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3장. 불구덩이에 뛰어들다
추억몽은 굳이 그에게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양준 관저밖에 없었다.
“황 장로,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못 되네.”
여사가 양준을 위해 변명하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황효와 강철은 여사가 왜 그리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사가 이어 말했다.
“난 여기 있는 양 공자와 안면이 있는 사이라네. 장담하건대 절대로 사악한 이가 아닐세! 간교한 것은 맞지만.”
그는 아직도 양준이 그의 양정옥상을 빼앗아 간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했다. 물론 양준의 소개로 소부생에게서 현단을 얻어 오랜 세월 그를 괴롭히던 병이 나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양정옥상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보물이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여 장로님.”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황효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 여 장로의 안목은 믿을 만하니 그 말을 믿겠네. 그러나 양준과 사왕이 특별히 가까워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만 이 상황은 어떻게 해명할 건가?”
이 말은 양준에게 묻는 것이었다.
“제가 왜 해명해야 하죠?”
양준이 냉소를 흘렸다.
‘8대 세가의 모집령을 받았으면 중도로 가면 되지, 왜 여기서 힘을 빼고 있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군.’
양준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 황효가 왜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중도가 현재 매우 위험한 상황인 만큼 그는 지원하러 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는 길에 이런 일을 만났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보려는 속셈인 듯했다. 게다가 만약 이곳에서 큰 공이라도 세우면 중도에 가서 8대 세가의 중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자신에게나 황씨 가문에나 모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적어도 8대 세가의 화살받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양준은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기분이 언짢았다.
“해명하기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네.”
황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경라를 가리키며 외쳤다.
“대신 요미여왕의 무공을 폐하는 데는 동의해야 할 걸세. 그래야만 창운사지와 결탁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네. 어떤가?”
“하! 우습군요. 제가 왜 당신한테 그런 걸 증명해야 하죠?”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양준은 가문의 정예를 거느리고 중도로 지원하러 가는 이들을 존경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대의를 마음에 품은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수를 모르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황효가 매우 거슬렸다. 더욱이 그의 의도와 목적이 뻔히 보였기에 더 그랬다.
“흥! 그리 나올 줄 알았네. 여 장로, 더 할 말씀이라도 있으신가?”
황효가 고개를 돌려 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사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효는 이미 양준이 사마와 결탁했다고 단정지은 듯했으므로 그가 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여사도 이미 황효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며칠간 여씨, 황씨 가문, 광명부는 같이 합류해서 중도로 향하고 있었지만,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다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자신들이 중도에 도착하기 전에 전세가 전환되기를 기대했다. 또한 중도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는 내내 아무 일도 없었고, 이제 막 중도가 눈앞에 보이던 참에 전성에서 양준과 요미여왕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효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여 장로, 강 장로! 창운사지가 천하를 어지럽히는 와중에 사왕 한 명이 이곳에 나타났네. 난 결코 이 사태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네.”
황효가 우렁차게 외쳤다. 이에 여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 하려는 것인가?”
“뭐 하려는 거냐고 물었는가? 당연히 이곳을 쳐부수고 요미여왕과 양씨 가문의 패륜아를 사로잡아 중도로 압송해야 하지 않겠나?”
황효가 연신 냉소를 흘렸다.
황효가 이처럼 망발을 지껄이자 양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양준뿐만 아니라 밖의 소리를 듣고 관저 안에서 달려 나온 이들도 이상한 표정을 하고서 놀란 눈빛으로 황효를 바라보았다.
‘지금 관저 안에 어떤 고수들이 있는지 모르는 건가?’
‘애당초 봉신전의 여덟 장로들이 와도 어찌하지 못했는데,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생긴 거지?’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곧 어찌 된 연유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반년 전 7대 세가 연합군이 기세등등하게 양준 관저를 공격했을 때, 봉신전의 장로들과 양준 관저의 초범 경지 세 명의 접전에 대해 전성 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문제는 바로 이튿날 창운사지가 전성에 침입해 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전성은 도탄에 빠졌고, 양준 관저를 제외하고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날의 접전은 밖으로 전해질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황효는 양준 관저의 전력에 대해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양씨 가문 공자의 관저에 조력자가 많다지만, 자신의 가문에서도 이번에 지원을 하러 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모두 정예들이었다. 또한 초범 경지 고수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손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황효는 선경라만 잘 대처한다면 아주 쉽게 이곳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 장로, 이러면 안 되네. 이 사안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걸세.”
