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71화 (570/853)

제 571장. 포섭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한동안 차를 마시던 가주들은 곧 인내심을 잃었다. 사실 그들은 중도의 대형 세가의 가주로서 지위, 신분, 경지에서 모두 일반인과는 동떨어진 세계였고, 평소에 언제나 모든 이들을 굽어보는 위치였다. 그런데 지금 양준 관저에 와서 이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다 보니 마음속으로 불만과 분노가 생겨났다. 특히 지금 양준은 여유 있게 상석에 앉아, 차가운 얼굴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고묵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양준, 우리 8대 세가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러 왔는데, 저 요망한 계집까지 들이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 겐가?”

“‘요망’하다라? 고 가주님께서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선경라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요망하다면 요망한 거지. 오늘도 양준이 아니었으면 네년의 목숨을 끊어 버렸을 거다. 은혜를 모르다니, 어서 나가지 못할까?”

고양풍은 절멸독왕과 음명귀왕의 손에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따라서 고묵에게 있어 창운사지의 사왕들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였다.

“제 관저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크게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가주들은 얼굴빛이 급변했다. 신비한 힘이 그들의 몸에 가해지면서 진원을 끌어 올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깜짝 놀라 경악에 찬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양준이 도대체 무슨 수단으로 신유 경지 이상인 자신들의 힘을 봉인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양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살짝 경고만 하고, 곧 몽무애에게 그들의 봉인을 풀어주라고 신호를 보냈다.

몽무애는 천행궁 내에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었다. 설령 초범 경지 고수가 이곳에 들어와도 생사는 몽무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때 당시 그는 고의로 패천역왕을 천행궁에 끌어들여 죽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섬전영왕이 구해 나가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묵은 분노가 차올랐지만 양준을 노려보기만 할 뿐 이 자리에서 화낼 수도 없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양씨 가문 적통으로서 이번에 정말로 창운사지 쪽에 서려는 것인가?”

다른 일곱 명의 표정도 굳어지더니 모두 신경 쓰이는지 양준을 지켜보았다.

“사마와 결탁하고, 사공을 익히며, 중도에 혼란을 일으키고…….”

양준이 가벼운 말투로 하나하나 나열했다.

“이것들은 8대 세가에서 일찍이 일방적으로 저에게 덮어씌웠던 죄명입니다. 지금 제가 창운사지 편에 선다는 것도 당신들의 말이고요. 제가 여기서 반박해야 됩니까?”

양준이 차갑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가주들은 순간 난감해져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당시 8대 세가는 양준에게 억지로 덤터기를 뒤집어씌웠고, 양준은 반항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이제 양준은 8대 세가와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심지어 그가 지금 모은 전력이라면, 8대 세가 가운데 어떤 가문이라도 손쉽게 휩쓸어 버릴 수 있었다.

양준이 이처럼 냉랭하게 질문하자, 그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중 한 가지만은 여러분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사마와 결탁한 건 확실합니다.”

가주들은 얼굴빛이 급변하면서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선경라를 가리키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선경라와 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당시 제가 창운사지에 떨어졌을 때,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죠. 그래서 누구라도 그녀를 건드리면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선경라의 얼굴은 행복으로 꽃피었고, 마음속에는 자부심이 차올랐다.

‘역시 내가 선택한 남자야. 위압적인 기세로 8대 세가 가주들을 억눌러 감히 반항할 엄두도 못 내게 하잖아.’

“그건 자네와 요망… 요미여왕의 사적인 교분일 뿐이네. 사마와 결탁했다고 할 수 없지. 양준 자네가 공과 사가 분명하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네.”

강예가 서둘러 양준을 대신해 변명했다. 양응호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한마디 했다.

“반년 전의 일은 우리 양씨 가문과 중도 7대 세가에서 너한테 미안하구나.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에 대해서는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8대 세가에서 보상해 주려고 한다. 네가 어떠한 요구를 하든지 다 들어줄 것이다.”

“백부님, 반년 전의 일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거든요. 만약 무엇이 필요하다면 8대 세가에서 보상할 필요 없이 제 스스로 취할 것입니다.”

