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6장. 한참 부족한데
“강 공자, 저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사파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저들 중에서 또 다른 사주가 나올지 어찌 압니까? 지금 저들을 모두 죽여 사전에 방지해야 합니다.”
남생이 입술을 핥으며 음산하게 양준 쪽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향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강참은 그들을 힐끗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사적인 원한을 공적으로 갚으려고?’
그러나 추자약은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으로는 저 요구를 들어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저희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공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겁니다.”
추자약이 보기에 양준을 사로잡는 것은 기정사실로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양준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능소각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도 계승 싸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준이 두고두고 복수하려 할 수도 있었다.
추자약도 양준에게 원한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강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 공자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남생과 향초는 마주 보면서 서로의 마음속 울분을 읽을 수 있었다. 눈앞에 양준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좋습니다. 양 공자! 단, 능소각 사람들이 끼어든다면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강참이 큰 소리로 양준에게 소리쳤다.
“당연하지요! 이게 다 여러분을 위한 결정이기도 하니 기분 좋게 받아들이시죠.”
양준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더니 웃으며 말했다.
양준이 이리 말하자, 성격이 좋은 강참도 참을 수 없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참 뻔뻔하십니다.”
양준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그와 척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참으로서는 양준의 체면을 봐주는 것인데, 뜻밖에도 상대방은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득을 챙기고도 잘난 척하는 양준의 언사에 강참은 그만 화가 났다. 그러나 더는 따지지 않고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
“향 공자, 남 공자, 출동하시죠.”
향초와 남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무지갯빛 두 갈래가 인파 속에서 번쩍 뛰쳐나왔다.
둘은 각각 향씨 가문과 남씨 가문에서 보낸 신유 경지 정상의 무인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들은 이미 양준 쪽 사람들 앞에 당도했다.
향초와 남생이 가문에 필사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면 두 가문에서는 이런 고수들을 계승 싸움에 참여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두 고수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다짜고짜 영구에게 달려들었다. 기세가 사나운 초식을 펼치는 것이 단번에 영구에게 큰 타격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가 나서자, 역시 대단했다. 짧은 순간, 능소각 사람들은 천지가 진동하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들 공포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처럼 강한 기세에 눌려 능소각 사람들은 반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생과 향초는 냉소하며 의기양양해서 바라보았다. 그들은 영구가 어쩔 수 없이 패혈광술을 펼칠 순간을 기대했다.
영구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가 공격이 닥쳐올 무렵,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공격 목표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두 고수는 순간 당황했다. 곧이어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두 고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등 뒤에서 살기가 엄습해 왔다.
그때,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그림자가 한기가 번쩍이는 비수 두 자루를 휘두르며 뒤에서 공격했다.
무영살!
공기 속에는 포악한 기운이 넘쳐흘렀고 잔물결 같은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향초와 남생의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둘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떨리는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참과 추자약도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말았다.
모든 이가 영구의 강한 실력에 전율했다.
양준이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물러나세요. 휘말릴 수도 있어요.”
“그래.”
능소각 사숙들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신유 경지 정상 세 명의 접전을 보면서 그들이 나서면 결국 무의미한 죽음을 자초할 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얼른 사람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양준과 소안만 나란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소안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그녀의 얼굴 반쪽을 가려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양준을 바라보았고,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미소를 지었다.
슈욱- 슈욱- 슈욱-
하늘에서 격전을 벌이던 세 사람이 다시 거리를 벌리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영구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어떤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반면 두 고수는 낯빛이 새파랬다. 의복이 몇 군데 찢어지긴 했지만 상처는 입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접전을 거쳐 모든 이들은 영구가 더는 원래의 실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양씨 가문의 혈시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게 되었다. 같은 경지에서는 무적이고, 경지를 뛰어넘어 싸우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것이 진정한 양씨 가문의 혈시였다.
“둘로는 부족해.”
