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72화 (571/853)

제 572장. 가주 교체

“말도 안 돼! 기껏해야 발언권을 정도를 주겠지. 전투의 지휘권은 우리가 이행할 것이다.”

고묵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고묵의 눈에 양준은 아직 너무 어렸다. 어리면 충동적일 수밖에 없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쉽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다. 8대 세가의 기반을 어찌 젊은 양준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럼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 독선적이니까요.”

양준은 더 이상 의논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꼭 그래야만 하겠느냐?”

양응호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양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응호는 깊은 사색에 잠기더니 한참 뒤에야 말했다.

“먼저 장로전에 가서 의논해 보아야 할 것 같구나. 8대 세가를 너에게 맡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씨 가문을 너에게 맡기는 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다.”

“양 가주?”

고묵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양응호를 바라보았다. 양응호가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 말은 곧 양씨 가문의 가주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이 한두 번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반복돼서는 안 되지… 안 그러냐, 양준?”

양응호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백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양준이 자신 있게 씩 웃었다.

양응호가 한 말의 속뜻을 알아듣고 다른 일곱 가주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만 가 보마.”

양응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일곱 명도 일어섰다. 그들은 복잡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고는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더니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 양준과의 만남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백부님, 제 부모님은 어떠신가요?”

이때, 양준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네 부모님 걱정은 하지 말거라. 설령 양씨 가문이 망한다 해도 네 부모님은 무사할 것이다.”

양준은 얼굴빛이 살짝 바뀌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백부님, 고맙습니다.”

“다 한집 식구 아니더냐.”

양응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들은 편전에서 나와 복도에서 추억몽과 곽성진을 만났다. 두 사람은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추억몽이 인사를 올렸다. 명문 세가 출신으로서 예의와 교양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반면 곽성진은 껄렁껄렁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곽정은 화가 치밀었다. 중도에서 아마 곽성진만이 대형 세력 출신의 공자다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듯했다.

“어서 이리 오지 못해? 할 말이 있다.”

곽정이 곽성진에게 소리쳤다. 곽성진은 얄밉게 웃으며 고분고분 곽정을 따라 한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한쪽에서 추수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추억몽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말했다.

“몽아, 네가 나보다 훨씬 멀리 내다보는구나.”

계승 싸움이 시작되기 전, 추억몽은 양준과 동맹을 맺기를 주장했지만, 추수성과 추자약은 결국 여섯째 양신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증명하는 것처럼 결국 추억몽의 선택이 옳았다.

계승 싸움에서 양준은 뜻밖의 복병으로 부상해 아무것도 없던 처지에서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계승 싸움이 끝날 무렵, 추수성은 추억몽과 추우당의 사람들을 불러들이며 그녀와 양준과의 관계를 끊어 내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또 한 번 그의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중도가 내외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 추억몽은 여전히 양준 관저에 남아서 그의 유능한 조력자로 일하고 있었다. 추수성은 이에 대해 전혀 반대할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애당초 추억몽이 양준을 끝까지 따르면서, 심지어 그 때문에 자신의 명을 어긴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몽이가 나보다 안목이 있고 멀리 내다보는 게 확실하군!’

추수성은 저도 모르게 ‘이제는 나도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낙담했다.

“아버지!”

추억몽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는 추수성이 처음으로 그녀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아무리 우수해도 추수성은 칭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오직 추자약을 추씨 가문의 후계자로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가끔 추억몽이 너무 뛰어나면 그는 심지어 아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녀가 남자가 아닌 것을 아쉬워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추수성에게서 아낌없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추억몽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과 동시에 서글픔을 느꼈다.

“이제 아버지도 늙었구나. 앞으로 추씨 가문은 네가 맡아야 할 거 같다.”

추수성은 가볍게 탄식했다.

추억몽은 눈물을 머금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버지는 아직 젊으세요.”

“늙었어. 봐, 저들도 다 늙었잖아.”

추수성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보고 말했다. 이에 강예와 맹서평이 연신 입을 삐죽거렸다.

다른 한쪽에서는 곽정과 곽성진 부자가 무엇인가 소곤거리고 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곽정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이제는 자리를 내주고 복을 누릴 때도 되었습니다. 쓸데없이 싸움터를 누비지 말고 그냥 아들자식이나 몇 명 더 보세요. 딸들이 그리 많은데 나중에 혼수가 곽씨 가문의 부담이 될지도 몰라요.”

