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8장. 종묘가의 기연
“네?”
이원순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양준은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이 대협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반년 전의 전쟁으로 전 바다에 빠졌고, 근처의 해역에서 사저가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따지자면 사저가 제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요.”
이원순은 깜짝 놀랐다. 평범해 보이는 소녀가 양준의 목숨을 구해 주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이에 종묘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양 공자의 은인이면 우리 각 문파의 은인이지.”
“맞습니다.”
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묘가가 양준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들도 오늘 문파의 보물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큰일을 해냈군요.”
화단혼은 깔깔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름이 뭐야?”
“종묘가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화단혼은 눈을 반짝였다.
“우리 낙화신교에 들어오지 않을래? 너만 괜찮다면 너에게 낙화사(落花使)의 신분을 줄게.”
“네?”
종묘가는 깜짝 놀라며 의아한 눈빛으로 화단혼을 바라보았다.
낙화신교에는 낙화사가 네 명 있었는데 모두 신분이 고귀했다. 교주 다음으로 높은 지위였다. 몇 년 전에 낙화사 한 명이 죽은 뒤로 낙화신교에서는 줄곧 이 자리를 비워 두고 있었다. 신교의 수많은 제자들이 이 자리를 두고 맹렬하게 싸웠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화단혼이 이런 조건을 걸며 종묘가에게 낙화신교에 가입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단혼이 내건 조건에 종묘가만 놀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표정도 미묘해졌다.
야방과 서천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금세 깨달았다. 그들은 속으로 화단혼이 교활하고 결단력이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는 그들도 각종 이익과 각 문파 장로의 자리를 내걸고 종묘가에게 수라문이나 적련종에 가입하기를 청했다. 운룡도와 쌍자도 사람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종묘가에게 가입을 권했다.
각 문파에서 발언권이 있는 권력자들이 모두 기대 어린 눈빛으로 종묘가를 바라보았다. 마치 종묘가가 보기 드문 천재인 것처럼 다들 문파의 문을 활짝 열고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종묘가는 멍해졌다. 방금 전까지 고소해하던 고운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표정으로 종묘가를 바라보았다.
‘왜지? 이 평범한 제자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문파에서 열정적으로 그녀를 영입하려고 하는 거야?’
“도주……!”
한조가 조용히 고풍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고풍은 흠칫 놀라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화난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 이건 좀 경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종묘가는 우리 고운도의 제자인데 제 앞에서 고운도 제자를 빼내 가려고 하다니요? 제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화단혼은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고 도주, 무슨 말씀을 그리 하세요? 방금 전에 도주가 이 소녀를 창염동에 던져 넣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주가 그녀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으니 제가 데려가려고 한 거죠. 저희 낙화신교에 들어온다면 전 그녀를 잘 보살펴 줄 겁니다. 자질을 썩히지 않고요.”
“그렇습니다. 허락하시지요, 고 도주.”
서천호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종묘가는 우리 고운도의 사람이니 누구도 데려갈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풍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 역시 양준이 종묘가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게 되었다. 종묘가를 잡아 둔다면 양준과의 친분을 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본인의 뜻에 맡겨야죠. 고 도주의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그녀가 예전에 고운도의 제자였다고 남의 미래까지 결정 지을 수는 없잖아요?”
화단혼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종묘가를 바라보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 스스로 말해 봐. 어느 문파에 들어가고 싶니? 걱정하지 마. 네가 어디를 선택하든 널 난감하게 굴 사람은 없을 테니.”
“우린 모두 네 생각을 존중한단다.”
야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종묘가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숙이고 위축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양준의 곁으로 다가서며 안전감을 찾으려 했다. 줄곧 고운도의 외딴 곳에서 공작새를 돌보며 수련에만 매진하던 그녀가 언제 이런 상황에 부딪쳐 보았겠는가? 그녀는 낯선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각종 문파들의 요청에 대해 그녀는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들 다투지 마시게.”
이원순이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랫동안 폐관 제자를 찾아다녔지만 아쉽게도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했네. 오늘 어렵사리 만났으니 다들 포기하시게나.”
“이 대협……!”
