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53화 (552/853)

제 553장. 양준, 우리를 구해줘

절멸독왕은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뻗었다. 녹색 빛을 내뿜는 기다란 손톱이 가볍게 엽신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새하얀 얼굴에 바로 손톱 자국이 나타나더니 뜨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그녀의 날렵한 턱을 타고 똑똑, 떨어졌다.

이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엽신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커다랗게 뜬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짙은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내 질문에 대답하거라. 그러지 않으면 귀왕의 먹이로 줄 것이다. 귀왕이 가장 즐겨먹는 게 바로 너같이 야들야들한 여자애들이란다.”

엽신유는 겁에 질린 눈으로 음명귀왕을 바라보았다. 문득 음명귀왕이 잔혹하게 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극도로 겁에 질린 그녀는 갑자기 어디에서 난 용기인지 다급히 말했다.

“아니!”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녀는 생각할 겨를이 있었다. 창운사지와 8대 세가는 예로부터 원수 사이였다. 만약 두 사왕이 자신들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엽신유는 단박에 부인했다.

“아니라고?”

절멸독왕은 음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살려 둘 이유가 없구나.”

고양풍과 강참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고양풍의 몸속에서 뭔가가 툭툭 불거져 나오더니 몸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피 안개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코앞에 있던 강참과 엽신유는 고양풍의 몸에서 폭발한 피를 그대로 뒤집어쓰는 바람에 흠뻑 젖고 말았다. 놀라서 휘둥그레 뜬 두 눈도 핏물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온 세상이 핏빛으로 보였다.

“8대 세가의 적통이 맞아요!”

강참은 가슴이 찢어질 듯 울부짖었다.

“우리는 8대 세가의 적통입니다. 저는 강씨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도대체 옳다는 것이냐, 아니라는 것이냐?”

절멸독왕의 얼굴에 귀찮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음산한 눈길로 엽신유를 노려보았다.

엽신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멍하니 고양풍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핏자국밖에 없었다. 고양풍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고씨 가문의 후계자는 이렇게 그녀의 앞에서 죽고 말았다.

“이들이 8대 세가의 직계라고 하니 살려 둡시다. 주인께서 중도를 정복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음명귀왕이 입을 열었다.

절멸독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냉소하며 엽신유를 바라보았다.

“계집애, 네 잘못된 대답 때문에 친구 한 명이 죽었어.”

엽신유의 두 눈은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처럼 생기가 전혀 없었다.

“두 명 더 있어.”

절멸독왕이 고개를 들고 혈시 네 명의 보호를 받고 있는 양위와 양소를 바라보았다.

“저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양씨 가문의 혈시들이겠군. 그렇다면 저들은 양씨 가문의 적통이란 말인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음산해졌다.

8대 세가와 창운사지는 모두 원수 사이였지만 원수의 깊이로 따졌을 때, 6대 사왕이 가장 증오하는 가문은 단연 양씨 가문이었다. 양씨 가문이 8대 세가의 우두머리이고, 양씨 가문 혈시당의 고수들이 지난번 창운사지 토벌 전쟁에서 창운사지의 수많은 무인들을 죽여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사마들은 양씨 가문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혈시들과 양씨 가문의 직계 자제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두 사왕이 그냥 놔줄 리 없었다.

“저들은 내 거다.”

음명귀왕은 말하면서 검은색 빛으로 변해 앞으로 날아갔다. 그의 목표는 네 명의 혈시와 양소, 양위였다.

“어서 가십시오!”

혈시들도 음명귀왕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양준과 양소를 사람들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돌아서서 음명귀왕과 맞섰다. 상대가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그들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피로 양위와 양소에게 마지막 희망을 만들어 주려 했다.

“잔챙이들!”

음명귀왕은 낄낄 웃으며 몸속의 귀기를 다시 한번 방출했다. 곧이어 음산한 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귀신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내 험상궂은 얼굴의 거대한 괴물이 혈시들 앞에 나타났다.

괴물은 음명귀왕의 몸속에 있는 귀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실체가 없지만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혈시들은 손잡고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음명귀왕은 이미 양위와 양소의 머리 위에 도착해 그들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양위와 양소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둘은 젊은 세대 중에서 자질이 뛰어나고 실력이 출중한 편이었으며 신유 경지를 돌파했지만, 음명귀왕 같은 고수 앞에서는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막을 생각도 못 하고 음명귀왕의 커다란 손이 덮쳐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이때, 폭포수 같은 빛이 하늘에서 피어오르며 음명귀왕과 양소, 양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음?”

