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1장. 이젠 빚 다 갚은 거야
잠시 뒤, 양위는 양준의 곁에 도착했다. 추억몽이 그를 보자마자 경계심을 높이며 차갑게 외쳤다.
“대공자께서 여긴 왜 온 겁니까?”
양위는 그녀의 의심과 두려움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자신의 혈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 경지 8단계의 혈시는 곧바로 아래쪽 혼란한 싸움터로 내려갔다.
추억몽은 표정이 풀리면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고맙습니다. 대공자!”
양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양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 양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형제는 말없이 서로 마주 보았다.
아래쪽에서는 향초가 양준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도발했다. 말로 양준의 마음이 흐트러지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는 양준에게 달려들 용기가 없기에 이런 비열한 수단으로 마음속 불안감과 분노를 배출할 뿐이었다. 가장 좋은 결과는 이로 인해 양준의 마음이 불안정해져 경지 돌파에 실패하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바라 마지않는 광경이었다.
양준 관저의 무인들은 그의 음담패설에 얼굴빛이 흐려졌다. 그러나 따로 나서서 향초를 공격할 인원이 없었다. 향초는 점점 더 열을 올리더니 거의 안하무인격으로 나왔다.
양준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힐끔 보았다. 그러고는 문득 담청색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을 꺼내 손가락으로 몇 번 튕겼다.
멀리 구경하던 인파 속에서 온몸을 흑의로 휘감은 아담한 몸집의 여인이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양손으로 이마를 가리고서 원망과 무기력함이 가득 찬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중에 떠 있던 양준이 또 손가락을 구부렸다.
여인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왔어, 왔다고! 그만 좀 괴롭혀!”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자, 양준도 동작을 멈추었다.
그가 더는 인형을 튕기지 않자, 그제야 수령은 숨을 헐떡이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이를 악물었다.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번에 날 도와주면 이걸 돌려줄게.”
양준은 고통을 참으며 말하는 한편, 수중의 인형을 흔들어 보였다.
“정말?!”
수령은 기뻐서 흥분과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그녀에게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을 휙 던져 주었다. 수령은 손을 뻗어 인형을 건네받고는 보물처럼 품 속에 꼭 껴안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번 인형 때문에 몇 차례 괴롭힘을 당한 뒤, 수령은 인형이 뼈에 사무치도록 미웠다. 그녀는 양준의 손에서 인형을 훔쳐 자유의 몸이 되는 날을 날마다 꿈꿔 왔다. 때문에, 그녀는 줄곧 전성을 떠나지 않고 몰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녀는 적절할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양준 관저에 섣불리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변고가 생겨 너무나 쉽게 인형을 돌려받게 되었다. 수령은 인형을 손에 넣는 순간, 자신을 속박하던 굴레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드디어 다시 자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진지하게 인형을 품 속에 갈무리한 다음, 또 손으로 두드려 보고 나서야 한시름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고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웃는 낯으로 물었다.
“내가 그대로 들고 튈까 봐 걱정 안 돼?”
“네 맘대로 해! 네가 날 돕지 않아도 나는 괜찮을 거니까. 하지만 날 배신한 사람은 늘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수령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큰소리치기는!”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운 좋은 줄 알아.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양준은 그녀를 몇 번 괴롭혔지만 매번 고통만 조금 느끼게 할 뿐 부상을 입히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리 오래도록 인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약 정말 무슨 짓을 하려 했다면 진작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수령은 양준이 그리 밉지 않았다. 양준이 그녀를 통제하려는 것도 결국 그녀가 껄끄러워서였다.
“뭐 어떻게 도와줄까? 얘기해.”
수령이 물었다.
“저 사람을 잡아와.”
양준은 멀리 향초를 힐끗 보았다.
“저런 인간쯤이야 쉽지.”
수령이 싱긋 웃고서 손을 흔들자 투명한 물줄기가 튕겨 나갔다. 물줄기는 영성이 깃든 밧줄처럼 혼란한 인파 속을 돌아서 정확하게 악다구니질을 하고 있는 향초를 휘감았다.
향초가 대경실색해서 진원을 돌리며 반항했다. 하지만 신유 경지 8단계 무인이 시전한 초식을 그가 무슨 재주로 막아 낼 수 있겠는가. 그는 아무리 힘을 써도 물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리 와!”