고풍과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이원순을 바라보았다. 이원순의 말 뜻은 종묘가를 자신의 제자로 들이겠다는 것이었다.
태일문의 신유 경지 이상 세 고수는 이쪽에서 조상급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은 모두 제자를 두고 있었지만, 이원순만 아직 제자가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폐관 제자를 찾았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종묘가가 이 기연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네. 내가 이 아이를 폐관 제자로 들일걸세.”
이원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고운도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고풍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부러운 눈길로 종묘가를 바라보았다. 신유 경지 이상 고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종묘가는 휘황찬란한 앞날을 맞이할 것이다.
“내 제자로 들어올 테냐?”
이원순이 자애롭게 종묘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종묘가는 상기된 얼굴로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곧이어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전 아직 고운도의 제자입니다…….”
“고풍!”
이원순은 고개를 돌리고 고풍을 바라보며 냉소하였다.
“내가 이 아이를 제자로 들이고 싶은데 불만이 있느냐?”
고풍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이 대협의 눈에 든 것은 이 아이의 복입니다. 제가 어찌 불만이 있겠습니까?”
그는 다시 종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넌 더 이상 우리 고운도의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이 대협을 따르면서 항상 충성을 다하고 절대 스승을 배신하거나 기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종묘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순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이 종묘가를 데려가겠다고 떠들 때, 양준은 아무 말없이 조용히 구경만 했다. 상황이 일단락된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사저가 좋은 스승을 만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제가 작은 선물을 드릴게요.”
“괜찮아.”
종묘가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양 공자가 주는 선물이니 받아 두어라. 양 공자의 체면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지!”
이원순은 종묘가가 거절할까 두려워 긴장한 얼굴로 호통쳤다.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물주머니를 종묘가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매일 한 방울씩 드세요. 가져간 후, 이 대협께 드리고 그에게 보관하라고 하세요. 이건 제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한 보답이에요.”
“응.”
종묘가는 물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손바닥만 한 물주머니를 양준이 왜 이렇게 정중하게 건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종묘가는 깜짝 놀랐다. 많은 이들이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손에 든 물주머니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양 공자, 걱정하지 마시게. 공자가 내 제자에게 준 선물이니 절대 그녀 외의 다른 이가 이걸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걸세.”
이원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양준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원순의 인품을 믿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한 말이니 분명 약속을 지킬 것이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양준은 한 바퀴 돌며 공수한 다음, 선경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번개같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도에서 본 것을 떠올린 사람들은 마음을 오래도록 가라앉힐 수 없었다.
“어르신, 제 사제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종묘가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물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자신과 함께 반년을 지낸 사제가 왜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굽신거리는 큰 인물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르신이라고 부르느냐?”
이원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
종묘가는 쑥스럽게 다시 불렀다.
“오냐, 네 사제는 중도 8대 세가 중에서 첫자리인 양씨 가문의 가주란다. 반년 전에 그가 통솔한 덕에 중도는 창운사지의 습격을 막아 내고 적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지.”
“그렇게나 대단해요?”
종묘가는 견식이 좁아 이원순의 말을 듣고도 그저 작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래.”
이때, 고풍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너와 그도 인연이 깊은 셈이지. 몇 년 전에 그가 서신을 비수에 꽂은 채, 네 방문에 박아 두어 우리들에게 화생파월공의 행방을 알려 주었어. 그리고 몇 년 뒤, 네가 또 그를 바다에서 구하다니. 이게 바로 착한 자에게 복이 온다는 거 아니겠느냐?”
“네?”
종묘가는 안색이 변하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사람이라고요?”
“바로 그 사람이다. 너한테 말해 주지 않더냐?”
고풍이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종묘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음속은 커다란 실망과 후회로 가득 찼다.
*양준과 선경라, 벽락 세 사람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중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양준을 뒤따르던 선경라는 그의 건장한 뒷모습을 바라보자 눈이 풀리고 콧김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한 벽락은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선경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괜찮다고 표한 뒤, 더는 양준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양준은 신유 경지 6단계밖에 되지 않았는데 비행 속도가 자신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몸속에서 분출되는 진원의 순수도와 농도도 그녀보다 강했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