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45화 (545/853)

제 545장. 바다 건너에서 찾아오다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아도 비웃거나 경멸하는 이는 없고 다들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류비생은 순간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담담한 태도는 비웃음이나 경멸보다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그동안 크게 도움이 되어 드리지도 못했는데 염치없게 이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말하는 류비생의 얼굴은 갈등과 망설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보 다섯 개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류비생은 천원성의 소성주로서 지위와 신분이 낮지 않기에 그만한 비보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단 열 병은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현단 열 병이 있으면 그는 적어도 2, 3년간의 수련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2, 3년간 동안 그는 동년배보다 작은 경지 몇 개는 앞설 수 있었다.

“그냥 가져가시죠.”

누군가 옆에서 권했다.

“그럼 부끄럽지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류비생은 이를 악물고 현단 열 병과 비보 다섯 개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양준에게 공수 인사한 뒤, 뒤돌아 떠나갔다.

양준은 뒷짐 짓고 평온한 표정으로 계속해 기다렸다.

“양준 공자,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단목 가문의 신유 경지 고수가 앞으로 나와 떳떳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목 가문은 원래 셋째 양철의 조력자로 계승 싸움 첫날에 양철이 탈락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이 양준의 휘하로 들어와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밤 싸움에 다섯 명은 모두 싸움에 참여했고, 살아서 돌아온 이는 두 명뿐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양준의 곁에 있으면서 죽은 단목 가문 사람들의 복수를 하려고 했었다. 원하던 복수는 진작 했고, 이제 둘만 남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므로 이곳에 어떤 미련도 없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능소각의 제자들이 또다시 현단 열 병과 비보 다섯 개를 들고 나왔다. 단목 가문의 두 사람은 물건을 가지고서 재빨리 떠나갔다.

“우리 자미곡도 이만 가볼게.”

범홍이 다가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능소각 제자들을 불렀다.

범홍은 대범하게 현단과 비보를 가지고서 양준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낙소만에게 물었다.

“사매, 안 갈 거야?”

범홍과 낙소만은 같은 자미곡 출신으로 사형제 지간이었다.

낙소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언니랑 같이 다니려고요. 사형, 먼저 가보세요.”

범홍은 잠시 생각하다가 강요하지 않고 말없이 떠났다.

“더 갈 사람 없습니까? 주저하지 말고 편하게 가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8대 세가와 척을 지게 될 겁니다. 자신이 아니라 가문이나 문파를 위해 생각해 보십시오.”

양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됐어. 갈 사람은 다 간 거 같으니까.”

호교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떠난 이들은 모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양준 관저에 찾아온 이들이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계승 싸움이 시작되거나 진행 중에 진심으로 양준에게 은혜를 갚고, 도움을 주려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그래 맞아. 너도 며칠 뒤에 여길 뜬다며? 우리도 며칠 더 기다리면 그만이야. 갈 때 같이 가자. 며칠 더 있겠다는데, 뭐 8대 세가가 그 정도 아량이야 있겠지?”

진학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마디 했다.

양준은 남은 이들을 둘러보며 잠깐 놀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며칠만 더 기다려 주세요.”

“자, 이제 해산.”

동경한이 한마디 외쳤다. 며칠 지난 다음 다 같이 떠나기로 결정하자,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부담감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다만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다가 이제 곧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은 여전히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살다 보면 생사를 함께할 친구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 관저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생사를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편전에는 양준과 추억몽만 남게 되었다.

양준이 빙그레 웃으며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할 말 있어?”

추억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없어. 그냥 좀 불공평한 것 같아서.”

양준은 일어서서 몇 걸음 걷다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원래 사는 게 그렇지. 딱히 불공평하다는 것도 못 느끼겠지만. 적어도 난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거든. 그런데 너 그렇게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 나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

추억몽이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넌 빨리 곽성진이나 끌고 여기서 나가.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어.”

추억몽과 곽성진은 변변찮은 연기로 양준 관저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7대 세가에서 어찌 그들이 무슨 꼼수를 썼는지 모를 수가 있겠는가?

“상처가 아직 덜 나아서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추억몽이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녀 역시 양준 관저에서 마지막 며칠을 함께하고 싶었다.

양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려다가 얼굴빛이 확 변했다. 어째서인지 몸속의 수라검과 천예혈해당이 반응하고 있었다. 수상쩍은 힘에 끌려 몸속에서 곧바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양준은 깜짝 놀라 서둘러 진원을 돌려 몸속의 움직임을 억눌렀다.

