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4장. 모조리 흡수하다
양준 관저에서 갑작스럽게 초범 경지의 고수 아홉 명이 튀어나오자 두 세력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령 그들이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혈시 아홉 명의 맹공격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이는 혈시 아홉 명이 초범 경지에 오른 뒤 첫 전투였다. 때문에 그들 역시 전력을 다하며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황효와 강철은 혈시들의 첫 번째 공격에 이미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몸을 가눈 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는 순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두 세력의 정예들은 혈시 아홉 명의 공격에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고 있었다. 황효가 공격 명령을 내린 뒤 전투가 끝나기까지 겨우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두 세력의 6~70명 정도의 정예들이 모두 전멸되었다. 초범 경지 고수인 황효와 강철만 남아 아연실색해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여씨 가문의 정예들은 벌벌 떨었다. 사실 여사가 황효의 요청을 거절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공을 세울 기회를 잃었다고 실망했었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을 보고 나자,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역시 여사가 안목과 선견지명이 있다고 감탄했다. 만약 방금 전에 여씨 가문에서도 전투에 참여했다면, 지금쯤 그들 역시 두 세력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오싹했다. 일등 세력의 정예들도 초범 경지 고수 아홉 명의 앞에서는 전혀 상대가 안 되었다.
황효와 강철은 넋이 나가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또한 가문과 문파에서 정성껏 양성한 정예 무인들이 이처럼 무의미하게 없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곧이어 두 세력의 무인들을 모두 처리한 아홉 명의 혈시들이 냉담한 표정으로 두 장로를 향해 날아왔다. 이에 황효와 강철은 괴성을 지르며 급히 도망쳤다.
“양 공자!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게! 저들은 그래도 창운사지와 싸우겠다고 달려온 자들이네!”
여사가 급히 큰 소리로 외쳤다.
“양준……!”
추억몽도 양준을 부르며 그를 저지했다.
추억몽의 목소리가 들리자, 혈시들은 잠깐 움직임을 늦추고 양준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순간의 지체로 황효와 강철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양준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서야 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씨 가문과 광명부는 정예들이 모두 이곳에서 죽어 손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재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황효와 강철마저 죽는다면 두 세력은 정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양 공자! 감사하네.”
여사가 서둘러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양준은 이상한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사는 불안감과 압박감 때문에 조용히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양준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혈시 아홉 명이 뛰쳐나가 첫 번째 신유 경지 고수를 죽일 때부터, 그는 자신의 식해에 불현듯 강한 흡입력이 생기며 알 수 있는 힘을 식해로 끌어당긴다는 것을 느꼈다. 두 세력의 정예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알 수 없는 힘이 연이어 식해로 흡수되었다.
양준은 서둘러 심신을 가다듬은 뒤, 신식으로 자세히 탐지해 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식해에 흡수된 알 수 없는 힘이 신유 경지 고수들이 죽은 뒤 남아 있던 신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유 경지 고수들은 모두 자신의 식해를 가지고 있고, 식해에는 각자 수련해 낸 신식이 저장돼 있다. 그리고 신유 경지 고수가 죽으면 그의 식해는 죽는 순간 흩어지게 된다. 또한 식해가 무너지면 그 속에 저장된 신식은 빠르게 허공으로 흩어졌다가 금방 사라진다. 이는 마치 물이 가득 담긴 잔이 깨지면 물이 밖으로 흘러 깨끗이 증발되는 것과 같았다. 다만, 특별한 비보가 있다면 신유 경지 고수가 죽어도 그의 신식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온신련 같은 비보가 바로 그런 기능이 있었다.
처음 양준이 온신련을 얻었을 때도, 온신련은 강한 신식에 감싸여 있었다. 그 신식은 바로 전대 주인이 남겨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양준은 실력이 낮아 그 신식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지마가 이득을 챙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신유 경지 고수가 죽은 다음 식해에서 흩어져 나온 신식은 모두 양준의 식해에 흡수되었다. 강한 흡입력의 출처는 놀랍게도 꼭 감겨 있는 금인독안이었다.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금인독안의 비할 데 없는 위력을 직접 지켜보았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도 해 보았고, 심지어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 한 달간 폐관 수련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금인독안은 양준의 신식과 미약하게 연결되었을 뿐이었다. 이후 양준은 더는 금인독안을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그것이 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현재 양준의 식해에는 족히 육칠십 개 정도의 신식 덩어리가 한데 모여 있었다.
