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2장. 헤픈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습니다
엽신유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한동안 어리벙벙해 있다가 곧이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는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너무 비겁한 인간으로 보시는군요. 제가 어떻게 둘째 공자를 배신하겠어요? 그렇게 했다가는 분명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텐데요.”
“농담이었습니다.”
양준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엽신유가 양소를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승 싸움은 양씨 가문에서 차기 가주 후계자를 선택하기 위해 치르는 싸움으로, 크고 작은 세력들이 참여하는 것은 대부분 기회를 틈타 양씨 가문에 연줄을 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도의 다른 7대 세가는 그런 이유로 계승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저력이 있고 실력이 강했다. 양씨 가문보다는 못하더라도 얼마 차이 나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양씨 가문과 함께 중도에 자리하고 있기에 얽히고설킨 관계가 있어양씨 가문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7대 세가의 공자, 낭자들이 계승 싸움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계승 싸움의 승패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이기면 기쁘겠지만, 져도 크게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때문에 양소 관저의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엽신유는 그를 배신하고 양준에게 빌붙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엽씨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밖에서 꽤 오랫동안 기다린 모양인데?”
양준이 엽신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가 관저를 나서는 순간, 마침 그녀가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것이 된다.
“사실 저도 뭔가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승리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당신이 원하면 지금 곧바로 다른 두 적수를 탈락시킬 수도 있겠죠.”
엽신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준은 경계 어린 눈초리로 침묵했다. 엽신유가 혹시 정보를 알아보러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음 양씨 가문의 가주는 당신이 될 게 분명해요. 저는 강자한테 흥미가 있는데 마침 당신이 그런 사람이네요.”
엽신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빨리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양준이 입을 실쭉거리며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
엽신유의 눈에는 순간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깔깔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무슨 부탁인데요?”
“당신이 양씨 가문의 가주가 되고 나면 저희 엽씨 가문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이요.”
양준은 이상하다는 듯이 엽신유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엽씨 가문도 8대 세가 중의 하나인데, 제 보호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엽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오랜 세월을 중도 밖에서 지내셔서 모르실 거예요. 8대 세가는 모두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요. 가문 내의 고수들은 점점 노쇠해 가고, 젊은 세대들은 실력이 고르지 못하죠. 대다수가 부잣집 자제들로서 제멋대로인 데다가 어떤 성과도 못 내고 있어요. 지난번 창운사지와의 전투에서도 저희 측 손실이 막대한 것에 반해, 결국 창운사지를 뿌리 뽑지는 못했죠. 영광스러운 나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전 당신이 기적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당신은 계승 싸움을 통해 이를 증명하셨고요. 양씨 가문은 당신의 아래에서 예전보다 더 강력한 가문이 될 게 분명해요. 그러나 다른 7대 세가에는… 제 생각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그때가 되면 양씨 가문은 지금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말뿐인 지배자가 아니라 진정한 중도의 패자가 되어 천하를 지배하겠죠.”
양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득 자신이 엽신유를 너무 얕잡아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역시 8대 세가 출신다웠다. 인품이나 성격이 어떠하든 그녀는 안목이 있었다.
지금의 8대 세가는 양씨 가문이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7대 세가도 세력이 약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언제든 양씨 가문을 대체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만 적절한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곱 가문 모두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사실이었다.
엽신유가 말한 문제에 대해 양준도 가끔 생각해 보았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문제가 본인하고는 크게 연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엽신유의 분석을 들으니 매우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8대 세가가 호강하며 위세를 부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른바 부자는 3대를 넘기지 못하고, 차면 넘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미 쇠락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도의 공자와 낭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남보다 한 수 위라고 여기면서 선대들이 태평성세를 이루기 위해 헤쳐 나갔던 고난과 어려움을 잊고 있었다. 이를테면 추자약 같은 이가 나중에 추씨 가문의 가주가 된다면, 추씨 가문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고양풍, 강참, 맹선의, 류경요 같은 이들은 능력이 있다지만 그들의 손에서 각 가문이 쇠락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제가 살아 있을 때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사전에 준비해 두는 것도 좋죠. 안 그런가요?”
엽신유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제 눈에 당신은 평범하지 않아요. 양씨 가문은 당신 손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거예요. 제가 지금 당신께 줄을 대지 않으면, 앞으로는 아마 기회가 없을 테죠.”
엽신유는 거짓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표정, 말투에서도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엽 소저 말씀이 일리가 있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절 좋게 봐주신 것 또한 감사하고요. 그런데 제가 엽 소저의 말대로 엽씨 가문을 보호하게 된다면 저는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죠?”
잠깐의 생각 끝에 양준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엽신유는 이를 살짝 깨물며 교태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시나요?”
말하는 순간, 그녀는 눈동자가 몽롱해지고 얼굴에 요염한 빛을 띠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양준은 여유 있게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소저께서는 무엇을 줄 수 있죠?”
엽신유는 깔깔 웃고는 천천히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양준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양준과 반 자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더니 핑그르르 몸을 돌려 양준의 무릎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양준의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무엇이든지 말입니까?”
양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남자야. 양소도 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양준인들 뭐가 다르겠어?’
엽신유는 속으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양준의 품 속에서 빠져나왔다. 밀고 당기기에 있어 그녀는 이미 경지에 이르러, 남자를 유혹하려면 쉽게 몸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양준도 그녀를 막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희 엽씨 가문을 보호해 준다고 약속한다면 저는 제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의 신분만으로도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운우지정을 나누려 했다. 하물며 더하여 그녀는 미녀였다.
엽신유의 대담한 유혹 앞에서 양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엽신유는 고개를 들어 수줍게 그를 힐끗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얼굴에도 기대감이 은은하게 비쳤다. 그녀가 양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양준 같은 젊은 패자와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양준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호흡이 가빠졌다.
이윽고 양준은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지막한 비웃음이 그녀의 귓가에 꽂혔다.
“미안하지만 저는 헤픈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습니다.”
엽신유의 얼굴에 비쳤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음산하고 무섭게 변했다. 그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양준, 거기 서!”
양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엽신유는 화가 치밀어 뒤쫓아갔다. 그러나 미처 양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기운에 밀려 나가떨어졌다.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양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양준! 네가 감히 날 이렇게 대하다니! 너 죽어도 곱게 못 죽을 거야!”
엽신유는 분노에 찬 모습으로 미친 듯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