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5장. 이건 이미 계승 싸움이 아니야
진헌이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하다가는 낙엽당 전체가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터였다.
양준 관저 무인들의 경지와 수단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신유 경지의 무인들은 진원이 순수하고 실력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몸에 지닌 비보들도 화려했다.
‘이게 어디 일등 세가 출신의 신유 경지란 말인가? 우리들보다 더 부유하잖아!’
진헌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낙엽당은 추씨 가문에서 중요한 조직이었기에 그들이 지니고 있는 비보들도 괜찮은 편이었다. 심지어 추씨 가문 내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준 관저의 신유 경지 고수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투 중에서 복용한 단약도 매우 이상했다. 진헌을 포함한 낙엽당의 고수들은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고, 진원이 금방 소진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아낌없이 진원을 사용하고 있었다. 진원이 소진될까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무슨 단약이 회복 효과가 이렇게 대단하지?’
양준 관저에 약왕곡과 보기종 두 대단한 조력자가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진헌은 그제야 두 세력이 가져다준 힘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했다.
그의 부름을 들은 엽신유는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추씨 가문의 낙엽당은 인원 손실이 적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어 알고 있는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쓸모없는 것들.”
그러고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도 가죠.”
아주 내키지 않은 일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고양풍과 강참은 그녀의 이런 모습과 추씨 가문 낙엽당의 처참한 상황을 번갈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1리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엽신유는 도착하기도 전에 전성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양준, 사악한 것들과 어울리다 보면, 조만간 사마의 길에 빠져들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네 사파 동문들을 넘기고 죄를 인정해라! 8대 세가가 중도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낸 정을 봐서 우리도 널 어찌하지 않겠다. 하지만 계속 완강하게 대항한다면 네 주변 사람들만 힘들게 할 뿐이다. 그들은 죄가 없지 않느냐?”
격전을 벌이던 양준은 몸을 날려 전쟁터를 벗어난 뒤, 조용히 공중에 뜬 채로 그들을 덤덤하게 내려다보았다.
6대 세가의 공자와 낭자들이 모두 선두에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실력이나 인원이 모두 낙엽당 수준과 엇비슷한 고수들의 대열이 따르고 있었다.
양준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엽신유만 의기양양해할 뿐, 다른 이들은 민망한 얼굴을 했다. 곽성진은 비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엽 낭자, 말솜씨가 제법인데.”
엽신유의 말은 순식간에 명분을 만들어 양준을 위기로 내몰았다. 그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런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보아하니 엽신유도 양준이 수세에 놓이도록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내뱉은 말인 듯했다.
“엽 소저.”
양준은 잠깐 침묵했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며칠 사이에 자신감이 많이 늘어서 오셨습니다. 둘째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엽신유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지난번에 양준을 유혹하다 실패하고는 헤프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원망의 마음이 생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둘째 공자께서는 지금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습니다. 관저의 모든 일은 제가 담당하고 있지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역시 그랬군요. 저희 형님이라면 이런 비열한 수를 두지 않았겠죠. 다른 사람이 지휘권을 잡고 있으니 이 사단이 났네요.”
엽신유는 표정이 변하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양준은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어렸다.
“엽 소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은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잘 생각해 보니 제 잘못이더군요. 직접 제 방 앞까지 오셨는데 성의를 봐서라도 거절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얼굴도 아름답고, 몸매도 뛰어나신 분인데 그런 소저와 운우지락을 즐겼다면 제가 오히려 이득이었겠죠. 왜 그때는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정말 후회됩니다.”
그의 말을 들은 강참과 고양풍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엽신유를 바라보았다.
엽신유가 양준을 유혹하러 갔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보니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된통 당한 게 분명했다.
‘이거 참… 세상 우스운 일이군.’
‘막내 공자, 대단해!’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했다. 만약 엽신유가 자신들을 유혹하러 왔다면 아마 넘어갔을 거 같았다.
“지금은 생각을 바꿨습니다.”
양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엽 소저, 지금이라도 어디 한적한 곳에 가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래도 사내 구실은 제법 잘합니다.”
엽신유는 화가 나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그녀는 양준이 사적인 일을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뻔뻔스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박하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버럭 화를 냈다.
“양준, 더러운 말로 날 모욕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그랬다는 거예요?”
