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52화 (551/853)

제 552장. 사왕이 나서다

양준이 그의 관저 사람들과 함께 남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양위는 표정이 변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막내는 그리 쉽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분명 다른 계획이 있을 것인데… 우리도 무모하게 중도로 돌아갈 게 아니라 막내와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엽신유는 경멸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양위가 주견이 없고 간이 작다고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강참도 웃으며 말했다.

“대공자, 지금 8대 세가의 태상장로들께서 저희가 철수할 시간을 벌어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체 없이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양위는 고개를 저었다.

“장로님들이 저들을 물리칠 수 있다면, 우리가 도망가든, 여기에 남든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허나 장로님들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도망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엽신유, 강참, 고양풍은 안색이 변했다.

양위가 그들이 마음속으로 우려하고 있던 일을 꼬집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이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의식 중에 회피한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애써 외면하던 일을 양위가 말하자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강참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고수가 일곱 명이나 계신데.”

“그러니까요.”

고양풍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가 일곱 명인데 어찌 세 사람을 상대하지 못하겠습니까? 실력이… 실력이 못하다고 해도 우리가 중도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끌 수…….”

바로 이때, 양위와 양소의 혈시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조심하십시오!”

혈시들은 말하면서 두 공자의 옆으로 날아와 방어 자세를 취했다.

대열은 순식간에 발걸음을 멈췄다. 모든 신유 경지의 고수들은 경계의 눈빛으로 앞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앞에서 두 사람이 공중에 뜬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오직 섬뜩한 두 눈만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녹색 기운으로, 다른 한 명은 검은색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낄낄낄.”

녹색 기운으로 뒤덮인 사람이 음산하게 웃었다. 그는 양위를 바라보며 칭찬했다.

“너희들 중에 상황을 볼 줄 아는 놈도 있고, 전부 멍청이들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너희 8대 세가의 일곱 명은 우리 성지의 세 고수를 막지 못할 것이야. 조금만 지나면 다 죽게 되겠지.”

“너희들도 죽게 될 것이다.”

검은색 기운에 둘러싸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마치 지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부름 같아서 사람들은 소름이 돋았다.

“감히 망발을 내뱉는구나! 너희들은 누구냐!?”

엽신유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동안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녹색 기운의 사람이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왕, 우리를 보고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군 그래. 이게 바로 8대 세가의 후계자란 말인가? 우리를 보고도 모르다니. 8대 세가도 형편없군.”

“허, 8대 세가? 이름만 거창할 뿐이지 저들이 뭐가 대단하다고!”

음명귀왕은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독왕, 우리 둘이 사람을 죽이는 실력에 관해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지 않은가? 여기서 한 번 겨뤄보는 건 어떠한가?”

“어떻게 겨루겠나?”

“이곳에 제물이 많이 있으니 누가 더 많이 죽이나 보자고.”

“좋지, 아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칠팔백 명 되는 사람들은 그만 멍해져서 두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엽신유는 비명을 질렀다.

“음영귀왕, 절멸독왕?”

둘은 방금 전에 대화하며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걸 듣고도 엽신유가 그들의 신분을 모른다면 바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창운사지의 6대 사왕 중 두 명,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몸을 덜덜 떨게 만든다는 사마였다.

소문에 의하면 6대 사왕은 모두 살인을 일삼는 잔인무도한 놈들인데, 그중에서도 음영귀왕과 절멸독왕이 가장 심하다고 했다. 이 둘이 수련한 공법은 대규모의 살육에 최적화된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무시무시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등골이 서늘해져 부들부들 떨었다.

“전부 흩어져라!”

혈시 한 명이 소리쳤다. 만약 다른 적이었다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싸워 볼 만했다. 하지만 음명귀왕과 절멸독왕을 대적할 때는 인원이 많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두 사왕이 실력을 펼치기 더욱 좋았다.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7대 세가 연합군의 고수들도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어젯밤 양준 관저에서 그들은 용맹하기 그지없었으나 오늘 두 사왕을 마주하자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하기 최적인 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말았다.

“어디로 흩어지겠다는 것이냐?”

음명귀왕은 낄낄 웃었다. 곧이어 그의 몸에서 일그러진 인면(人面)이 나타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인면들은 황천길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불안에 떨었다.