양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정색하고 말했다.

양응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의 이 말은 이미 8대 세가에 실망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동시에 반년 전의 일에 대해 더는 개의치 않음을 말해 주기도 했다. 그때 당시 양준과 대치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기 때문이었다.

“여러분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양준이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가주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난 뒤, 양응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뭐 큰일도 아니다. 요미여왕도 아마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온 듯한데 먼저 말하게 하려무나.”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선경라가 찾아온 목적이 걱정되어 지켜보려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선경라는 방긋 웃더니 가주들에게 숨기지 않고 직접 말했다.

“이번에는 사주의 명을 받고 너를 설득하러 왔어.”

가주들의 얼굴빛이 금세 차가워졌다. 이미 짐작했었지만 선경라가 이처럼 대놓고 말하자, 그들은 걱정되어 하나같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

“사주께서는 너와 손잡고 8대 세가를 멸한 다음, 세상을 지배하자고 했어.”

선경라는 8대 세가의 가주들을 안중에 두지도 않은 듯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양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흥미가 동한 듯이 물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성사되면 세상은 네 것이 될 거라고 했어.”

양준이 놀라서 물었다.

“그럼 사주는 무엇을 원하는 거야?”

“그분은 그냥 8대 세가를 멸하기만 하면 된대.”

선경라는 눈썹을 찌푸리고서 야릇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녀 역시 사주가 갖은 방법을 다해 수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중도에 진격해 온 것이 오로지 이 목적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을 왜 그리 힘들여서 하겠는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선경라는 양 볼에 홍조를 띠더니 양준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사주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나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셨어.”

“하하!”

양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의미심장하게 선경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원래부터 내 거잖아? 사주가 무슨 자격으로 선물한다, 만다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선경라가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보고 가주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양준이 세상에 이름이 자자한 요미여왕과 어찌 저리 친밀하지?’

“그럼 승낙할 거야, 말 거야?”

선경라가 캐물었다.

“당연히 승낙해야지. 이런 좋은 일을 왜 거절하겠어?”

양준이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가주들의 얼굴빛이 크게 달라지더니 모두들 경계 어린 눈초리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이렇게 쉽게 선경라의 제의에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들이 막 양준을 질책하려던 찰나, 양준의 얼굴빛이 차가워지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인지 말해. 난 그냥 말을 전할 뿐이야.”

“돌아가 사주한테 전해줘. 사부님께서 사주의 머리에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 머리를 내게 바치면 손잡을 수 있다고.”

선경라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전할게. 그런데 아마 그분께서 승낙하지 않을 거야.”

선경라는 말하는 한편, 일어서더니 벽락과 함께 떠나갔다. 정말 사주의 말만 전하고 전혀 양준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선경라가 떠나간 다음에야 가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준의 대답을 듣고, 그가 결코 사주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사주는 능소각 출신으로 양준의 사숙이기도 했다. 하지만 능소각의 장문인 능태허가 사주 양백의 목숨을 거두려 하는 이상, 양준과 양백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자 가주들은 금세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저를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양준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양응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가 양씨 가문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어쨌든 너도 양씨 가문의 적통이잖느냐!”

현재 중도에는 세 세력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중 양준 관저는 8대 세가와 창운사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데다가 태도까지 불분명했다. 8대 세가에서는 당연히 양준이 그들 쪽에 서기를 바랐다.

지난 한 달간, 양준 관저는 중도로 지원하러 온 정예 고수들을 적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초범 경지도 열 명이나 되어, 8대 세가와 손잡으면 창운사지를 손쉽게 쫓아낼 수 있었다.

“백부님, 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양준이 고개를 저었다.

“왜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이냐?”

“힘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발언권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만약 돌아가면… 여러분과 지금처럼 대화할 수 있을까요?”

양준이 냉소했다.

양준이 가문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세력들은 8대 세가에서 모두 인수해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준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양백의 목숨을 거두려고 하십니다. 저는 사부님을 도와서 문파의 이름도 바로 세워야 하고요. 물론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것입니다. 만약 제가 양씨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8대 세가의 지휘권을 저에게 맡길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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