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5장. 좀 기다리면 어떻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능태허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추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같은 신유 경지 이상의 능태허를 신분과 지위로 누를 수 없었다. 능태허는 그들과 대등하게 대화할 자격이 있었다.
“양준의 경지 돌파를 막고자 하는 분들이 계신데 양준이 강한 힘을 손에 넣고 사마의 길에 접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몇몇은 능태허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지마는 도리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힘의 노예가 되는 자야말로 진정한 사마지. 사마의 기운이 뭐가 어때서? 사람마다 힘을 추구하는 방식이 다른 것뿐이잖아. 각자 알아서 수련하면 되는데 뭘 저리 야박하게 구는지. 하여간 재수 없다니까. 보는 눈도 없는 놈들.”
“그렇게 소곤소곤 말씀하시면 안 들리니까 좀 크게 얘기하세요.”
수령이 어느 샌가 지마의 곁에 다가와서는 부추겼다.
지마는 그녀를 노려보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이게 누굴 속이려고?! 내가 네 정체를 모를 것 같으냐?”
수령이 아연실색해서 물었다.
“제 정체를 알고 계셨어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저 위에 있는 몽 씨도 알고 있지. 우리 다 같은 곳에서 왔잖아.”
지마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거드름을 피웠다.
수령은 두 눈을 반짝이며 지마의 팔을 와락 잡아챘다. 얼굴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서 들뜬 말투로 물었다.
“선배님, 제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아십니까?”
지마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허허 웃었다.
“왜? 돌아가지 못하겠어?”
“네. 여기에 묶인 지 한참 됐어요. 방법을 알고 계시면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지마가 의기양양해하며 낄낄 웃었다.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수령은 짜증이 났지만, 하는 수 없이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도움을 청했다.
“안 된다!”
지마가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수령은 당황하는 동시에 실망한 듯 빨간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요?”
지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주인의 동의가 있기 전까지 나는 어떤 일도 개입하지 않는다.”
“양준을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쟤가 저 속박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 같나요?”
수령은 살짝 놀랐다.
지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주인이 불가능하다면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수령은 진중한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뭐, 저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두고 봐라. 주인은 길면 10년, 짧으면 3년 안에 그 경지에 도달할 거다.”
지마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양준의 앞날을 기대해 마지않았다.
수령은 얼굴빛이 흐려지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오래 걸려요?”
“네가 돌아가고 싶다면 기다리거라. 허나 기다린다고 해서 주인이 널 도와줄지, 말지는 장담할 수 없다. 너랑 주인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으니 말이다. 주인은… 원한을 잊는 법이 없거든.”
지마가 수령을 곁눈질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득 양준의 포악하고 실리를 따지는 성격으로 보아 자신을 데리고 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공경한 태도로 도움을 청했다.
“선배님,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요?”
지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아.”
그러고는 잠깐 뜸을 들이고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주인이 좀 잔인한 구석은 있어도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 넌 전성에 오래 있었으니 알고 있겠지.”
수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빛이 약간 흐려졌다.
이번 일이 가장 좋은 사례였다. 수령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대략 짐작할 수는 있었다. 능소각의 제자를 위해 양준은 이처럼 크게 소란을 피웠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인형도 돌려주며 향초를 잡아오게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양준은 화끈한 성격으로, 적에게는 잔인하고 혹독하게, 친구에게는 대범하고 소탈하게 대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겠느냐?”
지마가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령은 곧 알아차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저도 친구가 되면 되겠군요!”
그녀가 양준과 친구 사이가 된다면, 양준은 반드시 자신을 데리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지마가 야릇하게 웃었다.
“주인은 오는 여자는 막지 않는다. 아름다운 여인이면 더더욱. 너 정도 신분이면 주인과도 어울리니 노력해 보거라.”
수령은 얼굴을 확 붉히며 지마를 노려보았다.
“뭔 말씀이세요? 저런 호색한에게는 제가 아깝죠!”
지마가 냉소했다.
