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85화 (584/853)

제 585장. 얘는 도대체 누구지?

“사제, 그게 무슨 뜻이야?”

종묘가는 위험한 기운을 내뿜으며 양준에게 다가가더니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내가 그의 눈에 차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양준은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럼 내가 못생겼다는 얘기겠구나! 난 예쁘지는 않지만, 그의 시녀가 되기엔 충분하지 않겠어?”

“그건 되죠!”

양준은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그럼 됐어. 하하!”

종묘가는 만족해하며 더 이상 양준을 괴롭히지 않고 다시 일을 지시했다.

“빨리 공작새를 씻겨. 이따가 한 장로님이 오실 거야.”

고개를 끄덕이려던 양준은 순간 표정이 변하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저!”

양준이 불렀다.

“왜?”

종묘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양준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더니 잠이 마구 쏟아졌다. 이내 그녀의 몸이 나른하게 무너져 내렸다.

양준은 한 걸음 내디뎌 그녀를 안아 방으로 옮긴 뒤, 문밖을 나섰다.

곧이어 날씬한 두 그림자가 양준의 앞에 나타났다. 앞선 이는 요미여왕 선경라였다. 그녀는 세상 모든 여인의 아름다움을 한 몸에 모아 놓은 것 같았다. 그녀의 뒤를 따른 사람은 당연히 벽락이었다.

양준을 한참 바라본 선경라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나쁜 자식, 중도 전체가 널 걱정하면서 네 행방을 찾아 헤매는데 넌 여기서 여자나 건드리고 말이야. 역시 본성은 못 고치는구나!”

그녀는 나무라는 말투로 양준을 탓했다.

“내가 언제? 날 능멸하지 마.”

양준은 버럭 화를 냈다.

“대인, 이 자를 죽여서 끝을 봅시다!”

벽락은 새끼 호랑이처럼 손톱을 드러내며 양준에게 으르렁거렸다.

양준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난 오랫동안 여인을 건드리지 못했어!”

벽락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선경라의 뒤로 모습을 숨겼다. 그녀는 짐짓 엄포를 놓았다.

“대인이 계시는데 방자하게 굴지 마시죠!”

“그만해.”

선경라는 그녀를 꾸짖고 나서 앞으로 다가오더니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어. 나만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 나쁜 녀석, 사람을 걱정시키기나 하고.”

양준의 몸속에는 선경라가 심어 둔 추혼인이 있었다. 그의 지금 실력으로는 얼마든지 그것을 부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경라가 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소녀는 어찌 된 일이야?”

선경라가 경계 어린 말투로 물으며 방 안을 힐끔거렸다.

“인연이 좀 있어. 그녀가 날 구해 준 거거든.”

양준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같이 잔 건 아니지?”

선경라는 입가에 애매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심심해 보여?”

양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중도는 어떻게 됐어?”

“네가 실종된 것만 빼면 다들 잘 지내. 하필이면 너와 친한 사람들도 같이 실종되어서 상황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으니 많이 당황하고 있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그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선경라는 양준에게서 슬픈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그와 함께 실종되었던 사람들도 생명에 지장이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날… 중도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양백은?”

선경라는 머뭇거리다가 긴장된 말투로 물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양준은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다만 양백은 죽었어.”

“죽었어?”

선경라의 눈에 기쁨과 흥분의 빛이 흘러넘쳤다.

“응, 죽었어. 내가 직접 봤어.”

양준이 씨익 웃었다.

벽락은 두 손을 꽉 움켜쥐며 흥분에 넘쳐 말했다.

“너무 속시원해!”

“양백은 죽었고, 넌 무사한데 왜 반년이 지나도록 중도로 안 돌아가고 이곳에 남아 있는 거야?”

선경라는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뭘 피하려고 이러는 거야?”

“피하려는 게 아니야.”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중도로 돌아간다면 난 그곳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거야. 추억몽이나 다른 7대 세가의 가주들도 나만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잃겠지. 하지만 내가 없다면 그들은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훌륭한 8대 세가의 가주로 성장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양준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반년이 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중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야?”

선경라는 양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양준도 부인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이곳을 떠날 건데 그들이 나한테 너무 기대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내가 떠난 뒤, 그들에게도 좋지 않을 거 아냐?”

“어디로 갈 건데?”

선경라는 초조한 모습으로 물었다. 왠지 이번에 양준이 떠나면 평생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시큰거렸다.

“때가 되면 말해 줄게. 네가 찾아왔으니 나도 중도로 돌아가 봐야겠어.”

