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6장. 눈치 없는 것들아
양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 그저 조난당해서 이곳으로 온 것일뿐, 고운도를 어찌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 장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원순을 만나고 싶은데, 혹시 그를 찾아 주실 분이 계십니까?”
“이원순?”
한조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놀라서 소리쳤다.
“태일문의 이원순 대협?”
“그렇습니다. 그는 이미 태일문으로 돌아왔겠지요?”
양준이 물었다.
“이원순과 바다 건너 각 문파의 사람들은 널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전쟁이 끝나고 한 달 뒤, 중도를 떠났어.”
선경라가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해 주었다.
“돌아왔으면 됐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조를 바라보았다.
한조는 식은땀이 흘렀다.
“저는 지금 당신의 진실된 신분조차 모르는데 어찌 이 대협을 뵈러 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태일문 같은 큰 세력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이 대협은 덕망이 높으신 분이라… 아마도 모셔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대협께 용건이 있다면 직접 태일문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는 양준을 고운도에서 빨리 내쫓고 싶었다.
“그저 양준이 뵙기를 청한다고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오든 말든 그가 알아서 하겠지요.”
“어서 가지 않고 뭐해요?”
선경라가 눈을 부릅뜨고 일갈했다.
“네……!”
한조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한 뒤, 태일문으로 날아갔다.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은 압박감이 너무 심해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보고 들은 소식은 이미 그의 이해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날아가던 중 찬바람이 불자 한조는 그제야 자신의 등이 땀에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조가 떠난 뒤, 남은 장로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때, 영리해 보이는 장로가 나서며 말했다.
“한 장로가 돌아올 때까지 대협께서는 양신전(養神殿)으로 가셔서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들도 손님 접대를 제대로 해야지요.”
“그러지요.”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가시지요.”
*양신전,
양준은 상석에 앉고 선경라와 벽락은 시녀처럼 양준의 양쪽에 서 있었다. 고운도의 장로들은 아래쪽에 앉아 조심스러운 얼굴로 앞만 바라보며 단정하게 있었다.
시녀가 차를 가져오자 장로들은 인사치레로 몇 마디 하다가 양준이 입을 열지 않자, 하나같이 침묵만 지켰다.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다들 커다란 압박감을 느꼈다. 그들은 물끄러미 문만 바라보며 한조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무려 두 시진이나 기다렸지만 한조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장로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손바닥이고 발바닥이고 모두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억지로 이곳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전 밖에서 고풍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는 겁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에 그는 선경라에게 딴마음을 먹었다가 그녀의 가벼운 초식에 나가떨어져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바닷물을 잔뜩 먹은 뒤 고운도에 돌아온 다음에야 그 여인이 양신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고풍은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고민에 잠겼다. 눈치 없이 그런 여인에게 딴마음을 품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창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문득 두 개의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한조와 태일문의 이원순이 날아오고 있었다. 고풍은 크게 기뻐하며 경모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원순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상대방의 호통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고풍, 간도 크구나!”
“네?”
고풍은 깜짝 놀랐다. 이원순이 왜 오자마자 자신을 이렇게 꾸짖는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이원순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는 인정사정없이 그의 뺨을 철썩철썩 열몇 대나 갈겼다. 고풍은 머리가 어질했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흠! 이건 약간의 교훈이라고 여겨라!”
이원순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널 어떻게 처리할지는 공자의 기분에 달렸다. 무사히 살아남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대협……!”
고풍은 퉁퉁 부은 얼굴을 매만지며 의아한 눈길로 이원순을 바라보았다. 이원순이 고운도에 온 이상, 같은 바다 건너 세력으로서 자신의 편을 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원순이 요염한 여인과 맞선다면 상대도 어찌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원순은 오자마자 자신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때리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풍은 원망하거나 분노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태일문이야말로 가장 큰 문파였다. 태일문에 있는 신유 경지 이상의 세 명은 전설 같은 인물로, 일반인들은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이원순이 오늘 직접 고운도에 왔으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한조는 눈앞의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방금 전, 태일문에 가서 이원순을 찾을 때, 그의 예상대로 문밖에서 가로막혔다. 그가 아무리 말을 늘어놓아도 태일문의 제자는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한조는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쳐들어가다가 태일문의 고수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태일문의 장로들도 나와 상황을 살폈고, 한조는 이때다 싶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러자 상황을 파악한 누군가가 다급히 한조를 풀어주고 이원순을 불러왔다.