그가 미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관저 밖에서 위엄 서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태일문의 이원순(李元純)이 왔노라! 이곳이 양씨 가문의 막내 공자 양준의 관저 맞소이까?”

목소리가 전해지자, 양준과 추억몽의 얼굴빛이 이상해졌다. 이와 동시에 양준의 귓가에 몽무애와 능태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온 자는 신유 경지 이상이다.’

“태일문이라고? 바다 너머에 있는 대형 세력?! 여긴 웬일이지?”

추억몽이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양준도 순간 놀랐지만, 금세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참 귀찮게 됐네.”

그는 갑자기 몸속의 수라검과 천예혈해당이 왜 반응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 태일문 하나만 온 것이 아닌 듯했다.

관저 밖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백발의 얼굴빛이 불그스름한 노인을 필두로, 적어도 50명은 더 되어 보였다. 또한 모두 신유 경지로,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도 많았다.

이순원이 큰 소리로 외친 다음, 그의 곁에서 누군가 흥분해서 말했다.

“우리 수라문의 보물인 수라검이 느껴져요! 역시 여기 있었군!”

그리고 요염한 차림의 살기가 짙고 열 손가락에 모두 검은색을 칠한 미부인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우리 낙화교의 천예혈해당의 기운도 이곳에서 느껴집니다.”

먼저 말했던 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 수라검은 이미 저 아이가 몸속으로 흡수한 것 같으니, 되찾아 오기도 쉽지 않겠군요.”

이원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운도가 운하종에서 화생파월공을 찾은 지도 벌써 3년이 지났구먼. 각 문파가 잃어버린 보물의 행방을 드디어 찾았으니 성급하게 나서지 말고 최대한 대화로 풀어 나가는 것이 좋겠네. 여긴 남의 땅이니 일을 키우지 말아야 하네.”

“이 대협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동안, 이순원은 의혹이 서린 표정이었다.

‘수라문과 낙화교의 사람은 본인 문파 보물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난 왜 태일인(太一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한 사람이 가져갔으면 한곳에 모여 있어야 정상이거늘…….’

사람들은 말하는 한편,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소녀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찰랑거리는 긴 머리, 초승달처럼 휜 눈썹, 앙증맞은 코에 앵두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가늘고 기다란 눈은 맑고 아름다우며 양 볼은 살짝 상기되었고 꽃 같은 얼굴은 요염하기까지 했다. 맑고 투명한 피부는 눈처럼 희고, 호리병 몸매가 유달리 매혹적이었다. 특별히 신경 쓰이는 것은 그녀의 경지로, 어린 나이에 이미 신유 경지였다.

그녀의 경지에 적지 않은 이들이 놀랐다. 이순원은 내륙에 고수들이 많다고 감탄했다. 오다 가다 만난 소녀마저도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소녀는 그들과 함께 이곳에 왔지만 같은 무리는 아니었다. 소녀는 톡톡 튀는 모습을 하고서 조용히 기다리는 한편, 그들을 경계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어린 호랑이 같아 어쩐지 웃음을 자아냈다.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동안, 양준은 관저 안에서 추억몽에게 자신의 짐작을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당시 그는 혼자 바다를 건너가 경험을 쌓다가 운하종에 끌려갔다. 다시 운하종에 이끌려 은도에 가게 되었고, 은도에서 오색 온신련과 바다 건너 세력의 보물들을 얻게 되었다. 많은 물건 가운데서 그는 지금까지 수라검과 천예혈해당만 사용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몇 년간 수라검과 천예혈해당을 여러 번 사용했었다. 만약 바다 건너 세력들이 마음먹고 알아보려 한다면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단서를 찾아냈을 것이다. 단서를 찾았기에, 만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찾아와 300년 전에 잃어버렸던 문파의 보물들을 찾으려는 것일 터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다른 사람 물건은 돌려주는 게 맞지. 저 사람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 거야?”

추억몽은 다 듣고 사건의 경과를 알게 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얘기해 봐야지.”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수라검과 천예혈당은 그동안 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실력이 향상됨에 따라, 특히 파경호 보물 쟁탈전에서 현급 비보를 얻은 다음부터 둘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양준도 비보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 크게 달갑지 않았다. 조건만 맞는다면 물건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찾아온 이들에게는 반드시 얻고자 하는 물건들이었다. 억지로 손에 쥐고 있어 봤자, 괜히 적의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시간이 좀 지체되자 밖에서 또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초조함과 다그치는 뜻이 섞여 있었다.

양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같이 나가 보자.”

추억몽은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따라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