양준은 미소를 지었다.

말을 마친 그는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한 장로님, 오셨으면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선경라는 생긋 웃으며 여유 있는 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한조는 진작 도착해 있었다. 선경라가 도착하자마자 그도 이곳에 왔던 것이다. 하지만 고운도에 갑자기 선경라 같은 요염한 여인이 나타나자, 그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어 몰래 숨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선경라의 신분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진작 들켰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조는 그제야 상대방의 실력이 그보다 한참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한눈에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챌 수 있겠는가?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려 도망칠 준비를 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경고해 주기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

양준은 하는 수 없이 선경라에게 눈치를 주었다.

선경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거미줄 같은 기운이 쏘아지며 공중으로 뛰어오른 한조를 묶었다.

퍽-

한조는 땅에 떨어지며 진원도 봉인되었다. 다시 일어선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신유 경지 이상?”

한조는 신유 경지 7단계였다.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도 이처럼 단숨에 그의 진원을 봉인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신유 경지 이상밖에 없었다.

선경라의 경지를 짐작한 그는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여인이 왜 갑자기 고운도에 나타났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양준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앞에서 삼 장 되는 위치에 멈춰 서서는 평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풀어줘.”

양준이 선경라에게 말했다.

선경라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의념을 발동했다. 그러자 한조를 묶은 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조는 경계 어린 얼굴로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상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자 그는 긴장을 늦추고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 우리 고운도에 오신 겁니까?”

“절 찾으러 온 겁니다. 쟤가 고운도에 나쁜 짓을 할 리 없으니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양준이 대답했다.

“널 찾으러 온 거라고?”

한조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눈앞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명제자를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양준은 고운도에 들어온 뒤로 줄곧 평범하게 행동했다. 수련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 한조는 그가 그냥 어부인 줄 알고 있었다. 종묘가의 간곡한 부탁에 하는 수 없이 그가 고운도에서 지내며 공작새를 돌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게다가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는 양준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얘는 정체가 뭐지?’

다시 양준을 바라보자,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말하는 사이, 먼 곳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조의 신호를 듣고 고운도의 도주 고풍과 몇몇 장로들이 건너온 것이었다.

고풍은 거칠게 생긴 데다 몸집도 커서 사나운 인상을 풍겼다. 그는 신유 경지 정상에 이르는 고수였다. 다른 장로들도 대부분 신유 경지 8, 9단계의 고수였다. 이들은 고운도의 주춧돌이자 가장 강한 고수이기도 했다.

“한 장로, 무슨 일인가?”

고풍이 도착하자마자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다른 장로들도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한조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풍은 눈앞이 밝아져 뜨거운 시선으로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설레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여인이 있단 말인가?”

고풍뿐만 아니라 다른 장로들도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선경라의 요염함은 남자라면 혹할 수밖에 없었다.

고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한 장로, 어디서 거둔 여인인가? 내가 거두어서 첩실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러면서 선경라에게 달려들었다.

“안 됩니다!”

한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저지했다.

퍽-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고풍은 비명을 지르며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근처의 바다에 빠져 물보라를 일으켰다. 누구도 그가 어떻게 날아간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은연중에 선경라의 손이 살짝 움직인 것만 보았을 뿐이었다.

“신유 경지 이상?”

장로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더는 선경라를 얕보지 못했다.

한조는 입을 떡 벌린 채, 고풍이 떨어진 곳을 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끝장났군! 도주가 신유 경지 이상을 건드리다니. 오늘 고운도는 피로 물들고 멸문될 거야.’

“장로님들, 또 누가 제 여인한테 불손한 마음을 품는다면 날라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양준은 앞으로 성큼 나서며 싸늘한 시선으로 고운도의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딱딱딱 울려 퍼졌다. 잠시 후 한조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동시에 마음속 의문은 더 커졌다.

‘이 소년이 지금 요염한 여인을 자신의 여자라고 했나? 여인도 부인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다시 몰래 선경라를 훑어보니,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감히 묻습니다만, 귀하께서는 무슨 일로 저희 고운도에 오신 겁니까?”

한조는 서늘한 가슴을 부여안고 용기를 내 물었다. 상대는 반년 전에 고운도에 잠입했다가 오늘에서야 흉악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원하는 게 뭐지? 고운도에 이런 인물이 탐낼 만한 것이 있었나?’

다른 장로들도 불안하고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은 바다에 빠진 도주를 구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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