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5장. 천행궁
패천역왕의 힘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방어가 무기력했다. 그의 힘은 순수한 힘의 최고봉으로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패천역왕이 주먹을 휘두를 때, 다른 네 명의 사왕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몽무애가 만든 결계가 패천역왕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패천역왕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패천역왕이 주먹으로 내려친 곳에 잔물결만 일었을 뿐, 양준 관저를 감싼 궁전 모양의 결계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오히려 패천역왕이 힘의 반동에 의해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는 공중에서 끊임없이 공중제비를 돌다가 몇백 장 밖으로 날아간 뒤에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네 사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떡 벌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패천역왕이 나서서 실패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몸집이 거대한 패천역왕은 여섯 명 중에서 실력이 낮지 않았다. 절멸독왕과 음명귀왕도 그와 겨루기를 꺼려하는 편이었다.
방금 전에 휘두른 주먹에 그가 전력을 싣지는 않았지만, 결계에 흠집 하나 생기지 않은 것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반면 양준 관저의 무인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몽무애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했지만 위험한 순간이 닥치기 전까지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패천역왕이 골탕을 먹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몽무애의 실력에 자신이 생겼고 긴장했던 마음도 느슨해졌다.
패천역왕은 몇백 장 거리에서 고개를 저으며 걸어왔다. 양준 관저 앞까지 다가온 그는 멍한 눈빛으로 투명한 궁전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음명귀왕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역왕, 배가 허해서 힘을 못 쓰는 건 아닌가?”
절멸독왕도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왕의 힘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보군.”
그들은 패천역왕이 실패한 것을 보고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헛소리!”
패천역왕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결계가 이상한 거라고.”
그는 말하면서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가 고함을 지르자 그의 기혈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절멸독왕과 음명귀왕도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주먹 한 방은 5할의 힘을 썼지만 이번에는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주먹에 맞는다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었다.
‘과연 결계가 막을 수 있을까?’
사왕들은 은근히 기대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빠른 주먹과는 달리, 이번에 휘두른 주먹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그의 주먹 궤적을 똑똑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느렸다. 하지만 주먹이 지나는 곳마다 공간이 깨지며 천지가 윙윙 소리를 냈다.
주먹이 궁전 결계에 닿는 순간, 더없이 큰 힘이 폭발했다. 잔물결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크게 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패천역왕은 비명을 지르며 화살같이 거꾸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나머지 네 명의 사왕들은 모두 크게 당황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양준 관저의 사람들은 환호를 터뜨렸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난 듯,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다.
“이 결계는… 비범하군.”
절멸독왕도 결계의 대단함을 발견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저 비보도 대단해.”
음명귀왕은 뜨거운 눈빛으로 인파 속의 몽무애를 바라보았다.
패천역왕이 전력을 다해도 비보로 만든 결계를 파훼하지 못했다. 그들은 세상에 이런 결계가 있다는 것과 이처럼 대단한 저력을 가지고 있는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한참 뒤에야 패천역왕이 돌아왔다. 그의 입가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결계가 반사한 힘이 그 자신마저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망할, 내가 부수지 못할 결계가 있단 말이야?”
패천역왕은 화를 내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역왕, 그만하게. 이건 힘으로 부술 수 없는 거네.”
절멸독왕이 일깨워 주었다.
“닥치게!”
패천역왕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결계를 부수기 전까지 그만두지 않을 작정인지 그는 또다시 결계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내지를 준비를 했다.
“멍청하긴!”
음명귀왕이 비웃으며 말했다.
사왕들 중에서 패천역왕의 실력이 대단하긴 했으나 심성이 가장 올곧아서, 하려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사주 말고는 누구도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사주가 없으니 그가 다시 한번 시도하겠다고 했을 때, 다른 이들도 막아서지 않았다.
세 번째로 주먹을 휘두를 때, 패천역왕은 엄숙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진지하게 임했다. 주먹이 결계에 닿는 순간, 수많은 주먹이 나타나더니 동시에 결계를 공격했다.
바로 이때, 패천역왕 앞의 결계에 스스로 틈이 생겼다.
몽무애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패천역왕은 깜짝 놀라 일시적으로 힘을 거두지 못하고 결계 안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결계의 틈이 신속하게 닫혔다. 그와 동시에 빛이 번쩍이면서 인영 하나가 빠른 속도로 패천역왕의 옆에 나타나더니 위기의 순간, 그를 결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결계가 닫혔을 때, 패천역왕은 몇십 장 밖에서 섬전영왕의 손에 들려 있었다.