인면들이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어렴풋한 형체를 갖춘 그것들은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날뛰기 시작했다. 인면들이 지나간 곳마다 음산한 바람이 불면서 사람들의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음명귀왕은 흥분했는지 목구멍으로 킬킬 웃음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반응이 빠른 무인들은 인면들을 향해 각종 무공을 날렸다. 하지만 무공은 인면들을 관통할 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인면에 맞은 무인들은 두 눈이 빛을 잃더니 표정이 일그러지며 동료들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혼기, 신혼기를 사용해라!”

한 고수가 정신을 차렸다. 예전에 소문을 들은 적 있던 그는 다급히 큰 소리로 사람들을 일깨워 주었다.

음명귀왕의 몸속에서 나온 인면들은 실체가 없어 평범한 공격과 무공으로는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오직 신혼기만이 그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신유 경지인 무인은 삼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신유 경지의 무인들이 펼친 신혼기도 실력이 각자 달랐다.

실력이 강한 이들은 인면을 막을 수 있었으나 실력이 약한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짧은 순간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면에 당해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인면이 몸에 들어간 뒤, 그들은 눈이 뒤집히며 주화입마에 빠진 것처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온몸의 기운을 난폭하게 분출하며 옆사람을 공격했다. 이내 비명소리가 들리고 피가 튀기며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낄낄낄.”

음명귀왕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을 보면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절멸독왕의 몸에서도 짙은 녹색 기운이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퍼져 나왔다. 곧 짙은 녹색의 독 안개가 커다란 범위를 뒤덮었다. 독 안개에 뒤덮인 무인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쓰려져 뼈도 남기지 않고 핏물이 되었다.

“극독을 조심해!”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절멸독왕은 나서자마자 몇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에는 신유 경지의 무인들도 있었다. 독 안개에 당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신유 경지 7, 8단계 되는 무인이나 겨우 독 안개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얼굴이 녹색으로 물든 채, 온몸의 진원이 불안정했다. 하는 수 없이 힘겹게 운기 조식해 독 기운을 막아 내느라 반격할 틈이 없었다.

이때, 인면들에게 의식이 통제당한 무인들이 그들을 공격하면 손쉽게 신유 경지 7, 8단계의 무인들을 죽일 수 있었다. 두 사왕이 손잡고 공격하자 처참한 살육의 장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둘의 모습으로 볼 때,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 살짝 솜씨를 보인 것뿐이었다.

“패혈광술!”

네 명의 혈시들도 동시에 금기 초식을 시전해 양위와 양소를 보호했다. 그들은 인파 속에서 살 길을 찾느라 애를 썼다.

엽신유는 얼이 나간 채 답운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굴은 망연함과 공포감으로 물들었고,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창운사지 사왕들의 수단이 이토록 무시무시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강참과 고양풍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모두 8대 세가 출신의 직계 공자로서 각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들은 줄곧 중도에서 부유하게 살며 앞날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계승 싸움에서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었다고 하지만 오늘처럼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양준과 대적할 때, 양준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하지만 두 사왕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하고 의미 없게 느껴졌다.

“소저!”

“공자!”

각 가문의 고수들은 소리를 지르며 세 사람의 옆으로 날아가 그들을 답운구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양씨 가문의 혈시들처럼 벗어날 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움직임은 음명귀왕과 절멸독왕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독왕, 저 젊은이들 보게나. 차림새를 보니 제법 지위가 높은 자들인 것 같군.”

음명귀왕이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렇지? 8대 세가의 적통이 틀림없네.”

절멸독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하더니 이내 손을 내저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기운이 날아가 지옥의 피바다에서 8대 세가 적통들을 보호하는 고수들만 교묘하게 맞혔다.

네 명의 혈시들은 신음을 흘리며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양위와 양소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세 가문의 고수들은 순식간에 핏물로 변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리 오너라!”

절멸독왕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엽신유, 강참, 고양풍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제압된 것처럼 저도 모르게 절멸독왕의 옆으로 날아갔다. 세 사람은 비 맞은 생쥐처럼 덜덜 떨며 겁에 질린 눈으로 눈앞의 두 사왕을 바라보았다.

“네놈들 8대 세가의 적통이 맞느냐?”

절멸독왕이 물었다.

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오돌오돌 떨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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