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9장. 증거가 없지 않느냐?
그동안 양준이 보여준 모습들로 인해 누구도 감히 그를 얕보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말을 하자, 강참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양준도 그가 믿지 않는 것을 알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절 믿는다면 당장 떠나세요. 못 믿겠다면 남아 계시고요. 당신이 죽든, 살든 제 알 바 아닙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앞으로 한 발 성큼 내디뎠다.
그의 행동에 7대 세가 연합군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고수들이 힘을 모으고 무거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의 눈동자는 날카로움으로 번뜩였고, 얼굴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양준 공자……!”
엽신유가 갑자기 인파 속에서 나타났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전해 다급히 건너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교활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는 겁니까? 창운사지 놈들이 미쳤다고 이쪽으로 오겠어요?”
“한심하긴! 엽 사저, 저한테 불만이 있다는 걸 압니다. 지난번의 일은 제가 좀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과 다투고 싶지도 않고, 다툴 시간도 없습니다. 어서 비키시죠. 아니면 저도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정말 무서운 말씀을 하는군요.”
엽신유는 겁먹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비웃었다.
“창운사지 사람들이 이쪽으로 온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양준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증거가 있을 리 있겠는가? 증거라고는 선경라와 벽락에 대한 믿음뿐이었다. 금우응을 내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돌아온다고 해도 금우응이 가져온 소식은 양준만 읽을 수 있는지라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엽신유가 비웃으며 말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제가 왜 공자 말을 들어야 합니까? 이게 공자의 전략일지 누가 압니까?”
“난 수작 부릴 이유가 없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미 계승 싸움을 포기했으니까요. 양씨 가문의 가주 자리 따위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큰형님이나 둘째 형님이 원한다면 차지하면 그만입니다. 난 내 사람들과 함께 이곳을 떠날 겁니다.”
“하하!”
엽신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계승 싸움을 포기하든 말든, 이곳을 벗어날 생각은 마세요.”
“내가 못 떠난다고요?”
“한번 뚫어 보든가요.”
“날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양준은 위험한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
엽신유도 웃음기를 거두고 냉랭하게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나시죠. 당신 관저에 고수가 많다고 하지만 8대 세가와 척을 진 주제에 좋은 결과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중도 전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거 아닌가요?”
“동생, 지금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추억몽이 나서며 말했다.
“창운사지의 사람들은 이미 쳐들어오고 있어.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든 간에 먼저 살고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이게 누군가요? 추억몽 언니 아닌가요?”
엽신유는 입을 막고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활한 얼굴로 추억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에 스스로 찌른 상처가 하루 만에 다 나았어요? 체력 한번 대단하네요. 그게 아니면 어제 양준과 짜고 연극한 건가요?”
추억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엽신유가 양준 관저의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자 추억몽은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말해 보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엽신유는 양준과 추억몽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쌓이고 쌓여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인 듯했다.
“말이 안 통하는군.”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엽신유는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양준 일당은 들어라. 과거의 잘못은 눈 감아 줄 테니 양준을 떠나 8대 세가 밑으로 들어오거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 8대 세가는 영원히 너희들의 문파와 가문을 적으로 인지하겠다. 결과가 어떨지는 너희들도 잘 알 것이다.”
그 말에 양준 뒤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엽신유는 냉소하며 말했다.
“8대 세가에 항복하고 이쪽 편으로 온다면 너희들 가문과 문파의 평화를 보장해 주겠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류 공자?”
그녀는 말하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류비생이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양준 관저의 수많은 시선들이 그에게 주목되자 그는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었다.
“류비생, 이 빌어먹을 놈!”
잠깐 멍해 있던 동경한은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천원성의 소성주인 그는 양준 관저를 떠나서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엽신유의 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양준의 체면을 깎아내린 셈이었다.
그가 떠날 때, 양준은 천원성이 여태까지 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며 선물까지 챙겨 주었다.
동경한의 욕설을 들은 류비생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내세울 게 류비생 하나밖에 없습니까?”
양준은 덤덤한 시선으로 엽신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엽신유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단목 가문과 자미곡은 그래도 기개가 있어서 바로 전성을 떠났어요. 한 명이어도 충분해요.”