음명귀왕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중에 담긴 기운을 알아챈 듯,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사아악-

빛은 음명귀왕의 몸을 스치며 허공에 쏘아졌다.

곧이어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양준이 번개같이 양위와 양소의 곁으로 다가와 한 손에 한 명씩 들고 뒤따라온 혈시들에게 던져 주었다.

양위와 양소는 두 사왕과 싸우지도 않았고, 혈시들의 보호를 받은 덕에 몸에 상처가 없었다. 하지만 독 안개와 귀기의 영향으로 안색이 매우 나빴다. 도봉은 그들을 받은 다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바로 돌파구를 뚫고 양준의 관저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고수가 더 있었어?”

절멸독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독 공법[毒功]을 펼치며 양준 일행을 포위하려고 했다.

능태허는 무거운 얼굴로 이원순과 함께 동시에 출수했다. 현묘하고 강한 기운이 폭발하면서 독 안개의 침식을 막았다.

“나쁘지 않은데.”

절멸독왕은 느긋한 표정으로 능태허와 이원순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실력이 이 정도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음명귀왕의 눈에서는 빛이 번뜩였다. 그는 도봉이 도망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고는 그를 뒤쫓지 않았다. 오히려 절멸독왕과 손을 잡고 능태허, 이원순과 싸우기 시작했다.

능태허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도 이런 잔혹한 적과 겨루고 싶지 않았지만 공격해야 할 때는 열심히 대응했다.

이원순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바다 건너에서 신 같은 인물이었다. 바다 건너에는 대형 세력이 태일문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태일문에도 신유 경지 이상은 세 명뿐이었다. 때문에 그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 바다 건너의 각 섬, 각 문파에서 다들 그를 보면 공손하게 대했다. 하지만 전성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시비에 휘말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8대 세가나 창운사지와 척을 지는 게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보물을 돌려받으려면 먼저 창운사지와 싸워야 했다. 이는 그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절멸독왕이나 음명귀왕 같은 고수들과 싸우는 것은 힘들기만 하고 이득은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물들을 양준에게서 받아내야지. 그리고 하루빨리 떠나는 거야.’

이원순은 싸우면서 속으로 몰래 결심했다.

절멸독왕과 음명귀왕은 능태허와 이원순에게 막혔다. 주변의 상황을 둘러본 양준은 흠칫 놀랐다. 칠팔백 명이 모두 그의 적이라 할지라도 지금 상황을 보자 미움과 원한이 하찮게 느껴졌다. 칠팔백 명이 거의 모두 전멸했기 때문이었다.

땅에는 시뻘건 피가 가득했고 떨어져 나간 사지와 살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겨우 단 몇 분만에 7대 세가 연합군의 고수들이 두 사왕의 공격에 전멸당했던 것이다.

양준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두 사왕이 아무리 대단하고 공법이 특수하다고 해도 이렇게 처참하게 질 리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양준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중도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두 사왕의 실력이 엄청나다고는 하나, 연합군 중에도 고수는 많았다. 하지만 고수들은 두 사왕의 공격에 손잡고 반격하기는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도망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은 것이었다. 특히 추씨, 곽씨, 류씨 가문의 고수들은 추억몽, 곽성진, 류경요가 자리에 없는 탓에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엽씨, 강씨, 고씨 가문의 무인들은 사상자가 막대했다. 그들은 주인을 지켜야 하기에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고양풍이 죽은 뒤에는 고씨 가문의 살아남은 사람들도 더 이상 싸움에 연연하지 않고 도망쳤다.

칠팔백 명 중에서 도망에 성공한 사람은 백 명도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남아 있었지만 두 사왕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양준은 비웃음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돌아갑시다.”

그가 이번에 나선 목적은 양위와 양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양위는 계승 싸움이 시작되어서부터 그와 한 번도 갈등이 없었고 오히려 협력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그는 큰형을 존경했다.

양소는 7대 세가의 통솔자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엽신유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7대 세가가 연합해 양준을 공격하는 행동에 반기를 든 셈이었다. 양준은 그런 양소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혈육의 정은 존재했다. 양소는 야심이 있고 교활하나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목적을 이뤘으니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양준은 곧바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따라온 혈시들은 돌아간다는 명령에 일제히 그를 보호하며 떠나려고 했다.

“양준, 구해줘요!”

엽신유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희망을 본 듯이 다급히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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