수령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뒤로 당겼다. 향초는 당황해서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수령의 곁으로 끌려갔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수령은 앙증맞은 코를 찡그리며 향초의 어깨를 확 낚아채더니 양준에게 내던졌다. 동작이 시원하고 유려한 것이 매우 손쉬운 일을 하는 것만 같았다.
양준의 냉담한 얼굴을 마주하자, 향초는 금세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하늘에서 허우적거리며 급히 외쳤다.
“제발 살려주세요.”
양준이 냉소했다.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냐? 늦었어!”
콰앙-
먹구름에서 검은색 기운이 떨어져 양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횡포한 기운이 기승을 부리자 양준에게 가까이 간 향초가 그 영향을 받았다. 밖에 드러난 그의 피부에서 빠르게 검은 기운이 스며 나오더니 두 눈이 튀어나왔다. 마치 몸속에 거대한 힘이 폭발한 듯했다.
그렇게 향초는 시체도 남기지 못한 채, 폭발하여 피 안개가 되었다.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던 싸움터는 한순간 정지되었다.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늘에서 피어오르는 핏빛을 바라보았다. 향씨 가문의 공자가 이처럼 비참하게 죽을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먼저 남생이 죽임을 당하고, 지금 향초도 흔적 없이 죽었다. 양준은 진짜 자신이 말한 대로 해냈다.
양소는 결국 두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그럼 이제 빚은 다 갚은 거다.”
수령이 득의양양해서 양준에게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경지 돌파가 코앞에 닥쳐왔다. 더는 밖의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그는 최선을 다해 천지 간의 기운을 받아 내고 식해를 열 기회를 기다리며 신유 경지를 돌파해야만 했다.
향초가 죽은 다음, 먹구름 속에 내재되어 있던 횡포한 기운은 마치 활성화된 듯이 쉴 틈 없이 양준에게 쏟아졌다. 모든 이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양씨 가문의 막내 공자가 이번 시련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지, 아니면 파멸될지 알 수 없었다.
양소는 넋이 나간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큰형님! 형님도 막내 편에 서시는 겁니까?”
양위는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막내 편에 서려는 게 아니다. 둘째 네가 너무 지나치구나. 좀 정신을 차리고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거라.”
“계승 싸움에서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고요.”
양소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양위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막내로부터 향초와 남생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간섭하지 않겠다. 그러나 막내의 앞길을 막는 것은 가문의 대공자로서 두고 볼 수 없다. 막내였다면… 네가 깨달음을 얻을 때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소는 순간 당황하며 시뻘겋던 눈동자가 잠깐 맑아지는 듯하더니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다시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뀌면서 더욱더 광적으로 변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만약 정신이 맑았을 때였다면 무엇인가를 인지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모든 이성이 사라지고 오직 양준을 이기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콰앙-
형제가 대화하는 동안, 문득 폭발음이 들려왔다. 양준의 몸속에서 사악한 기운이 다시 한번 밖으로 퍼져 나왔다. 기운은 방금 전보다 더 짙어 막아 내기가 더욱 힘들었다.
기운의 영향을 받아, 신유 경지 고수들을 포함한 모든 무인들은 마음속의 사악함을 억누르기 힘들어졌다.
지마는 크게 웃으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악한 기운을 누비고 다녔다. 그의 실력은 빠르게 한 등급 높아졌다.
*“양준 녀석,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멀리서 몽무애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양준의 몸속에 사악한 기운이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진양원기는 어디로 간 거지? 그게 있어야 저 사악한 기운을 누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괜찮은가요, 사부님?”
하응상은 다급해져 당장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그녀는 사악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이마의 담청색 보석이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며 주위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다. 녀석의 의식이 깊게 잠겨 있어, 몸속의 힘이 폭발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몽무애도 어리둥절했다.
양준의 이번 경지 돌파는 평소의 경지 돌파와 달랐다. 지금 양준의 의식은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고, 몸속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니 사악한 기운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군.”
싸움이 점점 더 횡포해지고 피비린내가 나자, 몽무애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서렸다. 양준이 이번 위험을 무사히 이겨 낼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성의 사람들이 사악한 기운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할지 걱정했다. 만약 전성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사악한 기운에 영향을 받는다면, 양준은 천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