영구는 양손에 비수를 잡고서 무덤덤하게 두 고수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짧은 한마디에 패기가 만만했다.
이 말에 두 고수의 얼굴빛은 더욱더 굳어졌다.
“강 공자, 영구가 이미 신유 경지 9단계인 듯합니다.”
추자약도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신유 경지 정상 고수 두 명이 영구라는 강력한 조력자를 잡아 두면, 나머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양준을 제압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구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신유 경지 9단계에 도달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둘로는 부족하다고 하니, 몇 명 더 나가세요!”
강참도 살짝 얼이 나가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차갑게 말했다.
추자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본인 세력의 몇몇 고수들에게 눈짓했다. 몇 사람이 곧 몸을 날려 향씨, 남씨 가문 두 고수의 등 뒤에 가서 섰다. 각각 신유 경지 7단계, 8단계 무인들이었다.
원래 있던 신유 경지 9단계 두 명까지 더해 모두 여섯 명이 영구와 대치했다. 그러나 영구는 여전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나선 네 명이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모자라. 나를 견제하려면 좀 더 많아야 할 텐데.”
영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참과 추자약은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아무리 양씨 가문의 혈시이고, 신유 경지 9단계라지만 어쨌든 사람이지 않는가! 두 사람은 영구가 너무나 방자하다고 생각했다.
“패혈광술!”
영구가 나지막하게 소리치자, 온몸의 기혈이 미친 듯이 솟구치면서 진원 파동도 강해졌다.
모든 이의 얼굴빛이 크게 달라졌다. 모두들 영구가 이처럼 결단력 있게 금기시되는 초식을 펼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패혈광술은 생명력을 대가로 강제로 기혈의 힘을 향상시키는 비법이었다. 이를 시전할 때마다 혈시는 수명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양씨 가문의 혈시들은 실력이 아무리 높아도 보편적으로 장수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 영구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좀 전에 담담했던 것과는 달리 횡포하기 그지없었고, 겉에 드러난 피부는 불에 덴 것처럼 시뻘겠다.
슈욱-
겉보기에 영구가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대치하던 몇몇 고수들은 하나같이 당황해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푸웁…….”
이때, 어디선가 피를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나섰던 신유 경지 7단계 무인 중 한 명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하늘에서 곤두박질쳤다. 그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처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는 펑, 소리와 함께 폭발하며 피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모두가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오싹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럼 시작한다.”
영구가 수중의 비수 두 개를 멋지게 휘둘렀다. 수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마치 나비처럼 우아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절망케 하는 죽음의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유 경지 9단계 고수 두 명이 소리쳤다.
“조심해!”
그들은 동시에 앞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자신의 가장 강한 비보와 수단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사방에서 횡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영구의 그림자가 횡포한 기운 사이를 누비는데, 마치 풍랑 속의 나룻배처럼 흔들리는 모습이었지만 결코 가라앉지 않았다.
“신유 경지 8단계는 다 달려들어!”
강참은 더는 영구를 얕잡아볼 수가 없어 곧 지원 명령을 내렸다. 실력이 이미 신유 경지 9단계가 된 데다 패혈광술까지 펼친 영구는 이미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도 상대할 수 있었다. 지금 영구의 앞에 있는 사람들로는 도저히 그를 견제할 수가 없었다.
슉- 슉- 슉-
잇달아 네댓 명의 그림자가 뛰쳐나갔다. 모두 신유 경지 8단계 무인들로, 일곱 세력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이었다. 이들의 합류로 영구의 화려하고 거침없던 움직임이 순간 정체되었다. 그러나 그의 괴이한 움직임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구는 예리한 칼과도 같았다. 비수 두 자루가 닿는 곳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은신술에 능숙한 그는 혼자서 여럿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완전히 우세를 점했다.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자는 보일락 말락 해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며 감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 부족해!”
강참의 눈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하늘에서 유일하게 남은 신유 경지 7단계 고수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