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4장. 반년이 흐르다
전쟁은 창운사지의 참패로 끝났다. 4대 사왕은 죽었고, 사주 양백은 실종된 채로 반년이 흘렀다. 지난 반년 동안 중도는 재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그날 전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중도 전체가 아래로 몇십 장 내려앉았다. 지금의 중도는 멀리서 보면 산골짜기에 위치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건물은 수없이 무너졌고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천행궁의 보호를 받고 있는 양준 관저만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전쟁에서 8대 세가의 전임 가주들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들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다. 8대 세가가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양준도 실종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금방 떠오르기 시작한 중도의 샛별이었다. 계승 싸움이 시작되어서부터 남다른 빛을 발하며 매번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냈다. 양준은 자신의 조력자들과 함께 다른 양씨 가문의 공자들과 겨뤘고, 또한 8대 세가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8대 세가를 이끌고 창운사지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는 이미 전설급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양씨 가문의 임시 가주가 실종되자, 커다란 양씨 가문은 둘째인 양소가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다른 일곱 명의 젊은 가주들과 함께 중도의 재건에 몰두했다.
중도가 다시 재건되려면 적어도 십수 년이 걸릴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날 이후로 중도는 영기가 넘치며 수련하기 적합한 곳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문파와 가문의 제자들이 중도에 도움을 주러 찾아왔다. 그들은 중도의 재건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수련에도 열중했다.
추억몽은 서글픈 눈빛을 하고서 폐허에 홀로 조용히 서 있었다. 이윽고 곽성진이 그녀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그동안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그는 추억몽과 나란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나쁜 인간은 명이 길어. 너무 걱정하지 마. 양준은 분명 어디에 숨어 몰래 이곳을 훔쳐보고 있을 거야.”
추억몽이 중얼거렸다.
“그럴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걸까? 반년이나 지났는데.”
곽성진은 침묵했다.
양준이 정말 무사하다면 진작에 나타났어야 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양준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양준의 행방이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관저에 있던 몽무애, 능소각의 소안과 하응상, 심지어 지마도 모두 종적을 감췄다. 그때의 변고와 함께,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졌다.
추억몽은 물어볼 상대도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양준은 혹시 이미 죽은 게 아닐까?”
그녀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양준이 죽었다고? 양준이 죽었다면 세상에 죽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네 자신이나 잘 가꿔. 걔가 돌아오는 날, 그에게 예쁘게 보이려면 말이야.”
곽성진은 키득키득 웃더니 다시 시선을 폐허로 돌렸다. 그의 눈빛도 망연해졌다.
‘양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죽었다면 됐어. 다들 널 찾으려는 생각을 접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죽지 않았다면 얼른 뛰쳐나와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많은 사람들이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내 곽성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쩐지 그의 기분도 우울해졌다.
*이른 새벽, 고운도.
고운도는 바다 건너에 있는, 많지 않은 일등 세력 중 하나였다. 문파는 휘하에 크고 작은 섬을 열몇 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영기가 넘치고 천재지보도 많았다. 그 덕분에 문파의 제자들도 창창한 앞날을 그리며 열심히 수련했다.
고운도의 세력은 태일문보다 못했지만. 이는 단지 초범 경지의 고수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몇 년 전에 잃어버린 지 삼백 년 된 문파의 보물 화생파월공을 되찾은 뒤로 도주 고풍은 제자들의 경지를 올리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질이 뛰어난 제자들이 초범 경지에 올라 태일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청량한 해풍이 솔솔 불어왔다.
고운도의 최우수 제자 종묘가는 하룻밤 내내 가부좌를 틀고 폐관 수련을 하다 눈을 떴다. 그녀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뒤, 세수를 마치고 걸어 나갔다. 곧이어 초라한 방 앞에 도착한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사제, 사제, 일어나!”
방문이 열리며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상대의 그윽하고도 갖은 풍파를 겪은 듯한 눈과 마주치자 종묘가는 순간 넋을 놓았다.
그녀는 젊은 사제가 왜 이토록 많은 일을 겪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표정과 태도 그리고 일 처리 방식은 전혀 젊은 사람 같지 않았다. 게다가 가끔씩 내뱉는 그의 말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었다.
“사저, 좋은 아침이에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종묘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자는 줄 알았어. 얼른 준비해. 오늘 장로님이 공작새를 보러 오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그 녀석들을 씻겨야 해. 안 그러면 장로님에게 혼날지도 몰라.”
“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가 준비했다.
이곳은 고운도 구석에 있는 외딴 섬이었다. 종묘가의 일은 고귀한 공작새 몇 마리를 돌보는 것이었다. 공작새는 진귀한 요수가 아닌 일반 공작새였는데, 고운도의 장로 한조의 소유였다.
한조는 신유 경지 7단계로 경지가 높지도, 낮지도 않았으나 고운도에서는 소문난 사랑꾼이었다. 공작새들은 그의 부인이 기르던 것으로 부인이 세상을 뜨자 한조는 공작새들을 보물로 여기며 키우고 있었다. 또 일부러 공작새를 돌볼 인원을 배치하기도 했다.
