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587화 (586/853)

제 587장. 주인에게 돌려주다

이원순은 실소하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화가 풀릴 거라 생각하느냐? 내가 보기엔 넌 도주 노릇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정말 하기 싫다면 그렇다고 말하거라. 네 말 한마디면 내가 직접 보내 주겠다.”

고풍은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 사소한 일이니 굳이 추궁할 필요 없습니다.”

양준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도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가 신분을 숨긴 채, 이곳에서 반년을 머물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풍이 눈치가 없긴 했지만 그의 화를 돋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원순은 그제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니 없던 일로 합시다.”

고풍이 다급히 말했다.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말하지 않고 이원순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이 대협을 왜 불렀는지 알고 계시죠?”

이원순은 기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다마다! 양 공자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왜 이곳에 왔는지 짐작했네. 역시 신용을 지키는 이였어. 각 문파를 대신해 양 공자의 은혜에 감사드리네.”

“별말씀을요. 전에 위기를 넘기면 모든 물건을 돌려드리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게나.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제자를 시켜 다른 문파들에 소식을 전했네. 반나절이면 다들 이쪽으로 올 것일세.”

“급하지 않습니다.”

양준은 미소를 지었다.

작은 오해가 풀리자 양신전의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고운도의 장로들은 양준이 쥔 무시무시한 힘을 알게 되자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시켜 술상을 차리게 하고 축배를 들었다.

양준도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마셨다. 선경라와 벽락도 술을 마셨다. 선경라는 술 몇 잔을 마신 뒤, 더욱 빛을 발하며 짙은 요염함을 풍겼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다른 문파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수라문의 야방, 낙화교의 화단혼, 적련종의 서천호, 운룡도, 쌍자도……. 지난번에 중도에 갔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고풍은 상황을 살피다가 이쪽 유명 인사들이 모두 공손한 태도로 양준을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앙금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들은 이쪽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도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조차 양준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고풍이 무슨 자격으로 텃세를 부리겠는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고풍은 그제야 화생파월공을 찾게 된 것도 모두 양준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더 할 말이 없었다. 삼백 년 동안 찾지 못했던 보물을 양준이 찾아 주었으니 고운도가 그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양준은 태일문의 태일인, 낙화교의 천예혈해당, 수라문의 수라검, 적련종의 장문 옥패, 운룡도의 운룡전장(雲龍典藏), 쌍자도의 회생도(回生圖) 등을 하나하나 꺼냈다.

모든 사람들의 숨결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각자 문파의 보물을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양준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물건을 하나하나 돌려주었다.

“수라검과 천예혈해당은 흡수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건드리지 않았고요. 만약 걱정이 되신다면 얼마든지 살펴보십시오.”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문제없네! 양 공자가 하는 일인데 걱정이라니?”

이원순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물건들은 등급이 모두 높지 않아 양준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의심치 않았다. 다른 이들도 양준을 믿으므로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잃어버린 지 삼백 년이나 된 문파의 보물을 찾게 되자 다들 감지덕지하며 양준에게 인사했다.

“양 공자, 우리 각 문파에서 공자께 큰 빚을 졌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우리 쪽에 말해 주시게. 다른 건 몰라도 이 자리에 있는 문파들은 반드시 부름을 받는 순간 뛰어갈 것일세.”

이원순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양준이 잃어버린 지 오래된 보물을 찾아 줘 고마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양준의 잠재력을 높이 샀다. 바다 건너와 내륙은 별로 연계가 없지만 양준과 교분을 쌓아 두는 것도 나중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다.

“그때가 되면 정말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지.”

“일이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양준은 일어서며 갈 준비를 했다.

이원순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냥 간다고? 양 공자를 태일문에 초청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은 고마우나 창운사지와의 전쟁 이후로 전 줄곧 중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가보고 싶어서요.”

“그렇군…….”

이원순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더 잡지 않겠네. 나중에 기회가 되어 이곳에 오면 꼭 태일문에 오게나.”

“네, 그러겠습니다.”

