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6장. 천하제일
다섯 사왕은 양백에게 기대가 컸다. 양백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서 보지.”
그도 다섯 사왕을 막은 결계 비보에 관심이 생겼다.
양준 관저에 도착한 양백은 무거운 얼굴로 투명한 천행궁을 바라보았다. 그는 강한 신식으로 한 번, 또 한 번 안을 살펴보았지만 출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왕들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양백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어쩔 수 없군.”
“네?”
사왕들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모두 사주 양백의 강한 실력을 직접 본 적이 있기에 그를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고수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오자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주인님도 못 부수는 결계라고?’
“재미있군. 이 비보는 이미 이 세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우리 같은 경지의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누구의 것이냐?”
양백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저 사람입니다.”
절멸독왕이 몽무애를 가리켰다.
양백은 시선을 몽무애에게 돌렸다. 둘은 몇십 장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쳐다보았다. 사주의 눈에는 존경과 숭배의 뜻이 서렸다. 오히려 몽무애가 사주를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것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양백은 또 고개를 돌려 인파 사이에 서 있는 지마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는 친근한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신가!”
“낄낄낄.”
지마가 화답하듯 음산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왜 이렇게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직 양준만 짚이는 데가 있을 뿐이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사주 양백이 지금처럼 사공에 대성을 이룬 것은 곤룡골 아래에 있는 마두의 시신 덕분이었다. 곤룡골에 갇혀 있는 동안 양백은 그 시신에서 수련하는 방법을 탐지하고 마두의 실력을 계승했다. 따라서 그의 실력이 빠른 속도로 늘었고 지금의 신통력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두의 시신은 지마가 차지하고 있었다. 지마의 신혼 영체는 마두의 몸에 들어간 다음, 곤룡골의 사악한 기운을 흡수해 탈사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한 명은 마두의 실력을 전수받았고, 한 명은 마두의 시신을 차지했으니 둘 사이에 미묘한 감응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백은 또 고개를 돌려 엄숙한 표정으로 살짝 허리를 굽힌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능태허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서슬이 퍼런 얼굴로 말했다.
“난 네 사부가 아니다.”
양백은 허리를 펴며 덤덤하게 말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입니다. 사부님께서 인정하시든 안 하시든, 제가 살면서 모신 스승은 사부님 한 분뿐입니다.”
양준 관저의 사람들은 그제야 능태허와 사주가 사제 관계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런 제자를 육성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울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능태허의 말속에 후회과 번뇌의 뜻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양백의 경지를 폐지한 뒤, 곤룡골에 던지지 않고 직접 죽였다면 지금 무고하게 피를 흘리며 죽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경지의 벽을 넘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매우 기쁘군요.”
사주는 능태허를 바라보며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네 덕분이지. 내게도 전화위복이었으니 말이다.”
능태허는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저를 오랫동안 가르치셨으니 저도 보답을 해야 마땅하지요.”
양백은 전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능소각 사람들은 그 말에 하나같이 기분이 언짢아졌다.
능태허는 코웃음을 치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양백을 쏘아보았다. 예전에 그는 둘째 제자에게 큰 기대를 품었다. 두 제자 모두 높은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열심히 육성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둘째 제자에게 너무나 실망하고 말았다.
“네가 바로 그 사질이구나? 오늘 처음 보는구나.”
양백은 사람들 속에 있는 양준에게 형형한 눈빛을 보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숙.”
양준은 그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양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는 잘 지내느냐?”
양준은 냉소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숙 덕분에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럼 됐다.”
양백은 숨을 들이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해야 할 말도 마치고, 인사도 끝낸 데다 상대는 결계 안에 숨어 있으니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계속 있는 건 시간 낭비였다.
“경라, 넌 여기 남아서 저들을 감시해라. 나머지는 날 따라와.”
양백은 덤덤하게 분부하고 능태허에게 예를 올린 뒤, 사왕들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선경라만 어색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양백이 왜 그녀더러 남아서 감시하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곧 전성에 있는 창운사지의 무인들과 요수들은 한곳에 모여서 양백과 5대 사왕의 통솔을 받으며 기세등등하게 중도로 향했다. 무방비 상태의 중도를 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떠나간 뒤, 선경라는 멀리서 양준을 힐끗 보더니 곧 양준 관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나타난 벽락도 총총걸음으로 선경라의 뒤를 따랐다.
