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9장. 사랑의 씨앗
그들은 말없이 사흘이나 날았다.
이때, 양준의 뒤를 따르던 선경라와 벽락이 갑자기 멈춰 섰다. 이에 양준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그래?”
선경라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생긋 웃었다.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넌 중도로 돌아가야 하지만, 난 요미여왕이자 창운사지의 잔당이니 당연히 표향성으로 돌아가야지.”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창운사지는 이미 없어졌는데 그걸 따져서 뭐해? 중도로 가도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선경라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양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게. 중도의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우리 사이의 일을 해결하러 너한테 갈 거야.”
“기다릴게!”
선경라는 활짝 웃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가 떠난 뒤, 한참이나 지나서야 벽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인, 이래도 되나요?”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그만 안 다치면 돼.”
“하지만 대인의 사랑의 씨앗이…….”
벽락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도 억제할 수 있나요? 억제하지 못한다면 대인은 죽게 될 거예요. 그는 대인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데 대인은 왜 그를 배려하나요? 정의 속박을 풀어 그의 목숨을 가지면 끝이에요.”
“벽락!”
선경라는 숨을 헐떡이며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그만 말해. 독과부 일족의 비극은 내가 끝내야 해. 더 이상 이렇게 대대손손 물려줄 수는 없어. 안 그러면 내 딸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 이는 독과부 일족의 저주야!”
벽락은 눈물을 흘리며 애달픈 시선으로 요미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양준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다.
양준이 무심코 선경라의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남겨 두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의 씨앗은 이미 여물어서, 그녀는 양준과 함께 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욕망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 그것이 폭발하는 순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 뻔했다.
때가 되면, 선경라와 양준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만 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벽락은 양준이 죽도록 미웠다.
둘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공중에 불현듯 그림자가 나타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돌아왔어?”
선경라는 깜짝 놀랐다.
“네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양준은 가볍게 탄식했다. 선경라의 이상 증상이 확연하게 나타났는데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방금 전에 간 것처럼 행동한 연유는 선경라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는 욕망을 참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자신을 위한 그녀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마침 잘 돌아왔군요. 대인, 이제는 힘들게 참을 필요가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자의 목숨을 취하세요.”
벽락은 증오에 찬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외쳤다.
“왠지 저한테 선입견이 있는 것 같네요.”
양준은 음산한 눈빛으로 벽락을 보았다.
“맞아요. 전 당신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아요. 당신이 아니면 대인께서 이런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벽락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가 그녀의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뿌렸을 거예요. 이는 독과부 일족의 숙명이니까.”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벽락은 말문이 막혔다.
“어서 가. 더 늦으면 안 돼.”
선경라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반년 전부터 그녀의 마음속 사랑의 씨앗은 거의 꽃을 피울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양준과 만나지 못하자, 상황이 조금 호전된 듯싶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양준을 찾아 나섰고, 그와 사흘간 같이 있다 보니 줄곧 억눌렸던 욕정이 몇 배로 반등해 폭발해 버린 듯했다.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둘 사이 문제는 조만간 해결해야 돼.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은 아니야.”
“당신이 제 발로 찾아온 거예요.”
벽락은 연신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이윽고 그녀가 몸을 빙그르르 돌리자 화려한 빛이 반짝이더니 음탕한 소리가 천지간에 울려 퍼졌다. 벽락이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대인, 때가 되었네요. 이제 더는 억제할 필요가 없으세요.”
말투에는 짙은 요염함이 배어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더는 평소의 도도하고 건방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선경라의 요염한 그림자가 엿보였다. 그녀가 수련하는 것도 유혹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양준이 아닌 선경라를 상대로 유혹술을 펼치고 있었다.
“벽락, 너…….”
선경라는 원래부터 마음속 욕망을 힘들게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벽락이 유혹술을 펼치자 욕망은 마치 둑이 터진 홍수처럼 터져 나와 순식간에 그녀의 이성을 삼켜 버렸다. 마음속 사랑의 씨앗이 여문 상태에서, 본능이 욕망을 억누르려는 노력과 양준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무너뜨리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양준을 점유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요염한 자태, 몽롱한 눈빛을 하고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는 욕정이 불타고 있었다.