양준이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양준을 따라 양신전을 나섰다. 고운도의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수군거렸다. 무슨 큰일이 생겨 이렇게 큰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양준을 본 고운도의 제자들은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양준을 본 적 있었다. 또 양준이 장로 한조를 도와 공작새를 키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평범한 기명제자가 왜 갑자기 고수들이 떠받드는 귀빈이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고수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다들 양준에게 매우 공손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소녀가 망연한 얼굴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제자들이 한쪽에 몰려 있는 것을 본 그녀는 호기심에 구경하려고 뛰어왔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과 반년 남짓한 시간을 보낸 사제가 여유로운 얼굴로 각 문파의 큰 인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소녀는 큰 눈을 깜빡이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인파 속에서 뛰쳐나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이원순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운도의 젊은 여제자가 왜 뛰쳐나왔는지 알 수 없어 고풍에게 눈치를 주었다.

고풍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례하게 굴지 말고 썩 비켜라!”

종묘가는 반쯤 넋이 나가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고풍에게 질책을 당하자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물끄러미 양준을 바라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제… 왜… 왜……?”

입을 뗀 지 한참 지났지만 온전한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선경라는 생긋 웃으며 여유롭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준이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지 궁금했다.

“무엄하다!”

고풍은 조급해졌다. 양준의 실제 신분을 몰랐으면 괜찮았다. 중도 양씨 가문의 가주를 일반인으로 착각해 공작새를 기르는 기명제자로 받아들이다니, 이는 고운도의 절대적인 실책이었다. 그리고 양준의 실제 신분을 알게 된 지금, 그는 양준이 떠나는 동시에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고운도에 남은 양준의 모든 흔적을 없앨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종묘가가 튀어나오더니, 거기에다 양준을 사제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게 무슨 일이야!’

“여봐라, 당장 이 아이를 잡아 창염동(蒼炎洞)에 보내거라!”

고풍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종묘가는 온몸에 힘이 풀리며 하마터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창염동은 온도가 아주 높은 곳으로, 신유 경지의 고수라도 그곳에서 살기 힘들었다. 그녀의 실력으로 창염동에 갇힌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고온에 말라 죽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심결에 한 행동 때문에 도주가 이토록 화를 내며 엄벌을 내릴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순간 놀라움과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내 고운도의 제자들은 명령을 받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평소에 종묘가를 무시하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묘가는 그때 그 기연이 없었다면 지금도 그냥 가장 말단의 일반 제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이 남겨 준 서신 덕에 공을 세워 최우수 제자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다. 그들은 종묘가의 자질과 재능이 최우수 제자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사고를 치자 그들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눈치챈 양준은 마음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반년 동안 종묘가가 그에게 남겨 준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착하고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다. 평소 그녀는 공작새를 기르는 곳에서도 수련에 열중했다. 자질이 뛰어나지 않고 재능도 없으나 꾸준한 노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화는 났지만 이곳은 결국 남의 세력 범위인지라 양준도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저와 종묘가는 사저와 사제의 관계가 맞습니다. 절 잘못 부른 게 아닙니다. 그러니 벌할 필요가 없지요.”

고풍은 어색한 얼굴로 공수했다.

“아닙니다. 전에 고운도 전체가 안목이 없어서 양 공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분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 양 공자를 고운도의 제자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양 공자께서 사정하시니 이번에는 저 아이를 용서해 주겠습니다.”

양준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풍도 멍청이가 아니었다. 양준의 한마디에 바로 그가 종묘가를 아낀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저, 이리 와 보세요.”

양준은 친근한 미소를 띤 채, 종묘가에게 손짓했다.

종묘가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고 얼굴에는 겁먹은 표정이 남아 있었다. 양준이 부르자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펴보던 그녀는 고개를 움츠리고 양준의 옆에 바짝 붙어 소곤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사저, 두려워하지 마세요.”

양준은 그녀를 다독여 주고는 고개를 돌려 이원순을 바라보았다.

“반년 동안, 전 이 사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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