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33화 (533/853)

제 533장.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관저 밖에 도착한 그들은 달빛을 빌려 앞을 바라보고 나서야 입을 떡 벌렸다.

관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추억몽이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이십 장 떨어진 곳에는 추씨 가문의 소속인 신유 경지 고수 20여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데 모여 있으니 위압감이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잠깐 놀랐던 낙소만이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언니!”

그녀는 언니를 부르며 인파 속에서 뛰쳐나와 추억몽에게 달려갔다. 관저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녀는 추억몽과 가장 가까웠다.

아침에 추억몽이 떠날 때, 낙소만은 오랫동안 눈물을 훔쳤다. 지금까지도 눈시울이 빨간 것이 아직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다시 돌아온 추억몽을 보자, 낙소만은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그녀는 기쁜 눈빛을 하고서 다급히 뛰어갔다.

추억몽은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5장밖에 되지 않았을 때, 추억몽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간 빛이 낙소만의 발 앞에 떨어졌다.

순간, 먼지가 흩날렸다.

낙소만은 발걸음을 멈추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가오지 마. 경고는 한 번뿐이야.”

추억몽은 차갑게 낙소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언니……!”

낙소만은 망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추억몽은 한 번도 그녀와 싸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뛰었다면, 또는 추억몽이 조금이라도 더 멀리 빛을 쏘았다면, 그녀는 두 다리를 잃었을 것이다.

추억몽의 냉담한 모습을 보고 낙소만은 크게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입 안이 씁쓸해지며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뒤돌아보니 양준이 그녀에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들어가 있어.”

양준이 덤덤한 얼굴로 얘기했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양준은 그녀를 잡고 뒤로 던졌다.

낙소만은 바닥에 내려선 뒤, 곧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양준과 추억몽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침에 떠날 때처럼, 지금도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나누었다.

누구라도 지금 상황이 아침에 이별할 때의 상황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협박받은 거야?”

양준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진지한 얼굴로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추억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양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왜 데리고 왔어? 다시 내 편에 합류하러 온 건 아니잖아?”

“내가 왜 왔는지는 너도 잘 알 텐데? 웬일로 이렇게 말이 많대?”

추억몽은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너도 나한테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잖아. 근데 나는 왜 말해 줘야 하지?”

추억몽이 도리어 비꼬았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가씨, 저놈과 말을 나누실 필요 없습니다.”

갑자기 추억몽 뒤에서 한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그 사이, 추억몽과 이십 장 정도 떨어져 있던 신유 경지의 고수들이 일제히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앞으로 다가와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당신은…….”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추씨 가문의 장로, 낙엽당(落葉堂) 당주 진헌(陳軒)이다!”

진헌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살짝 젖히고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옛정을 생각해 네놈과 몇 마디를 나누신 것뿐, 더 하실 말씀 없다.”

양준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낙엽당 당주님의 성함은 자주 들었습니다.”

추씨 가문의 낙엽당은 양씨 가문의 혈시당과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조직은 8대 세가의 가문마다 다 있었다. 이런 조직에서 양성한 고수들은 가문에 대해 더없이 충성했다. 다만 가문의 저력이 다름에 따라 위명이 다르고 양성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8대 세가의 여러 조직 중, 혈시당이 가장 유명했고 혈시당에서 나온 고수들은 다른 7대 세가보다 한층 강했다. 특히 혈시당의 비전 공법인 패혈광술이라는 금기 초식의 존재로 혈시당은 다른 조직보다 우위에 있었다.

추씨 가문의 낙엽당 또한 이러한 조직이었다. 낙엽당의 고수들은 모두 대단했는데 공격하기만 한다면 가을바람에 낙엽 쓸려가듯이 깨끗하게 처리해 적들에게 숨쉴 틈도 주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일처리 방식에 습관이 된 것인지 낙엽당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미가 급해서 시간 낭비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추억몽과 양준이 이제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들은 참기 어려워했다. 이로써 그들의 성격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진헌은 코웃음을 치고 양준의 말을 무시하며 냉소했다.