여사가 대경실색하여 서둘러 그를 저지했다. 여씨 가문은 안목이 낮아 계승 싸움에서 양준을 선택하지 않는 바람에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다시 양준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황효의 행동에 여사는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여 장로! 뭘 그리 걱정하는 것인가? 걱정이 지나치군. 저 계집과 양씨 가문의 패륜아를 사로잡으면 큰 공을 세우는 거네. 이런 공을 남에게 양보하고 싶은가?”
말을 마치고 그는 광명부의 강철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강 장로는 어떠한가?”
강철 역시 황효의 제안에 혹해 그가 묻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난 황 장로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네.”
황효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강 장로가 말이 잘 통한다니까! 여 장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 공은 우리 두 가문이 나눠 가지면 되겠구려!”
“좋군.”
강철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미 양준 관저를 쳐부수고 양준과 선경라를 사로잡아 공이라도 세운 듯했다.
추억몽이 차가운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어르신 이러지 마세요. 우리 서로 아무런 은원도 없지 않습니까?”
황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추 소저도 저놈한테 속고 있으니 저들을 위해 사정할 거 없네. 걱정하지 마시게. 그대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
“어르신은 그러실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떠나 주세요. 더 늦으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실 거예요.”
추억몽은 초조했다. 그녀는 양준의 표정을 살피는 한편, 목소리를 높여 황효를 저지했다. 그녀는 황씨 가문과 광명부의 사람들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두 가문의 정예는 중도를 지원하러 가는 길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었다.
그녀는 양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황효가 말끝마다 양씨 가문의 패륜아를 거론하자, 양준은 이미 분노가 한계점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황효가 계속해서 도발한다면 그는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죽이려 할 것이 분명했다.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우린 갈 생각이 없는데?”
황효가 냉소하며 말했다.
“추억몽, 물러나 있어.”
양준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양준!”
추억몽은 그의 팔을 와락 잡으며 흥분하지 말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덤비면 그때는 나도 못 참아!”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뻔뻔하기 그지없군! 여 장로, 마지막으로 묻겠네. 우리와 함께 저들을 제압하지 않겠는가? 안 그러면 여씨 가문의 공은 없네!”
황효가 노발대발하더니 고개를 돌려 음침한 표정으로 여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사는 잠깐 갈등하고 망설이다가 뒤로 열몇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왠지 이번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계속 불안한 것이 뜻밖의 변고가 생길 것만 같았다.
여사가 이런 태도를 보이자, 황효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속으로는 여사가 너무 소심하다고 생각했다.
양준은 양씨 가문의 직계 자제이지만, 이미 반년 전에 사마와 결탁하고 중도를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와 요미여왕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므로, 그가 사마의 길에 빠져든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양준을 사로잡으면 양씨 가문의 미움을 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사는 이런 기회마저 잡지 않으려 했다. 황효는 여사의 중립을 지키려는 태도를 여지없이 비웃었다.
“강 장로, 갑시다.”
황효는 냉소를 흘리고는 한 손을 천천히 올리며 외쳤다.
“황씨 가문과 광명부의 사람은 들어라. 나를 따라 요미여왕과 양준을 사로잡는다. 추억몽 소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반항할 시 모두 죽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 세력의 사람들이 일제히 양준 관저로 달려들었다. 황효와 강철은 선두에 서서 기세등등하게 양준과 선경라를 공격했다.
양준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하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서 추억몽이 낙담한 표정으로 기세등등하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난 분명 기회를 줬는데 저쪽이 먼저 덤빈 거야.”
양준이 추억몽을 흘끔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추억몽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달려드는 사람들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두 세력의 신유 경지 고수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달려드는 이들 모두 살기등등했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고 모조리 죽여.”
양준이 차갑게 외쳤다.
상대가 그에게 무례한데, 그가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양준의 뒤에서 혈시 아홉 명이 번개같이 튀어나오더니 상대를 덮쳤다. 혈시들은 대단한 초식도, 강한 비보도 없이 맨몸으로 뛰어나갔지만, 그들의 모습은 마치 양 무리에 뛰어든 호랑이 같았다.
큰 기대를 품고서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사람들은 세차게 흐르던 강물이 순식간에 막혀 버린 것처럼 기세가 확 꺾여 버렸다. 곧이어 강한 파동이 전해지면서 한순간에 수많은 사상자들이 생겼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황효와 강철은 비명을 지르며 거꾸로 나가떨어졌다.
몇십 장 밖에 있던 여사와 여씨 가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경악에 찬 시선으로 거의 일방적인 살육에 가까운 장면을 지켜보았다.
‘초범 경지 고수 아홉 명이 동시에 나서다니!’
여사는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정신이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