그의 신식이 식해에 잠겨 있는 동안, 양준은 외부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 지난 뒤에야 양준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둘러보았다. 그는 황효와 강철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도망쳤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추궁하지 않고 혈시들에게 지시했다.
“시체만 치우고 돌아간다.”
그러고는 뒤돌아 관저로 들어가려 했다.
“양 공자, 멈추게!”
여사가 다급하게 양준을 불러 세웠다. 그러자 양준이 뒤돌아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제게 더 볼일이 있으십니까?”
여사는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와 서둘러 손을 저었다.
“그것이 아니라…….”
예전 같으면 그는 양준에게 신분을 내세워 거드름을 피우거나 연장자의 위엄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양준 휘하의 실력 그리고 양준의 잔인성과 결단력을 보았는데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자칫하면 여씨 가문 사람들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여사는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 공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무슨 처리 말입니까?”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였는데…….”
“그게 어때서요? 저들을 위해 복수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양준이 냉소했다.
“농담도 잘하는군. 다만 우리 세 가문은 8대 세가를 돕기 위해 중도로 가는 길이었네. 그런데 이곳에서 이리 변고가 생겼으니 8대 세가에서 이번 일에 대해 묻는다면 해명하기가 좀 어렵군.”
그제야 양준은 몸을 돌려 여유 있게 여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 장로님, 이번 일이 제가 잘못한 겁니까?”
“아니네.”
여사는 잠깐 생각하고서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번 일은 정말 양준의 잘못이 아니었다. 황효와 강철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양준 관저를 공격하려다가 실력이 모자라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탓하려면 안목이 없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그들 자신을 탓해야 했다. 굳이 양준을 비난하려면 그의 일 처리가 과격했다는 것뿐이었다. 그저 혈시 아홉 명이 살짝 실력만 보여주었어도 두 세력의 사람들은 풀이 죽어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사는 양준의 성격이 이러하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일등 세가의 후계자도 죽이는 마당에 가문의 정예들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제 잘못이 아니면 장로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양준이 냉랭하게 말했다.
여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 가문이 같이 움직였는데 우리 여씨 가문만 생존했으니 중도에 도착하면 의혹이 뒤따를 걸세. 분명 그들이 어찌 죽었나, 왜 우리만 살아남았나 추궁할 거란 말이네.”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해주십시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여사가 정색하더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황씨, 강씨 두 사람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들이 내린 잘못된 결정으로 그들의 가문과 문파는 큰 손해를 입은 게지. 그들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 여씨 가문과 양 공자를 엮으려고 할 것이네.”
“장로님께서 저와 결탁하고 저들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말입니까?”
“아주 불가능한 추론도 아니네.”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되면 여씨 가문은 이제 끝이군요. 이번에는 추씨 가문에서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양준이 남의 집 불구경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도 여사는 감히 화내지 못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니 양 공자가 나와 같이 중도로 가 주었으면 하네.”
양준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눈동자에는 음산하고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난 애초부터 양 공자가 사마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네. 그러니 중도로 함께 가세나. 8대 세가와 힘을 합쳐 싸우세. 양 공자 관저에 고수들이 운집해 있으니 현재 중도의 국면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네.”
“여 장로님께서 저희를 좋게 봐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8대 세가와 중도의 존망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그저 이곳에 피신해 있을 뿐입니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양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여사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뒤돌아 관저로 걸어 들어갔다.
그 사이 혈시 아홉 명은 관저 밖의 시체를 깨끗하게 치웠다. 양준 관저의 사람들도 양준을 따라 관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여씨 가문의 사람들만 난감한 표정으로 밖에 서 있었다.
여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씁쓸하게 웃었다.
*관저 안,
벽락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따라 들어온 선경라는 자세히 살펴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그녀는 양준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요염한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더니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챈 추억몽과 낙소만은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옆에 사람도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너, 괜찮아?”
양준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괜찮아. 다만 널 먹고 싶을 뿐이야.”
선경라가 방그레 웃으며 그에게 푹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여기요… 아직 사람이 있거든요.”
추억몽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이리 노골적으로 유혹하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원래 선경라에게 가지고 있던 그녀의 호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