중도에 갔던 사람들 중에 고운도의 제자는 없었다. 문파의 보물인 화생파월공을 이미 찾았기에, 그들은 중도로 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태일문의 사람들은 중도에 갔었다. 고운도 사람들은 양준과 선경라의 신분을 몰랐지만 태일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원순은 양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는 오는 길 내내 한조가 두서없이 말하는 바람에 큰일을 놓칠 뻔했다고 꾸중했다.
이원순이 이처럼 진지한 태도를 보이자, 한조는 그제야 양준과 선경라의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지금 고운도의 도주까지 이원순에게 맞지 않았는가. 두 남녀가 이원순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신분인 거지?’
“나를 따라 들어오너라!”
이원순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는 앞장서 양신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풍은 얼굴을 감싼 채,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이원순의 뒤를 따랐다. 한조도 코를 훌쩍이고는 뒤따랐다.
대전 안,
안에 있던 사람들도 바깥의 기척을 다 들을 수 있었다. 고운도의 장로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주를 때린 사람이 이원순이기에 그들도 감히 원망하지 못했다. 다시 양준과 선경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전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공손해졌다.
양준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원순이 고풍을 쥐어 팬 것은 자신의 울분을 풀어주는 동시에, 고풍을 감싸기 위해서였다. 이원순은 양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이 일로 고운도 전체를 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맞는 게 체면이 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 나았다.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원순이 괜한 짓을 했어. 난 그 일을 따질 생각이 없었는데.’
호탕한 웃음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더니 이원순이 빠른 걸음으로 양신전에 들어섰다. 양준과 선경라를 본 그는 눈을 반짝이며 기쁨에 겨워 말했다.
“정말 양 공자께서 온 거였군. 양 공자의 실력으로 이렇게 일찍 죽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공자가 무사한 것을 보게 되니 마음이 놓이는군.”
“이 대협의 걱정 덕에 제가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양준은 일어서며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선 낭자!”
이원순은 이어서 선경라에게도 공수했다.
“어르신.”
선경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예를 올렸다.
양준과 이원순이 오래된 친구처럼 안부를 묻는 것을 보고, 고운도 장로들의 표정이 이상해지며 서로 힐끔힐끔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원순은 이곳에서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고풍 같은 인물도 그를 만나면 굽신거리기 마련인데 이 젊은이는 평온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그와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 눈치 없는 것들아! 공자가 어떤 인물인지 아느냐?”
이원순은 또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
“이 대협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분은 바로 중도 양씨 가문의 직계 공자이자 양씨 가문의 가주이시다.”
“중도 양씨 가문?”
놀라움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양준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달라졌다.
“지난번 내륙으로 갈 때, 너희 고운도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쪽의 구체적인 상황을 모를 것이다. 이건 너희들을 탓할 것이 못 되지. 하지만 너희들도 중도 양씨 가문에 대단한 인재가 나타났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 않느냐? 그분이 바로 너희들 앞에 있는 공자시다.”
이원순은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분의 휘하에는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가 스무 명이 넘게 있지. 그런데 너희들은 양 공자를 기명제자로 들이고 공작새를 기르게 했다면서? 그 공작새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감히 양 공자더러 사육하게 한 것이냐? 한조, 네 죄를 알겠느냐?”
한조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다급히 앞으로 나서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전 양 공자가 그런 분인지 몰랐습니다. 전 그저 평범한 어부인 줄 알았습니다.”
“어부인 줄 알았다고? 식견이 좁구나!”
이원순은 냉소를 금치 못했다.
“이 대협, 화 푸십시오.”
한조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마음을 모질게 먹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좀 이따가 제가 직접 공작새들을 죽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신분을 숨기고 이곳에서 반년 동안 편한 생활을 즐겼을 뿐입니다. 한 장로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양 공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조는 감격에 목이 메었다. 공작새들은 귀한 동물이 아니지만 한조에게는 목숨보다도 귀한 존재였다. 그도 공작새들을 죽이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런데 양준이 이렇게 감싸주자, 그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양 공자가 이리 말씀하니 나도 네 책임을 묻지 않겠다. 고풍, 이리 오너라.”
이원순은 고개를 돌리고 고운도의 도주를 노려보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풍은 이원순의 말에 먼저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시인했다.
“때리든, 벌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말하면서 위쪽에 있는 선경라를 힐끗 보았다. 순간 몸을 흠칫 떤 그는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