“망할 자식! 그게 아버지한테 할 소리냐?”

곽정이 곽성진을 한 대 후려치고는 분노하며 소리쳤다.

곽성진은 머리를 매만지며 전혀 개의치 않고 허허 웃었다.

“다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만에 하나 아버지께서 싸움터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곽씨 가문에는 정말 남자가 저 혼자밖에 없다고요. 그래도 아직 정정하실 때 노력해 보시죠. 아니면 제가 좀 비법이라도 알려드릴까요?”

“불효막심한 자식, 썩 물러가거라.”

곽정이 크게 화를 냈다.

이때, 곽성진이 느물거리던 표정을 싹 거두어들이고 정색하며 말했다.

“아버지, 제가 곽씨 가문을 이끌어 가기는 아직 한참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준을 믿거든요. 아버지께서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곽씨 가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게 좋을 겁니다.”

곽정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네 재주로는 지금 형세를 그처럼 훤히 꿰지는 못했을 텐데, 누가 가르쳐 주더냐?”

“추억몽이요.”

곽성진이 씩 웃었다.

“역시, 계집애가 누구보다도 영리하단 말이야.”

곽정은 추억몽을 힐끗 보았다.

‘딸자식이 가득한데, 왜 추억몽만한 애가 한 명도 없지? 추수성은 딸이 하나뿐인데 저리 영리하고 약삭빠르니 말이야. 단번에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잖아.’

양준은 지금 장악하고 있는 힘을 내려놓기 싫어서 중도 8대 세가와 손잡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고 8대 세가의 가주들이 굽신거리며 양준에게 빌붙을 수도 없었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8대 세가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아닌가? 더욱이 지금의 가주들은 양준에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가주가 바뀐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다. 특히 중도의 젊은 세대 중에서 많은 이들이 양준과 교분이 있거나 안면을 튼 사이였다.

이를 테면 곽성진과 추억몽은 양준과 교분을 쌓은 사이였다. 그들이 두 가문을 이끌게 되면 떳떳하게 양준과 손잡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양준과 교분은 없어도, 다 같은 젊은 세대로서 아직 속셈이 많지 않아 서로 말하기가 쉬울 것이다. 겉보기는 소꿉장난 같지만 8대 세가에서 양준 관저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8대 세가의 가주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떠나갔다. 추억몽과 곽성진이 그들을 관저 밖까지 배웅했다.

*중도는 다시금 평온해졌다.

창운사지 무인들은 양준 관저가 나타난 다음부터 얌전해졌다. 8대 세가에서도 당연히 먼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양준은 사람을 죽이며 신식을 수련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찾지 못해 마음을 다잡고 관저에서 소안과 합환공을 수련했다.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는 것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다지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준 관저에 의탁한 각 세력들은 현 상태에 매우 만족했다. 그들은 중도로 지원하러 왔지만 그 누구도 창운사지의 무인들과 충돌이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며칠 뒤, 8대 세가의 가주들이 다시 양준 관저를 찾아와 그가 만족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추수성은 추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장녀 추억몽에게 물려주기로 하고, 그녀에게 곧장 추씨 가문 임시 거처로 돌아가 가주 취임식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이와 동시에 곽정도 가주 자리를 곽성진에게 물려주었다.

맹서평은 맹선의에게, 류초천(柳初泉)은 류경요에게, 강예는 강검(康劍)에게, 고묵은 고양현(高讓賢)에게, 엽광인은 엽경리(葉景離)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로써 7대 세가의 가주가 모두 바뀌었다. 그중 맹선의와 류경요는 양준과 구면이었다. 강검, 고양현, 엽경리는 양준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들 모두 젊은 세대 중의 뛰어난 이들이었다.

중도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창운사지가 북쪽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새로운 가주가 취임하는 것은 8대 세가에 있어 모두 중차대한 일이므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거창하게는 못 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는 기록에도, 전례도 없는 광경이었다. 대형 세력에서 단체로 가주가 바뀌며, 그것도 모두 젊은 세대 자제들로 바뀌었다.

젊은 자제들이 가주 직에 임하게 되면 중도의 대형 세가들은 모두 양준의 휘하에 모여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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