 명까지, 그의 관저에는 이미 아홉 명의 혈시가 있었다. 혈시들도 영구와 당우선에게서 장로전의 뜻을 전해 들었다.
양준은 눈앞의 혈시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아홉 명 중 계승 싸움에는 두 명밖에 참여시킬 수 없다. 영구는 지금까지 내 안전을 책임져 왔고 은신, 암살에 뛰어나서 선택했어. 그리고 당우선은 신혼기에 능통해서 선택했어. 이에 대해서 다른 혈시들은 불만을 가지지 않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혈시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너희 일곱 명은 계승 싸움에 참가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관저의 무인들에게 수련하는 법을 가르쳐 주거라.”
“물론입니다.”
도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신유 경지 7, 8단계로 혈시당의 고수들이었다. 때문에, 관저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양씨 가문 혈시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흔치 않은 기회로, 관저에 있는 다른 무인들도 매우 기뻐할 것이다.
혈시들에게 몇 마디 더하고, 양준은 그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당우선만 남겨 두었다.
“우선, 다들 식구니까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양준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 편히 말씀하십시오.”
당우선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로 설명하긴 그러니까 한 번 느껴 봐.”
말을 마친 양준은 강렬한 신식의 힘을 폭발시켜 당우선을 덮었다.
이에 당우선은 눈동자에 이채를 뿜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느껴져?”
양준이 물었다.
당우선은 한참 멍해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자님, 혹시 이것은 공자님의 신식입니까?”
“맞아.”
양준이 이미 신식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당우선과 도봉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당우선에게 신혼기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살짝 선보인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날 밤 양철 공자님의 관저에서 폭발한 신식의 힘은 공자님의 것이었군요.”
몇 달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계승 싸움 첫날 밤, 양철 관저에서의 접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양준이 갑작스럽게 나타남과 동시에 강한 신식의 힘이 양철의 관저에 드리워 위엄을 부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 신식의 힘이 정체 모를 고수가 펼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고수가 바로 양준이었다니.
“공자님은 이제 진원 경지 9단계이신데 어떻게…….”
어떻게 신유 경지 정상이 가질 만한 신식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공자님은 이미 신식을 오랫동안 수련한 거 같아.’
“나도 모르겠어.”
양준은 고개를 젓고 나서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네가 신혼기 방면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조예가 깊으니 조언을 얻고자 불렀어.”
몽무애와 지마는 모두 고수 중의 고수였다. 하지만 신혼기 방면의 조예는 당우선보다 못했다. 사람마다 자신의 장점이 따로 있는 법이었다.
양준은 신유 경지까지 한 고비를 남겨 두고 있었다. 때문에, 신유 경지에 오르기 전 결정적인 고비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두고 싶었다.
진원 경지는 무인들의 전환점이었다. 몸속의 원기가 진원으로 바뀌며 더욱 짙고 순수하게 바뀌었다. 신유 경지 또한 무인들에게 있어 거대한 분수령 같은 존재였다. 신유 경지에서 무인들은 식해를 만들고 신식을 수련했다.
“공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뭘 묻고 싶으신가요?”
당우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하게 물었다.
“너는 처음에 어떻게 식해를 열었어?”
“제 기억으로는 처음에 신식을 보충하는 천재지보를 복용했어요.”
당우선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드니 이렇게 하죠. 공자님, 제가 한번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시범? 무슨 시범?”
“공자님, 제 식해로 들어오십시오.”
당우선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곧장 식해의 방어를 풀었다.
“알았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신식의 힘을 한 줄기로 모아 당우선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맑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는 당우선이 가진 신식의 힘이 들어 있었다. 양준의 안색이 저도 모르게 살짝 변했다.
지금까지 양준은 모두 세 사람의 식해에 들어가 보았다.
선경라, 하응상, 당우선 순이었다.
