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3장. 검은 책 일곱 번째 장
편전 앞,
추억몽이 미묘한 표정으로 안에서 걸어 나오는 양준을 바라보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여자잖아.”
“뭐가 너무해. 곽성진을 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를 다한 거야. 나 여자를 아끼는 남자야. 이제 마무리는 네가 알아서 해.”
“히히……!”
추억몽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서렸다.
엽신유의 신분과 지위 때문에 추억몽이 그녀를 어찌 할 수는 없지만, 혼 좀 내는 것쯤은 괜찮았다. 둘 사이가 원래도 좋지 않았지만, 엽신유가 감히 양준을 유혹하자 추억몽은 화가 치밀었다.
양준이 떠난 다음에야 추억몽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곧 무인들이 달려와 공손하게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추 소저.”
추억몽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기를 잘 지키고 있으세요. 제 명령 없이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습니다.”
“예.”
엽신유는 편전 안에서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언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추억몽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휴,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귀가 잘 안 들리네.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으셨어요?”
편전 밖에서 지키고 있던 시위 몇 명은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가 절 부른 것 같았는데, 역시 착각이었나 봐요.”
추억몽은 깔깔 웃으며 훌쩍 가 버렸다.
시위들은 금세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추억몽에게 이런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내 편전 쪽으로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방 안,
양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엽신유 때문이 아니라 이제 곧 벌어질 일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 갓 신유 경지에 오른 양준은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감지했을 때는, 일이 너무 많았다. 때문에 여태껏 처리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짬을 가지게 되었다.
검은 책이 또다시 반응한 것이다.
의념을 발동하자, 진혼석으로 만들어진 검은 책이 손에 나타났다.
양준은 검은 책을 얻고 나서 무도의 길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매번 검은 책의 봉인을 해제하고 얻은 도움이 컸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양준 자신이 노력한 결과였다.
지금까지도 양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책의 첫 번째 장의 봉인을 해제하고서 금신을 얻게 되었고, 두 번째 장에서는 육체편을, 세 번째 장에서는 신비한 향로를 얻었다. 그리고 네 번째 장에서는 온몸의 진원의 기초를 다진 공법 진양결을 얻었다. 다섯 번째 장은 그를 약왕곡으로 이끌어 만약담 아래의 보물을 얻게 했다. 동시에 여섯 번째 장은 검은 책 공간을 열게 했다.
그런 다음 검은 책은 줄곧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신유 경지에 올라서야 양준은 일곱 번째 장을 탐지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탐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실력과 경지로 봉인을 해제하고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검은 책의 봉인을 해제할 때마다 큰 도움을 얻었던 양준은 또다시 그런 순간이 닥쳐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은 책을 펼친 뒤 그 속에 진원을 주입했다.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검은 책은 끝없이 진원을 흡수하다가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봉인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 진원을 도로 튕겨 낸 것이다.
양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진원을 주입하는 방식이 잘못됐나? 아니면 양이 충분하지 못한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방법이 잘못되었나?’
일곱 번째 장은 신유 경지에 오른 다음, 식해가 생기고 나서야 탐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식해와 신식이야말로 중요한 열쇠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양준은 검은 책에 더는 진원을 주입하지 않고 대신 신식을 주입했다. 검은 책은 신식이 주입되는 순간, 희미한 빛이 반짝이더니 동시에 신식을 깔끔하게 삼켜 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양준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일곱 번째 장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신식을 주입해야 했다.
곧이어 그는 검은 책에 신식을 미친 듯이 주입하기 시작했다.
검은 책은 신식이 주입되는 대로 모두 깔끔하게 삼켜 버렸다. 양준은 빙산이 뜨거운 햇빛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처럼 봉인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양준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신식을 보충하는 단약도 몇 알이나 복용했다. 그렇게 세 번에 걸쳐 모든 신식을 소진하고서야 봉인이 풀렸다.
일곱 번째 장에서는 얽히고설킨 빛이 번쩍이는 것이 복잡하고 현묘했다. 보아하니 진법인 것 같았다.