종묘가와 함께 공작새가 있는 곳에 도착한 양준은 맑은 물을 떠온 다음, 고귀하고 도도한 공작새 깃털에 묻은 오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이전에 본 적 있는 섬과 눈에 익은 곳들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무너진 허공 통로를 통해 이곳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반년 전, 종묘가는 고운도 근처의 바다에서 그를 건졌다.
무너진 허공 통로는 하마터면 그의 몸을 조각 낼 뻔했다. 뼈 방패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죽었을 것이다. 보름 남짓 치료를 받고 나서야 겨우 상처가 조금씩 호전되었다. 양준은 급히 중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쪽은 이미 상황이 마무리되었을 테니 돌아가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을 터였다. 오히려 마음 편히 이곳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았다.
종묘가는 한조에게 부탁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양준을 고운도의 기명(記名)제자로 들이고, 자신과 함께 공작새를 돌보게 했다.
‘정말 인연이네!’
전에 그는 고운도에 온 적이 있었다.
“사저는 문파의 최우수 제자이니 더 좋은 곳에서 수련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계속 여기 남아서 공작새를 돌보는 겁니까? 인재를 썩히는 거 아닌가요?”
양준은 느긋하게 움직이며 종묘가에게 말을 걸었다.
“응.”
종묘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그녀와 함께 일을 하니 따분하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마음씨가 아주 착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를 바다에서 끌어내지 않았을 테고, 장로에게 부탁해 고운도에 제자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양준을 바다에 빠진 어민으로 알고 있었다.
“도주와 몇몇 장로님들도 내가 신풍도(神風島)에서 수련하기를 바라. 그곳의 영기는 이곳보다 훨씬 더 강하거든. 하지만 난 가고 싶지 않아.”
“왜요?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야죠. 설마 공작새들과 떨어지기 아쉬워서 그러는 건 아니죠?”
양준은 히죽 웃으며 농을 던졌다.
“당연히 아니지.”
종묘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한참 뒤에야 말했다.
“난 은혜를 갚으려고 남은 거야.”
“은혜를 갚는다고요?”
양준은 깜짝 놀랐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난 예전에 문파에서 중용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어. 신분도 낮아서 다들 날 괴롭혔지.”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황이 바뀐 거야.”
종묘가는 말하면서 허리를 펴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서 공작새에게 먹이를 주려고 하는데 문에 비수가 박혀 있는 거야. 비수 끝에는 서신이 있었고.”
“서신이요? 뭐라고 쓰여 있었는데요?”
양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글 한 줄과 누런 책장이 있었어. 나더러 물건들을 도주와 장로들에게 전하라는 거였어.”
그녀의 얘기를 듣던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그 상황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대로 했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게? 도주와 장로님들은 서신의 지시대로 운하종에서 잃어버린 지 삼백 년이나 된 화생파월공을 되찾았지 뭐야! 그 일로 도주는 나에게 상을 내리며 단약방에 가서 단약도 왕창 받게 하고, 온령동에서 일 년 동안 수련을 하게 허락해 주셨어. 그래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게 된 거야!”
종묘가는 조잘조잘 얘기했다. 뒤로 갈수록 그녀는 점점 흥분해 눈에서 이채를 뿜었다.
“그 서신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 분명 전처럼 남들의 괴롭힘과 무시를 받았을 거야. 나도 누가 그 서신을 내 방문에 꽂아 놓았는지 알지 못해. 하지만 그 사람 덕분에 내 지위가 변했어. 그에게 감사해. 진심으로 말이야!”
양준은 저도 모르게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그는 얼굴을 씰룩이며 말했다.
“참 묘한 일이네요.”
“그러게.”
종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묘한 일이지. 이렇게 큰 고운도에서 어쩌면 서신이 딱 내 방문에 나타났는지. 그래서 난 최우수 제자가 되었어도 다른 곳에 가고 싶지 않아. 난 이곳에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거야.”
“기다려서 뭐 하시게요?”
양준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직접 감사하다고 말할 거야.”
나지막하게 말하던 종묘가는 쑥스러운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만 원한다면… 그에게 시집갈 거야.”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잖아요.”
종묘가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여인이라면… 동생이 되어서 평생 그녀의 말을 들을 거야. 만약 남자라면… 히히…….”
그녀는 말하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양준이 다급히 말렸다.
“어쩌면 그 자는 이미 처와 첩실이 가득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아주 흉악하고 나쁜 사람이라든가, 또 뚱뚱하거나 못생겼을 수도 있고,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인 잔혹한…….”
“그를 욕보이는 말을 하지 마!”
종묘가는 잔뜩 화난 얼굴로 양준을 노려보았다.
“뭐가 되었든 나에게 기회를 줬어. 나에게 그는 가장 좋은 사람이야.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 난 반드시 그를 따라 떠날 거야!”
양준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아마 평생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