“말을 마쳤다면 아가씨, 뒤로 물러서시지요.”

그러고는 양준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네놈이 죽을 때가 되었다. 양씨 가문의 공자라고는 하나 사공을 수련하고 사마와 결탁해 8대 세가를 뒤집어 엎으려고 했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해라!”

진헌과 낙엽당의 고수들은 줄곧 중도에 있어 양준과 양준 관저의 세력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다만, 그들도 계승 싸움을 주목하고 있었던 만큼 양준과 양준 관저가 얼마나 대단한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헌은 줄곧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고 여겼다.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로서 어찌 신유 경지 2단계의 무인을 안중에 두겠는가? 게다가 상대는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다. 진헌뿐만 아니라 다른 7대 세가의 고수들도 대부분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7대 세가가 손잡고 고수들을 이렇게 많이 출동시킨 건 과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밤 추억몽이 그들을 거느리고 양준 관저에 가는 것이 결정되자, 진헌과 낙엽당의 고수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양준 관저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양준 관저에 있는 능태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능태허는 신유 경지 이상이었지만, 사파의 장문인이자 사주의 사부이니 그가 나선다면 봉신전의 여덟 명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헌이 막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양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거창한 이유군요!”

“진 당주님, 잠시만요.”

추억몽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어요.”

진헌은 코웃음을 쳤지만 추억몽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을 떠날 때, 추수성이 그에게 당부했었다. 이번 행동은 계승 싸움의 무대를 빌리는 것이고, 8대 세가의 공자와 낭자들의 명의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전장에서 작전을 세울 때에는 진헌더러 나서라고 했다. 그 말인 즉, 어느 정도는 추억몽도 진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뿐이니 그는 참을 수 있었다.

양준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다가 또 시선을 추억몽에게 돌리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 아버지께서 널 사로잡으면 여자인 내가 가문의 대업을 잇게 해준다고 하셨어. 내가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너도 잘 알잖아. 우린 그동안 잘 지내왔지만 내 일생일대의 소원에 비하면 양준, 넌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양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건 맞지만 너는 그 헛소리로 자신을 설득할 수 있어?”

“헛소리라니? 난 진심이야. 난 오늘 널 이기러 온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널 도와준 공을 봐서라도 얌전히 잡혀 주면 안 될까? 정말 싸움이 난다면 서로 감정이 상할 거고, 나도 네 상대가 못 될 테니까.”

“그래.”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헌은 눈을 반짝였다가 곧 다시 경계했다. 그는 실눈을 뜨고 양준을 노려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양준 관저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루 만에 추억몽이 양준에게 등을 돌릴 줄이야. 게다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 양준을 공격하려고 하다니. 그녀의 덤덤한 표정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말투에 많은 이들이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옛정을 생각해 차마 욕설을 퍼붓지는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나왔더라면 그들은 거친 욕을 마구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낙소만은 눈물을 글썽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추억몽은 당황했다.

“뭐 어때. 날 잡기만 하면 추씨 가문 가주의 자리가 네 것이라는 말이지?”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날 위해 해준 게 얼마인데, 내가 이 정도도 못해 줄까 봐?”

추억몽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그 말에 감동받아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가씨……!”

진헌은 추억몽이 양준을 사로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만약 정말 공격하지 않고 양준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추씨 가문은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 추수성은 양준을 잡게 되면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반드시 그를 중도의 추씨 가문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추억몽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감동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갑자기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

“그런 말을 한다고 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이 비겁한 놈아!”

양준은 씨익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속마음이 들켜서 머쓱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구나.”

양준의 말에 감동받았던 자신에게 화가 난 그녀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라고 하든, 여기까지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야.”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에 은빛이 번뜩이는 비수가 나타났다. 등급이 낮지 않은 비보임이 틀림없었다.

곧이어 그녀의 진원이 거세게 폭발했다. 손속에 전혀 자비를 두지 않으려는 듯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변고가 이렇게 갑작스레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영구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진헌과 추우당의 고수들은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다급히 숨을 죽이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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