“빠르군!”
몽무애는 실눈을 뜨고 섬전영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그마저도 섬전영왕의 행동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멍해 있던 양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 그 상황은 몽무애가 패천역왕을 결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술수였다. 이 결계는 몽무애가 만든 것이기에 그는 결계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고, 들어온 사람들을 처리할 방법도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패천역왕을 해치웠더라면 상황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섬전영왕이 나서서 결계가 닫히기 전에 패천역왕을 데리고 나갔다.
작게 한숨을 내쉰 양준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감히 개수작을 부려?”
패천역왕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섬전영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말린 건가? 내가 들어가면 저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는데.”
섬전영왕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넨 죽이지 못해. 들어가면 죽었을 거네.”
상대가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얘기였다. 네 사왕 모두 알아차린 것을 유독 고집불통인 패천역왕만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들은 패천역왕은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고 입을 삐죽거렸다.
“방벽이 단단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군.”
결계는 힘으로만 파훼할 수 없었다.
“우리가 나서 보지!”
절멸독왕과 음명귀왕이 싸늘하게 웃으며 동시에 수단을 펼쳤다. 하늘을 뒤덮는 독 안개와 인면이 순식간에 양준 관저 전체를 뒤덮었다.
결계 안에 숨은 사람들은 하늘을 뒤덮는 녹색 독 안개와 귓가를 울리는 귀신 울음소리에 너도나도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독 안개와 인면은 모두 결계에 가로막혀 들어가지 못했다. 두 사왕이 아무리 애써도 틈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뒤, 절멸독왕과 음명귀왕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도 다른 수가 없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음명귀왕이 말했다.
“주인께서 곧 오시네. 저들은 결계 안에 숨어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여기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나머지 떨거지들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가세.”
절멸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께서 오시면 이 결계도 부술 수 있겠지.”
다섯 사왕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몸을 날려 종적을 감췄다. 거대한 여왕 거미도 뇌정수왕과 함께 싸우러 갔다. 그들이 떠나자 관저의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양준은 몽무애를 바라보며 물었다.
“몽 주인, 이 결계로 사주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까?’
몽무애는 도도하게 말했다.
“내 천행궁(天行宮)을 뚫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주가 다 뭔데?”
“천행궁?”
능태허는 눈썹을 움찔했다.
“비보의 이름인가? 허허, 이런 비보가 있으니 자신감이 있을 만하군!”
천행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없이 안전했다.
“이 결계는 얼마 동안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양준이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무제한으로.”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제야 천행궁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평생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 중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양준은 걱정에 잠겼다. 창운사지가 습격해 왔다는 소식이 중도에도 이미 퍼졌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막아 낼 것인지, 정말로 싸움이 난다면 결과가 또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부모의 실력이 나쁘진 않지만 사왕과 비교했을 때, 천지 차이였다.
전성도 함락되고 도탄에 빠졌다. 5대 사왕이 요수들을 이끌고 전성에 온 뒤로 한 시진이 지났다. 전성에서 양준 관저를 빼놓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7대 세가 연합군의 대열을 이탈해 도망쳤던 무인들도 5대 사왕과 요수들의 추격에 모두 목숨을 잃었다.
소수의 고수들만 무사히 중도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알아낸 양준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무애의 천행궁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몽무애가 없었더라면 관저의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든, 남아서 전성을 지키든 손해가 막대했을 것이다. 몽무애가 말한 것처럼 도망친 사람들은 기껏해야 일 할 정도만 살아남았다.
창운사지가 이번에 크게 한 방을 먹이자, 8대 세가는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된통 당했다.
밤이 되자 창운사지의 무인들은 사주 양백의 인솔을 받으며 드디어 전성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온 사람 중에는 요미여왕 선경라도 있었다.
폐허로 가득하고 피가 강을 이루며 시체가 산처럼 쌓인 전성을 바라보며 선경라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또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그녀가 감지해 본 결과 양준은 줄곧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녀는 양준이 잡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합류한 다섯 사왕이 양백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은 선경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도 못 뚫는 결계라고?”
양백은 5대 사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사왕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절멸독왕이 나서서 말했다.
“주인님, 그 결계는 매우 특이합니다. 저희로써는 방법이 없습니다. 천하에서 이를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주인님밖에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