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21화 (521/853)

제 521장. 홀랑 먹히지 마

양준 관저 밖.

향천소는 가문의 무인들을 거느린 채 마지막으로 양준, 추억몽과 작별인사를 했다. 붉게 묽든 저녁노을 아래로 향천소는 가슴을 쭉 펴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향씨 가문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고 나서야 양준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 중에서 양준이 이름을 아는 이는 향천소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들 또한 향천소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으로부터 존중하며 감사하게 생각했다. 향씨 가문뿐만 아니라 관저에 있는 모든 세력의 무인들에 대해서도, 양준은 너무나 감사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그 혼자서 실력이 아무리 강해도 계승 싸움에서 어떤 성과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추억몽은 괜히 울적해졌다.

“향씨 가문은 향천소가 이끌면 훨씬 나아질 거야.”

양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적어도 향천소는 향초보다 믿음직했다. 만약 나중에 향천소가 향씨 가문을 계승하게 된다면 양준은 서로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동맹을 맺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추억몽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 향씨 가문에 좋은 일을 해준 게 됐네.”

“향씨 가문에서 그리 달갑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들어가자.”

양준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저택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양준의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손을 옆으로 확 뻗었다. 순간, 양준의 손이 길어진 것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기운이 밧줄처럼 튕겨 나갔다.

이내 애교 섞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추억몽은 당황해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십여 장 밖에 온몸을 흑의로 감싼 사람이 허공에 매달려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무형의 손에 목이 잡힌 듯,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양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라?”

추억몽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 비명소리가 귀에 익은 듯했지만 시선을 고정하고 보아도 얼굴을 볼 수 없어 궁금증이 일었다.

양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기운을 튕겨 그 사람의 얼굴을 가린 삿갓을 떨어뜨렸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추억몽은 오히려 여유 있는 표정으로 발버둥치는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이게 누구야?”

“안 풀어줄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추억몽의 말을 무시하고 양준을 노려보았다.

양준은 미간을 구겼다. 사실 그도 막 대할 생각은 없었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빠르게 접근해 오길래 순식간에 손을 뻗었던 것뿐이었다.

양준이 그대로 손을 놓아 버리자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볼품없이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녀는 겨우 일어서서는 양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눈에는 은은한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여태껏 이렇게 홀대받은 적이 없었다.

“엽씨 가문의 큰아가씨께서는 둘째 공자를 지척에서 수발들지 않고 왜 여기에 계신담?”

추억몽은 우아한 자태로 양준의 곁에 서서는 우롱하는 눈빛으로 엽신유를 바라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녀의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엽신유는 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에이, 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건 저택의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지, 제가 할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 엽 소저가 둘째 공자랑 동맹을 맺고 나서 둘 사이가 무척 가까워졌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혼담이 오갈 정도라며?”

추억몽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엽신유는 요염하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가리고 말했다.

“아니에요, 언니. 저는 아무한테나 시집 안 가요. 아직 알아볼 시간이 충분하거든요. 언니야말로 혼기가 꽉 찼는데 어서 혼처를 찾아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둘째 공자 옆자리가 탐나시면 제가 대신 말씀이라도 전해 드릴게요. 둘째 공자께서 요즘 무척이나 낙담하고 있거든요. 만약 이 소식을 들으면 다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죠.”

“하, 됐어. 혼인 상대는 이미 후보가 한 명 있어서.”

추억몽이 방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려 양준을 바라보았다.

엽신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추억몽이 대담하게도 양준의 앞에서 호감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감탄하며 말했다.

“어머나! 역시 언니는 대단하네요. 저는 부끄러워서 그런 말 쉽게 못 하는데.”

부드러운 표정의 추억몽과 옅은 미소를 띤 엽신유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두 여인은 다정하게 ‘언니, 동생’하며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불꽃이 팡팡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관저 입구에 서 있던 어느 세력인지 모를 두 문지기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시죠. 둘이 말장난하는 거 듣고 있을 여유 없으니까.”

양준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여태 시간이 없어 처리하지 못했기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원래 이렇게 냉담한 분이신가요? 그래도 온 김에 용건은 말씀드려야겠지요.”

엽신유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양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엽신유는 순간 당황했다.

“설마 여기서 말하라는 건 아니겠지요?”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요?”

“당연히 불편하죠.”

엽신유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원래 몰래 찾아오려 했었다. 만약 양준과 접촉하는 것을 누군가 보게 되면 그녀에게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는 어쨌든 양소 쪽 사람이었다.

추억몽도 그 점을 고려한 듯, 까치발을 하고서 양준의 귓가에 두어 마디 속삭였다.

그녀는 양준이 엽신유와 만난 일이 전해지면 남에게 이용될까 걱정했다. 그렇게 되면 엽신유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양준의 명성에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추억몽의 말을 듣고 나서 양준은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지요.”

엽신유는 향긋한 바람을 일으키며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양준의 곁을 지날 때에는 깔깔 웃으며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양준은 괴이쩍은 표정을 지었다. 문득 엽신유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눈에도 쟤가 청순하고 착한 여인으로 보여?”

추억몽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봤지.”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신유를 전에 몇 번 봤을 때에는 비록 적이지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니, 아마 그때는 자신의 눈이 삐었던 모양이다.

“조심해. 뼈도 안 남기고 잡아먹히기 싫으면.”

추억몽이 질투가 담긴 말투로 경고했다.

“내가 그럴 사람이야?”

양준이 그녀를 힐끗 보며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추억몽은 실소하며 문득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준이 만약 곽성진 같은 호색한이라면 엽신유에게 당할까 걱정해야겠지만, 양준은 가증스럽고 호색한 기질이 있는 듯해도 어디까지나 원칙이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자신이 양준을 유혹하면, 양준은 아마 거절하지 않고 자신을 홀랑 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엽신유는 아니었다.

관저의 편전 앞에 다다르자, 추억몽은 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너 혼자 들어가서 얘기해. 난 쟤랑 잘 안 맞아서. 얘기하다가 또 말싸움할 게 분명하니까 안 들어가는 게 낫겠어.”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보았다시피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 여인은 중도 8대 세가 출신의 낭자들로 자연스럽게 상호 경쟁의식이 있었다. 추억몽이 명성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세였기에, 엽신유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편전 안,

엽신유가 변장했던 옷들을 벗어 던지자, 그녀가 찾아오기 전에 한껏 꾸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도 예뻤지만 지금은 빛이 반짝이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첫인상도 원래 연약하고 얌전하며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양준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숨겨져 있는 교태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시지요.”

양준은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목석같은 분이시군요.”

엽신유가 애교가 넘치게 웃었다.

“틀리셨습니다. 저는 미녀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간 낭비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죠.”

양준이 사악하게 웃었다.

“지금 저를 미녀라고 칭찬하신 건가요?”

엽신유는 얼굴이 환해지더니 흰 이를 살짝 깨물며 물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겠지만 제가 봤을 때는 미녀이십니다. 하지만 미녀라고 해서 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양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얼른 본론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엽신유는 더는 실랑이질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준의 고집 센 성격을 조금 알고 있었다. 고집이 센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본전도 못 찾을 수 있었다.

양준은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주에 있었던 전투에서 둘째 공자는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었어요. 제가 아무리 그분을 지지하고 기운을 북돋아드려도 소용이 없더군요. 둘째 공자는 아마 곧 계승 싸움에서 탈락하고 말 거예요.”

“그래서요? 설마 둘째 형님을 배신하고 저에게 오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양준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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