진법이 나타난 다음, 책장 한가운데서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소용돌이는 마치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 같은 위세로 천천히 회전했다. 그리고 소용돌이가 회전하자, 책장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양준은 식해 안의 신혼이 무형의 힘에 끌려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에 그는 대경실색하며, 서둘러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그 힘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제때 알아차렸으니 망정이지, 만약 신혼을 빼앗겼다면 백치가 될 뻔했어!’
그 순간, 몽무애와 능태허를 포함한 관저 안의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로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찰나였으나 두 고수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둘은 동시에 신식으로 양준이 있는 쪽을 탐지했다. 하지만 그쪽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인가 외부에서 신식으로 염탐하지 못하게 막은 듯했다. 두 사람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한편, 방 안에서 양준은 이상한 표정으로 검은 책 일곱 번째 장에 떠오른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달걀만 한 물건으로 양쪽이 뾰족하고 가운데가 둥글며 가장자리가 납작했다. 위에는 주름살 같기도 하고, 거북이 등에 얼기설기 파인 골 같기도 한 무늬가 가득했다. 얼핏 보면 무슨 열매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양준은 어찌 보아도 그것이 꼭 감은 눈처럼 보였다. 그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태껏 검은 책은 봉인이 해제되면서 그에 대한 정보도 함께 알려줘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봉인을 해제하는 어려움도 예상을 넘어섰다.
양준은 어렴풋이 이것이 아주 대단한 보물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의 쓰임새를 알 수 없었다. 오직 신혼과 연관이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의념을 발동하자 손에 있던 감긴 눈 같기도 하고, 열매 같기도 한 물건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 동시에 식해 안에 무언가 많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준은 의념으로 식해 안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물건은 식해에 들어가 오색 온신련으로 만들어진 섬 위에 조용히 떠 있었다. 양준이 그것을 흡수한 것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식해 안에는 그 물건과 온신련 외에도 단검이 있었다. 바로 남생을 죽인 신혼 비보였다.
양준은 무진 애를 써서야 단검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지의 물건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알아서 신식에 들어갔다.
양준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 속에 담긴 비밀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귓가에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은 의념을 발동해 재빨리 식해에서 빠져나왔다.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능태허와 몽무애가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놀란 눈빛으로 양준을 힐끔 보고는 강한 신식으로 그의 몸을 한 바퀴 훑었다.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다.
“주인, 괜찮나?”
이번에는 지마가 기웃거리며 다가오더니 한마디 물었다.
“괜찮아.”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모두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럼 됐네.”
지마는 양준의 대답에 한시름을 놓고 다시 고개를 움츠리고 나가려 했다.
“잠깐만.”
양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
“주인, 무슨 분부가 있으신가?”
“가서 냉산을 좀 불러 줘.”
“알았네.”
얼마 안 되어 냉산이 지마와 함께 방 안에 들어섰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우선 앉아.”
양준은 일어서지 않고 그녀에게 눈짓했다.
냉산은 양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순간 당황했다.
“내가 신유 경지를 돌파하는 날, 네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었지! 오늘이 바로 그 약속을 이행하는 날이야.”
의아한 얼굴의 냉산을 바라보며 양준은 미소 띤 얼굴로 온화하게 말했다.
냉산은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몇 년 전, 유명산에서 수련할 때, 그녀와 천랑국의 자맥은 동시에 양준에게 신혼 낙인이 찍혀 그의 지배를 받았었다. 처음에 두 사람은 양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함께 어려움을 이겨낸 뒤, 그녀는 점점 양준을 달리 보게 되었다. 그리고 흉살사동에서 양준이 실력을 한껏 드러내며 혼자의 힘으로 귀왕곡 제자 예닐곱 명을 구해 주자 그녀는 더욱 감격했다.
귀왕곡 제자들이 계승 싸움에 힘을 보태고자 찾아온 것도 그때 은혜를 갚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양준이 머리에 심은 신혼 낙인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양준이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할 리도 없고, 낙인을 빌미로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 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양준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냉산은 양준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앞으로 다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