다른 사람의 식해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심적 변화와 생각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미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상대의 모든 생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이가 특별히 가깝지 않은 이상, 무인들은 남에게 식해의 방어를 풀어주지 않았다.
세 사람의 식해가 양준에게 준 느낌은 각자 달랐다.
선경라의 식해에는 요염하고 유혹적인 느낌이 다분했다. 드넓은 신식의 바다는 마치 양준의 신혼을 빨아들이고 놔주지 않을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응상의 식해는 싱그럽고 자연으로 돌아간 느낌을 주었다. 하응상의 식해 안에서는 모든 고민과 잡념을 떨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운은 양준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당우선의 식해는 아주 성숙한 느낌을 풍겼다. 해수면에 이는 미풍까지도 양준을 꼭 감싸 주는 느낌이었다.
이 순간, 당우선의 신혼 형상이 양준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 바다에서 갑자기 파도가 일더니 맑은 하늘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당우선은 민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제 식해로 들어온 것은 처음인지라 적응이 되지 않아 그렇습니다.”
식해의 상황은 당우선의 심경 변화를 그대로 반영했다. 지금 그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비밀이 양준의 앞에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한 여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양준이 그녀의 식해에 깊숙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녀가 어려서부터 겪은 모든 일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양준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해수면은 다시 평온해졌다.
“공자님, 자세히 보십시오. 지금 그때의 상황을 재연해 드리겠습니다.”
당우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내 양준의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맑은 하늘, 미풍, 모든 것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주위는 텅 비고 혼돈 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당우선이 그에게 식해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양준은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텅 빈 혼돈 속에서 한두 갈래의 떠다니는 기운이 생겨났다. 이는 천지 개벽 뒤, 생겨난 첫 생명처럼 생기가 넘쳤다. 그것은 바로 당우선의 신혼사선(神魂絲線)이었다.
한두 갈래의 기운은 혼돈 속에서 노닐었다. 마치 파도에 몸을 맡긴 뗏목 같기도 했고, 폭풍우 속의 촛불 같기도 했으며 뜨거운 햇볕 아래서 휘날리는 눈꽃 같기도 했다.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기한 변화를 이끌었다. 어둠 속에서 한 갈래, 또 한 갈래의 신혼사선이 나타나며 어두운 공간을 밝게 비추었다.
처음에 신혼사선은 띄엄띄엄 나타났고, 규칙이라고는 없었다. 형성 과정에서 어떤 것은 부서져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많은 신혼사선들이 남겨졌다.
점차 텅 빈 혼돈의 세계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아름답게 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혼사선들은 한데 모여서 미묘한 기운으로 묶였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텅 빈 세계에 작은 냇물이 생기더니 멀리까지 뻗어갔다. 시냇물은 점점 더 넓어지고 커져서 강이 되었고, 강은 다시 바다가 되었다.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마치 천지 개벽이 이루어진 것처럼 혼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곧이어 어둠이 물러가고 눈앞이 밝아졌다.
미풍이 불어오자, 아래쪽의 바다가 하늘과 이어졌다. 당우선은 여전히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신혼 형상에서 피곤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금 전의 시범을 보이느라 그녀도 많은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공자님, 잘 보셨습니까?”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에 본 무에서 유로, 점점 커지는 웅장한 광경에 심취해 있었다. 식해를 연다는 건 혼자만의 세상을 개척하는 것과 같았다.
당우선의 이번 시범을 통해 양준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어떻게 식해를 열 것이고, 어떻게 신유 경지에 오를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간과 실력이었다. 신유 경지에 오를 실력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식해를 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자님께서 신혼기를 수련하시고 싶다면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음?”
양준은 놀랍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자님께서 신혼의 반려를 찾아… 음, 합체 수련하는 것이지요.”
당우선의 얼굴이 빨개졌다.
양준은 실소했다.
“그건 혼교(魂交)가 아니냐?”
“네.”
당우선은 갑자기 민망해졌다. 괜히 양준을 꼬드겨 나쁜 짓을 시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