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6장. 무엇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양준은 관저 밖에 나와 찾아온 무인들의 수와 경지를 확인한 다음 살짝 놀랐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찾아온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같이 강한 대열을 이끌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선두에 선 이는 기운을 갈무리하고서 두 눈을 밝게 빛내는 것이 그에게 아주 큰 압박감을 주었다. 신유 경지 이상인 듯했다.
양준이 관저를 나서자, 수많은 시선들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원순이 친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양씨 가문의 막내 공자 양준이 맞는가?”
“맞습니다. 여러분은…….”
“태일문의 이원순이네.”
“수라문의 야방(夜訪)일세.”
“낙화교의 화단혼(花斷魂)이네.”
“적련종의 서천호(徐千皓)요.”
“쌍자도…….”
“운룡도…….”
바다 건너에서 온 각 문파의 통솔자들이 너도나도 자기소개를 했다. 그들은 양준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옆에 있는 어린 소녀 때문에 이미 한 번 놀란 바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양준을 보자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양준은 소녀보다 나이가 더 어리지만, 무려 신유 경지 2단계였다.
양준은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는 한번 다 둘러보고 나서 문득 옆에 서 있는 소녀에게 시선이 고정되더니 표정이 이상해졌다.
“벽락?”
소녀는 양준이 못마땅한지 콧방귀를 뀌었다.
추억몽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 벽락을 보고 똑같이 놀랐다. 그녀는 다시 양준에게 돌아서더니 얼굴에 애매한 표정을 띠었다.
벽락은 창운사지 요미여왕 선경라의 곁에 있는 소녀였다. 그때 당시 추억몽과 낙소만은 선경라에게 감금되었을 때 벽락과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낭자와 서로 아는 사이였군. 우리는 오는 길에 만났는데, 어쩌다 같이 오게 되었네.”
이원순이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순 일행은 바다 건너에서 오고 벽락은 창운사지에서 왔는데 물론 같은 무리일 리가 없었다.
‘벽락이 여기는 웬일이지?’
양준은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께서 여기 오신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양준이 몸을 반쯤 비켜 길을 내주었다.
그의 말에 이원순 일행은 얼굴이 밝아지더니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양준은 자신이 각 문파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물들을 돌려줄 생각이 있는 건가?’
이원순 일행은 이런 생각을 하며 양준의 관저로 들어갔다.
“벽락, 함께 들어가시죠.”
양준이 벽락을 불렀다.
“먼저 들어가세요. 전 나중에 들어갈 거니까.”
벽락이 콧방귀를 뀌었다.
양준은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강요하지 않고 추억몽에게 한마디 했다.
“부탁 좀 할게.”
“알겠어. 벽락 낭자, 오랜만이에요.”
추억몽이 고개를 까닥하며 벽락에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군요! 오랜만이에요.”
벽락은 방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달려들어 매우 열정적으로 추억몽의 손을 잡았다.
추억몽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벽락이 참 다정하다고 생각하며 손이 잡힌 대로 함께 관저로 들어갔다.
“그 귀여운 친구는요?”
벽락이 아름다운 눈동자에 이채를 머금고서 추억몽에게 물었다.
“소만이 말씀이신가요? 그 아이도 여기 있습니다. 곧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추억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벽락이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는 동경의 빛이 서렸다.
*양준 관저 내 편전,
이원순 일행이 자리에 앉자 양준은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차를 음미하면서 여유로워 보였다.
양준은 입을 먼저 열 이유가 없었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한쪽에서 벽락이 몰래 추억몽에게 치근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추억몽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벽락은 줄곧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살결이 부드럽다느니, 관리를 참 잘했다느니 하며 칭찬했다.
추억몽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 앞이라, 와락 밀쳐 버릴 수도 없어 양준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양준은 그녀를 못 본 척 외면했다.
한참 뒤에야 이원순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공자의 명성이 대단한 듯하군. 오는 길에 공자가 계승 싸움에서 이룬 쾌거에 대해 많이 들었다네. 이리 직접 만나 보니 고수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구려!”
“과찬이십니다. 이쪽 내륙은 그쪽 땅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대협께서 사시는 곳은 영기가 풍부하고 무수한 보물들이 숨어 있지요.”
