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79화 (578/853)

제 579장. 보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야

전투는 점심에 시작되어 이튿날 새벽까지 지속되었다. 양측은 사상자가 막대했다. 8대 세가와 양준 관저도 손해를 보았지만 창운사지 측은 기본이 흔들렸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창운사지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희망을 본 8대 세가와 양준 관저의 무인들은 점점 사기가 올라 용맹하게 싸웠다. 반면 창운사지의 무인과 요수들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8대 세가의 고수 몇 명과 싸우고 있던 선경라는 신비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양백이 갑자기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경라, 날 따라와!”

양백은 덤덤한 얼굴로 분부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둘러싼 채, 공격하고 있는 고수들에게 다짜고짜 공격을 날렸다.

초범 경지 3단계의 절정 고수가 출수하자 8대 세가의 고수들은 막아 낼 힘이 없어 피를 쏟으며 종이 인형처럼 나가떨어졌다.

선경라는 깜짝 놀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양백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양백은 손을 휘저어 자신과 선경라의 기운을 막았다. 그는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지, 차가운 얼굴로 아래쪽의 전쟁을 바라보기만 했다.

선경라는 양백을 바라보며 한참 기다렸다. 그러나 양백이 말하려고 하지 않자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원하시는 게 뭔가요?”

“원하는 게 뭐냐고?”

양백은 그녀를 힐끔 보았다.

“성지에서도 사상자가 많이 나왔어요. 사왕들도 점점 버거워하는 것 같은데, 주인님은 왜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건가요?”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그들의 생사가 나와 무슨 상관인데?”

양백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역시, 성지는 주인님께 바둑돌 정도밖에 되지 않는군요.”

선경라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드리웠다.

“주인님께서는 성지의 생사존망을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으셨어요. 우습게도 사왕들은 주인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8대 세가를 전멸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존재가 될 것이라 여기고 있죠.”

“그건 그들이 바라는 거지, 내가 말해 준 적은 없다.”

양백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저를 부르셨죠?”

선경라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옆에 여인이 있어야 하거든.”

양백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맑았다.

선경라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빈정거렸다.

“주인님께서 여인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나도 사내인데 당연히 여인이 필요하지.”

양백이 말을 이었다.

“허나 나에게 어울리는 여인은 세상에 너밖에 없어. 걱정하지 마. 너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니까. 여기서 나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돼. 혼자서는 외롭거든.”

“뭘 지켜보라는 거죠?”

선경라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야. 곧 알게 될 거야.”

양백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경라는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흥분을 읽을 수 있었다. 이는 예전의 그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너, 내 사질과 꽤나 깊은 사이 같던데.”

양백은 무심결인 척, 질문을 툭 던졌다.

선경라는 깜짝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전 이미 그의 여인이 되었어요.”

양백은 경악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부터 녀석을 잊어. 녀석이 대단하긴 하나 나를 따른다면 이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선경라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인님은?”

난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준 관저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공격당하고 있던 패천역왕의 불만에 찬 고함이었다. 그는 실력이 뛰어났지만 홀로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기엔 힘들었다. 그도 양준 관저의 고수들에게 맹공격을 당하다 보니 점점 버거워졌다. 성지의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는데도 양백이 나서지 않자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창운사지가 중도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양백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왕들이 어찌 죽음을 자초했겠는가?

“주인님은 우리를 버리기로 한 거야?”

귀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검은 구름이 그를 감싸고 있다가 사람 얼굴로 변하며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어 많은 무인들을 삼켰다. 다른 한쪽에서 절멸독왕은 독기를 마구 뿜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고수들이 둘러싸고 공격을 펼치자 그 역시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주인님은 우리를 버리기로 한 거야. 그게 아니면 왜 나서서 도와주지 않겠어? 진작 도망쳤을걸.”

“허튼소리!”

역왕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주인님이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가 있겠어? 분명 중도 전체를 멸할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하고 계실 거야!”

“멍청하긴!”

독왕과 귀왕이 동시에 경멸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사왕의 자리까지 오른 이들은 모두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이 깊고 교활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역왕은 힘만 세고 고집불통에 속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양백이 중도 전체를 멸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백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사왕들뿐만 아니라 8대 세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들 양백을 찾아보았지만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초범 경지 3단계의 고수가 설치한 방어막이 쉽게 들킬 리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양백이 수세에 몰리자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준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곧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더는 신유 경지 고수가 죽은 뒤에 흩어져 나온 신식의 힘을 흡수하지 않고 8대 세가의 전임 가주들을 찾아갔다.