“10년 뒤에는 네가 그런 말을 못 할 거다.”
수령은 깜짝 놀랐다.
‘지금 맹목적으로 양준을 너무 높이 보는 거 아니야?!’
그녀는 더는 지마와 말하지 않고, 양준과 교분을 쌓으리라 마음먹었다.
*둘이 대화하는 동안, 신유 경지 이상의 무인들도 의논하고 있었다.
능태허가 말했다.
“제 생각에 양준은 신유 경지에 올라도 심성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판단하십니까?”
양립정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제가 직접 녀석의 성장을 지켜봐 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능태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남들과 달리, 양준이 온몸이 사기로 뒤덮였을 때를 직접 보았고, 양준과 함께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양준을 걱정하지 않았다.
“흠, 그렇단 말이죠.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일이 잘못되면…….”
추도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려하시는 일이 발생하면, 여러분께서 나설 필요 없이 제가 직접 제 제자를 처리하겠습니다.”
능태허는 정색하고서 우렁차게 말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저희 문파에서는 이미 이런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두 번은 없어야 합니다.”
8대 가문의 태상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능태허가 사주를 말한다는 것을 알고 그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책임진다면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능태허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능 형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양립정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제 손으로 직접 양준의 무공을 폐할 것입니다.”
“예, 저도 녀석의 목숨을 뺏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양립정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더 길게 말하지 않고, 다른 일곱 명의 장로들과 함께 조용히 기다렸다. 설령 양준이 신유 경지에 오른 다음 심성이 크게 변한다 해도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있는 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니 조금 기다려도 별문제가 아니었다.
능태허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양준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양쪽에서 합의를 이루자, 태상장로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혈시들과 동경한 일행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그들은 그제야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젖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바람이 불어오자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신유 경지 이상 무인들과 맞서는 일은 그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과감하게 맞섰다.
능태허와 몽무애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흥분한 표정으로 얼른 예를 올렸다.
추도인은 추억몽의 봉인을 풀어주었고,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도 곽성진을 풀어주었다. 둘은 얼른 자신들의 세력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멀리 물러나게 했다.
양소 관저의 무인들도 멀리 피했다.
잠시 뒤, 양준의 옆에는 능태허와 몽무애 그리고 8대 가문의 태상장로들만 남게 되었다.
*방금 전, 합의하는 이들은 합의하고, 구경꾼들은 구경하느라 아무도 양준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제 모든 이의 시선이 다시 양준에게 모이게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받아 내는 천지간의 기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구름층에서 끊임없이 거대한 기운이 양준의 몸에 쏟아졌다. 이 정도 천지간의 기운은 어떤 신유 경지 정상의 무인이라도 받아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양준은 조용히 구름 아래 둥둥 떠 있었다. 그의 몸은 마치 밑 빠진 항아리처럼 천지간의 기운을 쏟아지는 대로 말끔히 흡수해 버렸다.
양준은 천지간의 기운을 손쉽게 이겨 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은 여전히 사악한 기운을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었다. 이처럼 흡수하고 방출하는 과정에서, 그의 몸속 기운은 묘하게도 평형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얼굴빛이 바뀌며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원 경지 무인이 신유 경지를 돌파하는데 이처럼 기세가 대단한 기현상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좋은 싹이야, 유망주군!”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는 눈을 반짝이며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문에 이런 인물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좀 전 양립정의 태도와 행태를 떠올리자, 그는 양준을 대신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양씨 가문 혈육 간의 매정함에 양준이 실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녀석이 우리 가문의 자제라면 내가 아끼면서 평생의 깨달음을 모두 전수해 주고, 가문에서 물자를 원하는 대로 제공해 줄 텐데, 양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뭔 대수라고. 저 녀석 기세를 봐서는 나중에 천하 제일이 될 듯하군. 그때가 되면 8대 세가의 가주고, 태상장로고, 신유 경지 이상이고 모두 저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양립정이야말로 정말 바보야!’
그는 마음속으로 연신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