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19화 (519/853)

제 519장. 새로운 국면

전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이목을 피해 경지를 돌파하지 않는 이상,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금 상황이 계승 싸움에 영향을 미칠지, 안 미칠지는 양준도 알 수 없었다. 혹여 가문에서 계승 싸움 참여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었다.

추억몽은 바로 이 점이 걱정되어 문단속을 하고 양준과 조용히 의논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걱정해도 양준은 가문의 결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전에 혈시 문제처럼, 가문에서 혈시들의 참여를 제한한다면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반항하고 도리를 따져도 결국에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어느 정도 이득을 챙겼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양준도 화가 났었다. 지금 추억몽과 의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저 미리 경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이제 간다.”

양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억몽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더니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한테 가는 거지?”

말투에는 질투가 잔뜩 배어 있었다.

양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전처럼 너무 몸 축내면 안 된다.”

추억몽은 화가 나서 요상한 말투로 말했다.

“나한테 너무 관심 가지는 거 아니야? 너 진짜 나 좋아해?”

양준은 사악하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고서 뜨거운 눈빛으로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왜?! 그럼 안 돼?”

그녀가 당당하게 인정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양준은 순간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전에도 여러 차례 그녀를 희롱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로 그녀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는 것뿐이었다. 지금 문득 고백 아닌 고백을 듣게 되자, 그는 왠지 불안감이 들었다.

그는 뭐라 대답할지 몰라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오히려 추억몽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널 좋아하면 뭐가 달라지긴 해?! 네가 추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오기라도 할 거야? 그러면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네 옆에서 현모양처로 지낼 수도 있겠지?”

양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 사이는 그냥 내가 널 좋아하는 정도로 끝날 수밖에. 난 나중에 중도의 여느 공자에게 시집가서, 두 가문이 인척관계를 맺고 서로 돕고 지지하면서 너희 양씨 가문을 무너뜨려야 해……. 그때가 되면 우리는 서로 적대관계가 될 수도 있어. 모르지, 곽성진 같은 사람한테 시집갈 수도 있겠네. 고양풍이나 강참, 류경요, 맹선의도 있고… 후보는 많아.”

그녀는 남 얘기하듯이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걔네는 너랑 안 어울려.”

추억몽은 깔깔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으나 닦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 어울리는 게 뭐 어때서? 너랑 나도 안 어울리잖아. 아니야? 넌 앞날이 창창하고 수단 좋고 매력이 넘치는 데다가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너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거의 없잖아. 전에는 내가 세상의 남자를 굽어보았는데, 지금은 너를 우러러볼 수밖에…….”

양준은 대화를 계속 이어가다가는 강인하고 지혜로운 이 여인이 정말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씩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

“감정은 빼고 놀아보는 것도 괜찮잖아?”

스스로를 경멸할 정도로 짐승만도 못한 소리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 나중에 내가 시집가면 그때 놀아줄게.”

추억몽이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양준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농담하는 거지?”

추억몽은 몸까지 흔들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글쎄?”

“이만 나가 볼게.”

양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도망치듯 떠나갔다.

*복도에서 뭔가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 아래, 호리병 몸매의 여인이 난간에 비스듬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개암을 맛깔스럽게 까먹고 있었다.

양준은 담청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순간 정신을 빼앗겼다. 이윽고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여인을 지켜보았다.

“먹을래?”

수령은 쉬지 않고 능숙하게 개암을 까먹으며 손을 내밀었다.

“됐어. 근데 네가 왜 여기 있어?”

“나 옆방 살잖아. 심심해서 별 보러 나왔어.”

수령은 손가락으로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저택에는 왜 눌러앉아 있냐고!”

양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뭘 치사하게 그런 걸 물어? 저택도 크면서 나 한 명도 못 받아 주냐?”

수령은 입을 삐죽거리며 궁시렁거렸다.

“수작 부리지 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지? 너 허튼 수작 부리면 죽는다?”

“아이고 무서워라, 무서워!”

수령은 얇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놀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방금 대화 다 들었어?”

양준은 그녀가 연기하는 것을 알면서도 더는 따지지 않고 잠깐 주저하다가 물었다.

수령은 계속해 개암을 먹으면서 히죽 웃더니 대답했다.

“앞부분은 못 들었는데, 뒷부분은 다 들었어.”

“그럼 가서 추억몽이랑 좀 같이 있어 줘.”

양준이 몰래 눈짓했다.

개암이 수령의 입에서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뭐라고?”

“싫으면 꺼지든가!”

“너… 두고 봐, 진짜!”

수령은 한참 동안 이를 갈다가 재빨리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손에 쥔 개암을 품 속에 넣고는 가슴을 쭉 펴고 양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추억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방 안에서 두 소녀가 한담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양준은 그제야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수령은 사흘 전에 많은 이들과 함께 그의 관저로 들어왔다. 양준은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수령은 정체가 신비롭고 경지도 그녀의 나이에 걸맞지 않았다. 그리고 특별히 눈에 띄는 담청색 머리카락도 있었다. 어찌 봐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수신전 출신이라고 말했지만, 양준은 수신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마에게 그녀를 경계하고 지켜보도록 한 것도, 그저 그녀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서였다.

수령은 그의 관저 사람들에게 악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다만, 추억몽이 그녀를 자신의 옆방에 배치하고 직접 감시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양준은 하응상의 방으로 찾아갔다. 소안도 그곳에 있었다.

양준이 밤늦게 찾아오자, 두 소녀는 모두 얼굴을 붉혔다. 소안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하응상은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소안이 없는 동안, 그녀는 늘 양준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특별히 선을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 보기가 부끄러웠다.

하응상은 고개를 떨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안이 양준을 흘겨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왔어?”

“저 여태껏 여기서 지냈어요.”

양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안은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는 양준과 하응상의 관계를 반대하지 않았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그녀는 양준을 속박하지 않았고, 그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합환공이 아니라면 차가운 성격의 그녀로서는 성적인 욕구도 없었다. 반면 양준은 양성 공법을 수련하는 데다가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로서 욕구가 훨씬 강할 터였다.

양준은 신분, 지위가 낮지 않아,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여자들을 품을 수 있었다. 특히 지금 관저에는 미인들이 가득하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양준은 지금까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이러한 양준에 대해, 그녀는 제한하고 싶지 않았다.

“쉬려고?”

소안이 웃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합체 수련을 해야죠. 지난번에 수련하지 못했잖아요.”

양준이 대답했다.

“어, 맞네.”

소안은 얼굴을 붉히며 그때 일을 떠올렸다.

“전 이만 잘게요.”

하응상이 한마디 하고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순식간에 잠이 든 듯했다.

양준과 소안은 마주 보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 예전 능소각 곤룡골의 동굴에서도 하응상은 늘 지금처럼 행동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더 설명하지 않았다. 둘은 마주 앉아 가부좌를 하고서 양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합환공은 이미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 육체적인 결합이 없어도 수련할 수 있었다. 둘의 몸속 진원이 순식간에 기묘하게 어우러지며 양준의 몸속에서 소안의 몸속으로, 다시 소안의 몸속에서 양준의 몸속으로 끊임없이 순환되었다.

*며칠 전의 한차례 전투로 전성 전체가 들끓었고, 그 충격이 아직도 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양소의 관저 앞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루가 지나, 맏이 양위는 계승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더는 어떤 움직임도 없을 것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전성 전체에서 의논이 분분했다.

양위는 계승 싸움에서 이길 가망이 없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에 대해 이해했고, 그를 비웃는 이도 없었다.

양준 관저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 설령 양위가 반항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양준이 원하면 한순간에 양위를 탈락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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