그 말에 낙소만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범홍이 엽신유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밑에 들어갔을까 봐 내심 걱정했던 것이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낙소만은 창피해 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류 공자, 말씀해 보세요. 저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잘 알 거예요. 천원성이 무슨 이득을 얻었는지, 지금 심정이 어떤지.”
엽신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류비생에게 명령을 내렸다.
류비생은 난처한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쥔 채, 양준 관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서 있기 너무 힘들었다.
“양준 공자… 죄송합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류비생은 미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니까요.”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다른 감정 변화가 없는 것이 류비생의 배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에 엽신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 이상 애쓰지 마십시오. 내 관저의 사람들을 당신은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양준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죠. 어서 비키십시오.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날 막는 자는 모조리 죽일 겁니다.”
“패기가 넘치는군요.”
엽신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과연 실력도 그만큼 따라줄지 의문이군요.”
양준의 인내심은 드디어 바닥났다. 그는 차갑게 엽신유를 쏘아보며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양준 관저 사람들의 진원이 들끓기 시작했다.
“네 이놈. 또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냐?”
이때,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일곱 명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봉신전의 태상장로들이었다.
능태허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젯밤에 겨룰 때, 능태허 쪽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지만 이제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었다. 몽무애와 지마는 아직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지금 다시 싸움이 난다면 이번엔 그들 쪽에서도 적지 않은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가지 못하겠군.”
몽무애는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성을 떠나는 쉬운 일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어제 우리 8대 세가의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부족한 것이냐?”
양립정이 싸늘하게 양준을 바라보며 혐오의 뜻을 내비쳤다.
“너도 양씨 가문의 자제지만 혈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구나. 이렇게 된 이상, 양씨 가문을 떠나거라.”
장내가 술렁거렸다.
양립정의 이 말은 양준을 가문에서 쫓아내겠다는 말이었다. 8대 세가에서 직계 자제를 가문에서 내쫓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만약 소문이라도 난다면 세상을 뒤흔들 만한 큰일이었다.
양준은 싸늘한 얼굴로 느긋하게 말했다.
“절 내쫓든, 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원하는 건 제 사람들과 이곳을 떠나는 것뿐입니다. 어르신들께서 이곳을 떠나게 해주십시오.”
“떠나고 싶다고?”
태상장로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8대 세가의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세상에 그러는 법이 어디 있느냐?”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양준, 객기부리지 마라. 우리가 왜 널 이렇게 대하는지 가문과 우리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거라. 네가 그렇게 가면 우리 8대 세가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에게 그나마 호감이 있는 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양준에게 호감을 표하며 다른 이들처럼 신분을 내세워 그를 핍박하지 않았다.
“어르신, 이곳은 곧 함락될 겁니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죽는다고요!”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추억몽과 곽성진을 통해 전하라고 한 소식을 우리도 들었단다. 하지만 엽신유가 얘기한 것처럼, 너에겐 증거가 없지 않느냐?”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제 입장은 그렇습니다. 절 믿는다면 어서 떠나시고,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에휴!”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렇게 말하니 다른 뜻이 있지 않나 싶구나.”
“다른 뜻이요?”
양준은 멍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제가 이런 걸 핑계로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속셈이 아니란 말이냐?”
태상장로 중 누군가 비꼬며 말했다.
“하하……!”
양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정말 그럴 생각이 있다면 도망치고 싶을 때, 굳이 어르신들께 알리지 않았겠죠. 나이를 그렇게 드시고도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하시는군요!”
“무엄하다!”
양립정이 버럭 화를 냈다.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또 다른 태상장로가 말했다.
“소문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넌 아마도 그 요미여왕의 시녀한테서 얻은 소식이겠지?”
“맞습니다.”
“간도 크구나!”
말을 꺼낸 태상장로가 화를 내며 말했다.
“8대 세가의 자제로 태어나 6대 사왕과 사사로이 연을 맺다니. 그 죄는 심히 무겁다!”
“요미여왕이 왜 사람을 보내 너에게 이런 것을 말해 주었느냐? 사마의 길을 걷는 자의 말을 어찌 믿으라는 것이냐?”
“아주 허점투성이구나. 우리를 세 살배기 어린애로 보는 것이냐?”
연이은 호통소리가 전해졌다. 곽씨 가문의 태상장로마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