접전을 치른 전임 가주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 접전에서 창운사지를 완전히 전멸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양준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백부님!”

양준은 양응호의 앞으로 다가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양백이 왜 중도를 대거 침범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양응호는 그 말에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뜻이냐?”

양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겉보기엔 지난번 8대 세가에서 창운사지를 토벌한 일로 양백과 6대 사왕이 원한에 차서 복수하는 것으로 보이죠. 이 이유가 말이 되기도 하고요. 8대 세가와 창운사지는 오래도록 원수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서로 간의 원한은 풀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요. 하지만 전 어쩐지 양백이 이 이유로 중도를 공격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공하더라도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 텐데 왜 굳이 공격했겠습니까? 아마도 8대 세가에 그가 눈독들일 만한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전임 가주들은 하나같이 생각에 잠겼다. 서로들 한참이나 마주 보다가 엽광인이 말했다.

“그가 눈독 들일 만한 것이라면 양씨 가문의 비밀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8대 세가는 저력이 있다고는 하나 양백 같은 인물이 욕심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말한 것이 신근전의 비밀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양백이 원하는 것이 신근전이라면 그나마 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겁니다. 만약 양씨 가문의 비밀을 탐낸 거라면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쳐들어왔겠지요.”

창운사지가 초반에 보여준 전투력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어느 쪽으로 공격을 시작했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양백이 탐낸 것이 정말 양씨 가문의 신근전이었다면 분명 남쪽으로 쳐들어왔을 터였다. 게다가 신근전의 비밀은 양씨 가문의 역대 가주와 곧 죽게 될 초범 경지의 고수들만 알고 있는데 양백이 어디에서 정보를 알아내겠는가?

“가문에 양백이 탐낼 만한 것이 있는 게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양준은 여덟 명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들은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상황이 이런데 정말 가문에 양백이 욕심낼 만한 것이 있다면 숨길 리가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양준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그렇다면 양백이 중도에 쳐들어온 목적이 뭘까?’

바로 이때, 줄곧 느껴지지 않던 양백의 기운이 갑자기 공중에서 느껴졌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양백이 공중에 뜬 채로 싸늘하게 중도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우레와 같은 폭소를 터뜨렸다.

모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행동을 멈추고 소리를 따라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되었다.”

양백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더니 가볍게 말했다.

양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몰려왔다. 양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대 세가라… 참 우습군. 개미 같은 존재들이 이렇게 자칭하다니. 사질, 넌 대단하긴 하나 멀리 내다볼 줄은 모르는군. 오늘 내가 가르쳐 주지. 이 세상은 보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야. 세상 밖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어. 네가 모르는 것도 아주 많지. 그래도 너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오늘 전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테니. 그러면 꽤나 골치 아팠을 거야.”

양백은 공중에 뜬 채, 여유로운 얼굴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세상 사람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오만방자한 모습이었다.

양준은 의아한 얼굴로 양백을 바라보았다. 그는 양백의 말에서 특별한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양백이 세상 밖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그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양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사왕들아, 날 보호하라!”

역왕은 주저없이 양백에게 재빨리 뛰어갔다. 그러나 독왕, 귀왕, 영왕, 수왕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양백은 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훑어보더니 나지막하게 웃었다.

“왜?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냐?

독왕이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어제 싸움이 시작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왜 나서지 않으셨습니까? 성지는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죽어야 하니까! 사람이 죽지 않으면 내 목적을 이룰 수 없어.”

양백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독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공수하며 말했다.

“몸 조심하십시오. 저희들은 더 이상 주인님의 장단에 맞춰 주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양백을 따라 중도로 쳐들어와 함락한 다음, 그 자리를 대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희망이 전부 사라진 데다 양백이 무정하고 의리도 없는데 사왕들이 남아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이기적이고 교활한 사람인지라 충성심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을 마친 독왕, 귀왕, 영왕, 수왕은 떠날 준비를 했다. 양백이 휘하의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데 그들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자신만 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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