천지간의 기운이 갑자기 변했다. 양준은 눈앞에서 어린 소녀들이 나타나 노래하며 춤추는 것만 같았다. 그녀들은 방탕한 모습으로 양준을 둘러싸고 연신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선경라의 유혹술은 또 한 단계 높아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특별히 유혹술을 펼치지 않았음에도 그에게는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훼!”
양준이 차갑게 소리쳤다. 음양합환공이 운행되자, 하늘하늘 춤추며 욕망으로 들끓던 미모의 소녀들이 산산조각 나며 빛이 되어 사라졌다.
“깔깔……! 막느라고 힘 빼지 마세요. 남자라면 대인의 유혹술을 견뎌 내지 못하거든요. 하하하……!”
벽락이 요염하게 웃었다.
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꼬고 말았다. 마음속 흥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선경라의 유혹술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쪽은 나중에 혼낼 테니까, 기다리세요.”
양준은 굳은 표정으로 차갑게 벽락을 노려보았다.
“살아남은 다음, 다시 말하시죠.”
벽락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고, 몸이 저도 모르게 배배 꼬였다. 이윽고 그녀는 빨간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뜨거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이때, 선경라의 정교한 부채가 나타났다. 경라선에는 미남미녀의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남녀 모두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한 쌍씩 짝을 지어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었다.
“경라선!”
양준이 차갑게 소리쳤다.
경라선은 독과부 일족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로 선경라의 유혹술과 결합되면 그 위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선경라가 우아하게 부채를 흔들자, 경라선에 있는 남녀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커졌다. 그것들은 마치 부채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양준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팍- 팍- 팍-
머릿속에 들어왔던 허상은 순식간에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음양합환공이 모든 유혹술을 파훼할 수 있기에 선경라의 경라선은 양준에게 아무 효과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키득거리며 향긋한 바람을 안고서 양준에게 달려들었다.
“참, 요망한 여자야……!”
양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선경라의 뒤통수에 대자 그의 진원이 거세게 방출되었다.
선경라의 눈동자는 점차 생기를 잃었다. 천지간에 울려 퍼지던 음탕한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이내 그녀는 양준의 품속에 나른하게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본 벽락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리 오세요!”
양준은 선경라를 어깨에 메고서 험상궂게 웃으며 벽락에게 손짓했다.
“뭐 하려고요?”
벽락은 경계를 높이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대인께서는 어찌 된 거예요?”
“죽었어요. 이젠 당신 차례예요.”
양준은 냉소를 흘리며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벽락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죽고 나 죽고 해 보자.”
그러나 양준은 가볍게 한 손으로 초식을 날려 그녀를 제압했다. 곧이어 양준은 선경라를 어깨에 메고 벽락을 팔에 걸쳤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몸속 진원을 봉인했다.
*하루 뒤, 창운사지 표향성.
선경라의 행궁에 양준이 갑자기 선경라와 벽락을 데리고 나타났다.
일찍이 양준을 시중들었던 운려, 약우, 약청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녀들은 양준을 보자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선경라와 벽락의 상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선경라는 기절한 상태였고, 벽락은 얼마나 오랫동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양준이 벽락을 내려놓자,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땅바닥에 쓰러졌다.
“벽락, 괜찮아?”
운려가 다급히 물었다.
“괜… 괜찮아.”
벽락은 더듬거리며 대답하더니 얼굴이 상기되어 몰래 양준을 힐끗 보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예전의 방자함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공포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대인은? 대인은 어찌 된 일이야?”
“대인은… 뜻밖의 사고가 있었어.”
벽락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일단 먼저 쉬게 하세요.”
양준이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네.”
운려와 약우, 약청은 얼른 선경라와 벽락을 부축해서 각각 그녀들의 방으로 데려갔다.
*양준은 봉환루에 머물렀다.
이층 방 안, 양준은 음침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선경라와 그렇게 깊은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사랑의 씨앗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을 뿐이었다. 지금 그는 선경라를 대신해 사랑의 씨앗의 위험을 제거해 주고 싶지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조바심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