고양풍과 강참은 고개를 돌리고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곽성진은 휘파람을 불기까지 했다.
“지금 저를 못 믿는 건가요?”
엽신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양준과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엽신유는 화가 크게 난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시겠죠. 양준 공자가 당신을 문전박대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곽성진이 야릇한 말투로 비꼬며 말했다.
엽신유는 크게 심호흡을 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양준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냉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 난 당신과 입씨름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을 사로잡아 중도로 압송하고 당신 몸에 있는 사악한 기운과 죄를 씻어낼 거예요. 이는 곧 7대 세가의 뜻이기도 하죠!”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으로 가리켰다.
“가서 양준을 사로잡고, 저항하는 자는 죽이세요!”
그녀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양준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뒤에 있던 여섯 대열의 고수들은 명령을 듣고 세찬 기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얌전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양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봉!”
그림자 일곱 개가 저택 안에서 날아왔다. 도봉을 중심으로 한 남은 혈시 일곱 명이었다. 방금 전에 출동한 영구와 당우선까지 하면 저택의 혈시 아홉 명이 모두 출동한 셈이었다.
“패혈광술!”
곧이어 세차게 치솟는 기혈이 느껴졌다. 모든 이들의 눈동자도 떨리기 시작했다. 전성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엽신유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이 어렸다. 그녀는 크게 외쳤다.
“양준, 아직 계승 싸움 중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저들이 참전하는 건 당신 가문의 규칙을 위반하는 거예요.”
“이미 이 전투는 계승 싸움이 아니야.”
양준은 냉소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낙엽당의 고수와 접전을 치르던 지마가 낄낄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양준 공자가 계승 싸움 따위를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겨우 양씨 가문 가주 자리가 무엇이라고. 지켜야 할 사람이 없었다면 너희들이 이렇게 능멸하는데 그는 진작에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뭔 소리야?”
지마와 싸우고 있던 낙엽당의 고수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마는 씨익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네놈이 죽을 거라는 뜻이지.”
이 말은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죽음의 기운을 가지고 그 고수의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곧 그는 행동을 멈추고 눈이 퀭해졌다. 이내 그의 안색이 빠른 속도로 창백해지더니 입으로 되뇌었다.
“나 죽어. 나… 죽어…….”
“멍청한 놈!”
지마는 코웃음을 치며 상대가 정신이 팔린 사이에 그의 가슴팍에 손을 찔러 넣었다. 다시 손을 뺏을 때에는 세차게 뛰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지마의 표정은 점점 더 무시무시해졌다. 그는 적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보더니 외쳤다.
“혈해봉천!”
핏빛이 그의 등 뒤에서 쏘아지더니 대지가 순식간에 피에 젖은 것처럼 끈적거렸다. 동시에 음산한 기운이 퍼져 나가더니 피로 엉긴 늪에서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엽신유는 겁에 질렸다. 고양풍, 강참, 맹선의도 표정이 변했고, 심지어 류경요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들은 지마의 잔인한 수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전까지 그들은 세상에 이렇게 사악한 무공이나 공법이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짙은 피비린내를 맡은 엽신유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지마의 초강수로 단번에 신유 경지의 고수 열몇 명을 혈해봉천에 봉인하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전쟁의 상황을 살펴보던 고양풍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신유 경지 6단계 이상의 고수들이 백 명 넘게 모인 7대 세가 연합군이 아직도 양준 관저의 무인들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으로 봤을 때, 양준 관저의 신유 경지 무인들이 수적으로 절대적인 수세에 처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던 고양풍은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양준 휘하의 혈시들이… 언제 모두 신유 경지 9단계에 오른 거야?”
이 말에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이었다.
신유 경지 9단계의 혈시가 아홉 명이라니…….
며칠 전, 양준이 신유 경지에 오를 때만 해도 네 명은 신유 경지 8단계였는데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 모두 경지를 돌파한 것이었다.
신유 경지 9단계의 혈시가 패혈광술을 사용한다면 신유 경지 이상의 무인과도 몇 합을 겨룰 수 있었다. 7대 세가 출신의 고수들도 대단하지만 일 대 일로 싸운다면 혈시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협공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직 나서지 않은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도 있습니다.”
류경요가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