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7장. 수령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양준의 공격성을 띤 눈빛에 소름이 돋은 소녀는 표정을 굳히며 몸을 웅크렸다.
“너야말로 뭘 하려는 거야?”
양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뭘 했다고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
소녀는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는지 아름다운 눈에는 물안개가 한층 끼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이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마귀 같은 남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으로 그녀의 생사까지도 통제하고 있었다.
“난 그냥 여기에 사람을 찾으러 온 것뿐이야!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괴롭혀?”
“사람을 찾는다고? 누구?”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알려줘.”
“너 대체 몇 살이야?”
양준은 문득 골치가 아팠다. 그녀의 실력으로 볼 때, 절대 보이는 것처럼 젊은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나 성격으로 보면 아직 어린 소녀인 듯했다.
‘소안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신유 경지 2, 3단계 정도일 텐데, 이렇게 강한 소녀가 있다고?’
“그것도 안 알려줄 거야. 여인의 나이는 가장 큰 비밀이라고.”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마.”
양준은 갑자기 밖에 대고 지마를 불렀다.
지마가 바로 대답했다.
“여기 있다네.”
“이 여인의 진원을 봉하고 저택 밖으로 쫓아내.”
“알겠네.”
지마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소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이토록 악독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지마가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오자 그녀는 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심지어 몸의 기운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도망칠 수 있겠어?”
양준은 냉소하며 손가락으로 인형을 튕겼다.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소녀가 다시 입구에 나타나더니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녀는 넘어지며 다친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 안,
양준은 느긋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영구와 지마도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신비한 소녀는 양준과 5장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몇 번 양준에게 호되게 당한 소녀는 고분고분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이 양준의 손에 있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양준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 언뜻 보기에 온순해 보였지만, 사실 앞머리에 가려진 두 눈은 수시로 양준의 움직임을 살피며 그가 허점을 드러내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수시로 입술을 실룩이며 중얼거렸는데 욕을 하는 듯했다.
“네 존재는 어딘가 꺼려져.”
양준이 솔직하게 말했다.
“너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만약 나를 위해 쓸 수 없다면 죽여 버릴 거야.”
“뭐?”
소녀는 고개를 들고 겁먹은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니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여태껏 이렇게 매정한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 만약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알지?”
“응.”
소녀는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적인 위압감 앞에서 그녀도 반항할 수 없었다.
“이름이 뭐야?”
“수령(水靈)…….”
여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수령?”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는 그녀의 능력과 매우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양준의 기억 속에 이런 인물은 없었다. 심지어 성씨마저 보기 드물었다.
“어디 출신이야?”
“수신전(水神殿)……!”
양준의 미간이 더더욱 구겨졌다.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세력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지만 수신전과 연관이 있는 문파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 세력 자체도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지마는 수신전이라는 세 글자에 안색이 미묘해졌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머릿속 뒤엉킨 기억이 자극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신전이라는 세 글자는 귀에 익었지만, 정작 떠올리려고 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머리 굴릴 것 없어. 넌 수신전에 대해 모를 테니.”
수령은 양준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양준을 아는 게 없는 촌놈이라고 조소하는 듯했다.
“네가 멋대로 없는 이름을 지어내서 날 놀리려는 거 아니야?”
도도한 수령의 시선에 양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분명 포로로 잡힌 몸인데도 수령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아니야. 네가 우물 안 개구리라서 그래.”
수령은 고개를 저었다.
“수신전이라… 그런 세력이 있긴 하다. 그건 따지지 말 거라.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
양준이 짜증을 내려는 순간, 귓가에 몽무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양준도 더 묻지 않고 수신전을 은거하는 세력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계집애가 수신전 출신이라니 조심히 다루거라. 안 그러면 너희 양씨 가문에 재앙을 가져다줄 수도 있으니.”
몽무애가 덧붙인 말에 양준은 조금 놀랐다.
양씨 가문은 중도 제일의 가문이자, 천하에서도 으뜸가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몽무애의 말을 들으니 수신전이 가진 힘은 양씨 가문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은거하는 세력이 그렇게 강할 수가 있나?’
표정이 변한 양준은 계속해서 물었다.
“나이는?”
수령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새하얀 이로 입술을 꼭 물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건 넘어가면 안 될까?”
양준은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무 살이야.”
수령은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인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었다. 특히 남자가 묻는 것은 더욱 그랬다.
양준은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보여준 성정과 말투를 볼 때 딱 그 나이로 보이긴 했으나, 스무 살에 신유 경지 8단계에 올랐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자질과 재능을 가졌다면 이미 양준이 알고 있는 모든 젊은이를 뛰어넘었다는 말이었다. 류경요 같은 사람도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양준은 마음 속으로 수신전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올렸다. 은거하는 세력에서 수령 같은 천재를 키워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양씨 가문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황당한 얘기가 아니었다.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양준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고수했다.
이에 수령은 오히려 실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양준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짓기 바랐던 것이다.
“너는 나이에 비해 수단은 좋은데, 자질은 그저 그러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양준을 평가했다. 포로로 잡힌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양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너희 수신전에는 내 또래에 실력이 강한 사람이 아주 많나 봐?”
수령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네가 만약 우리 수신전에 들어오면 젊은 세대 중에서 자질로는 백 명 안에도 못 들 거야”
“그럼 너는?”
양준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수령은 바로 의기양양해졌다. 그녀는 새하얀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더니 말했다.
“3위 안에 들지.”
“음, 알겠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나면 너희 수신전에 한 번 놀러가야겠다. 가서 수신전에 젊은 세대 고수랑 한 번 겨뤄 봐야겠어.”
수령은 비웃으며 말했다.
“네 주제에? 넌 그럴 자격이 없을걸? 너는 여기서나 좀 괜찮은 편이지, 우리 쪽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거기가 어딘데?”
“흥!”
수령은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더니 하찮은 것을 보는 눈빛으로 양준을 흘겨보며 말했다.
“네 수작을 모를 줄 알고? 그게 어디면 뭐?”
양준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전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신전에 반드시 갈 거야.”
수령은 도도함을 거두고 한심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왜 양준이 그런 말을 듣고 나서도 이렇게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다른 질문이 몇 개 더 있어.”
양준은 방금 전 나눈 화제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다 묻고 나면 보내주는 거야?”
수령은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답변이 마음에 들면 보내줄게.”
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빨리 물어봐.”
수령은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두 눈은 기대로 가득 찼다. 지금이라도 당장 날개를 펼쳐 이곳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