양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원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륙도 장점이 있지 않나. 그런데 공자의 말을 들으니 바다 건너온 적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습니다. 몇 년 전에 그쪽 지역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운하종에서 조난당한 적이 있죠…….”
이원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고운도에 멸문당한 운하종 말인가?”
“맞습니다.”
“고운도 도주인 고풍이 운하종에서 잃어버린 화생파월공을 300년 만에 되찾았다고 하더군.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양 공자가 꾸민 것이란 말인가?”
“예, 제가 운하종과 마찰이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약해서 고운도의 손을 빌려 운하종을 멸문시켰습니다.”
이원순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대단하구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굴빛이 바뀌었다.
‘몇 년 전이면 이 젊은이가 몇 살이나 됐을까? 계략으로 하나의 문파를 멸문시키다니. 과연 평범한 이는 아니군!’
“양 공자가 화생파월공을 찾았다면 혹시 다른 보물은 보지 못했는가?”
이원순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모두 저한테 있습니다.”
양준이 웃으며 손을 뒤집자, 손에 붉은색 장검이 나타났다. 동시에 눈앞에는 아름답지만 살기가 짙은 꽃송이가 떠올랐다. 동시에 은은한 꽃향기가 가득 퍼졌다.
“수라검!”
“천예혈해당!”
수라문의 야방과 낙화교의 화단혼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뜨거운 눈빛으로 두 개의 천급 비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문파에서는 300여 년간 이 보물들을 찾아 헤맸으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문파의 보물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하고 앉으시게.”
이원순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야방과 화단혼은 한참이나 갈등하고 주저하다가 씩씩거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각 문파의 보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양준은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이 빙그레 웃으며 수라검과 천예혈해당을 옆에 있는 탁상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여유 있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원순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양 공자에게 보물이 다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태일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설령 양준이 태일인을 몸속에 흡수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문파의 비법을 통해 그것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태일인은 태일문의 전용 비법이 필요해 흡수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이를 다른 보물과 같이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 뒀습니다.”
양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보물들은 모두 검은 책 공간에 놓아두었기에 이원순 일행은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렇군.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네.”
이원순은 의심이 가셨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찾아오기 전에, 그들은 상대방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예의를 차린 다음, 안 되면 무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신유 경지 고수 50여 명에, 신유 경지 이상이 통솔자로 나서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를 통해 그들이 보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양준이 짐작한 대로, 몇 년 전 고운도가 운하종에서 300년 전에 잃어버렸던 화생파월공을 찾게 되자 다른 세력들도 모두 고운도에 찾아가서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어떤 유용한 소식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 다들 냉정을 찾고 함께 앉아 의논했다. 그 결과 화생파월공이 운하도에 나타난 것은 아주 수상쩍은 일로, 누군가가 운하종에 덤터기를 씌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운하종에 덤터기를 씌운 자가 고운도의 화생파월공을 얻은 만큼, 다른 문파의 보물들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 년간 바다 건너 세력들은 지속적으로 내륙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보았다. 양준이 그동안 수라검과 천예혈해당을 여러 차례 사용했기에 누군가에게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 소식이 바다 건너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서둘러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바람이 이루어지자, 모두들 흥분해 마지않았다.
“양 공자도 알다시피 이 보물들은 등급이 높지 않네. 심지어 어떤 보물은 무인에게 아무런 효능도 없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각 문파의 조상들이 후대 장문인에게 대대로 물려준 것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네.”
이원순은 나이나 경지, 신분으로 양준을 압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작 은도에서 보물들을 얻었을 때부터 어떤 것은 아무 쓰임새도 없이 그냥 문파의 증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양 공자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이원순은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잠깐 망설였다.
“어떤 조건이면 우리에게 보물을 돌려주겠는가?”
“여러분께서 무얼 내놓느냐에 달렸지요.”
양준은 갈취하기로 작정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는 은도에서 얻은 물건들, 수라검과 천예혈해당마저도 모두 내놓을 수 있었다. 실력이 향상됨에 따라 이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별로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 대가 없이 내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착한 바보가 아니었다. 상대가 물건을 찾아가려면 성의를 보여야 했다.
특히 지금 그는 많은 일에 시달려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하필이면 때를 맞춰 찾아온 것이었다.
“그건…….”
이원순은 순간 난감했다. 이번에 떠나면서 다들 몸에 크게 값진 것을 지니지 않고 왔는데, 양준이 이렇게 말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