양준 관저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멍하니 서서 소문이 자자한 요미여왕을 바라보았다. 특히 젊은 남자들은 혼이 빼앗긴 것처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들은 몰래 자신과 비교해 보고서 다들 미묘한 자괴감이 들었다. 관저에서 유일하게 소안만이 선경라와 겨룰 수 있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하응상도 가능할 수 있으나 양준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요염한 자태로 볼 때, 선경라를 따를 여인은 없었다.
“요물!”
호씨 자매는 입을 삐죽거렸다.
선경라는 옅게 웃으며 결계 밖에 다가와 걸음을 멈추고 양준을 바라보았다.
“몽 주인, 저들을 들어오게 해주세요.”
양준이 입을 열었다.
몽무애는 깜짝 놀라 양준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우리한테 해를 끼치진 않을 겁니다.”
양준이 해명했다.
순간, 수많은 시선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양준이 이런 여인과 연이 있을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자식……!”
몽무애도 어이가 없었다. 그는 손을 휘저어 결계에 틈을 냈다.
선경라와 벽락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결계가 다시 닫혔다. 사람들 앞에 선 선경라는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능태허는 미간을 찌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네. 요미여왕의 이름은 익히 들었지. 같은 신유 경지 이상이니 난 이런 예를 받지 못하네!”
그는 양백의 뒤를 따르는 사왕을 극히 경계했다. 선경라가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선경라는 생긋 웃었다.
“양준의 사부님이시면 저의 사부님이나 다름없습니다. 저와 양준은… 호호……!”
선경라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가히 되짚어 볼 만했다. 관저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이상해졌다. 곽성진과 동경한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애매하게 웃었다.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마.”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경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새빨간 입술이 매우 유혹적이었다. 벽락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양준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이번엔 어떻게 된 일이야?”
양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되긴, 네가 보는 그대로야.”
선경라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갑자기 창운사지에서 쳐들어온 거지?”
이번 일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그 누구도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선경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이 주인님에게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잖아. 남 탓할 것 없어.”
“계승 싸움 때문이라고?”
“물론이지. 계승 싸움으로 8대 세가의 힘이 두 곳으로 나뉘어서 하나씩 무너뜨릴 기회가 생겼잖아. 게다가 너희들이 지난번에 성지를 토벌하며 손해도 컸고, 아직 원기도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떻게 놓치시겠어?”
“성공할 수는 있고?”
양준이 냉소했다.
“성공할지, 못할지는 나야 모르지.”
선경라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주인님의 성과와 경지로 봤을 때, 너희 8대 세가에서 막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그 말에 양준의 안색이 변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건데?”
“그는 천하제일이다.”
몽무애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희 8대 세가는 단합이 안 되잖아. 중도같이 큰 도시에서 8대 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성지 사람들이 8대 세가 중 한 곳을 치면 나머지 일곱이 바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겠어?”
선경라는 웃으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투에는 약간의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양준은 코웃음을 쳤다.
“너희 창운사지도 단합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니야?”
선경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성지의 사람들은 너희 8대 세가보다 더 이기적이지. 만약 지금 주인님이 중간에서 중재를 해주지 않았다면 성지의 6대 사왕은 서로 적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주인님이 계신 이상, 얘기가 달라지지. 양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주인님께서는 이번에 반드시 중도를 무너뜨릴 거야. 그분은 성지 무인들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으시거든. 심지어 우리 사왕들의 생사도 마찬가지야. 필요하다면 그분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우리를 희생해너희 8대 세가를 무너뜨릴 거야.”
“그래서 너희들은 기꺼이 그놈의 앞잡이가 되겠다는 거야?”
“기꺼이가 아니라 반항할 수 없는 거야!”
선경라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양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남아. 이 안에선 양백도 널 어찌하지 못할 거야.”
선경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남으면 난 안전하겠지. 그럼 내 행궁의 부하들과 표향성에 있는 사람들은?”
양준은 깜짝 놀랐다. 문득 그때 선경라의 행궁에서 그를 살뜰히 보살폈던 세 여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