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0장. 익숙한 냄새군
선경라의 지금 상황은 중독된 것이 아니라 특수 체질 때문에 나타난 증상이었다. 때문에 만약영유는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양준은 하는 수 없이 봉환루를 나섰다.
그는 먼저 선경라를 찾아가 보았다. 그녀의 몸에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양준이 진원으로 봉쇄해 놓은 탓에 한동안은 깰 수 없는 상태였고, 몸도 불에 달군 인두처럼 뜨거웠다. 만약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선경라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녀가 초범 경지라 해도 이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양준은 운려에게 잘 보살피라고 얘기한 다음, 혹시나 싶어 벽락에게 상황을 알아보러 찾아갔다. 선경라의 행궁은 그리 크지 않지만 작지도 않았다. 그는 행궁의 하녀들에게 벽락의 거처를 물어 찾아갔다.
그는 방문 앞에 이르러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는 어떤 기척도 없었다. 신식을 펼쳐 보니 벽락은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호흡이 고른 것을 보아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양준은 잠깐 기다리다가 방문을 열고 걸어 들어갔다.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침대가로 걸어가 의자를 찾아 앉았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벽락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양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덮고 있던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뭘 하려는 거예요?”
벽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경라가 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얘기해 줬죠?”
양준이 물었다.
벽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사이 일을 알고 있다면 독과부 일족의 특이 체질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요.”
“그래서요? 제가 대인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만약 대인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냥 대인을 만족시켜 주세요.”
“선경라를 만족시키면 제가 죽어야 해요. 당신도 독과부 체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잖아요. 그녀를 품는 순간 저는 독살될 거예요. 난 그런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니지만 대인은 바보라고요.”
벽락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졌다.
“대인께서는 당신을 위해 자신이 죽기를 원해요. 이번에 당신이 만약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대인은…….”
벽락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만약 양준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선경라는 아마 그가 중도의 일을 다 처리하고 다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선경라가 이 정도로 저를 위한다니 솔직히 저도 감동받았어요. 독과부 일족은 겉으로는 매정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더 사랑이 깊죠.”
양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벽락은 멍하니 양준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눈가를 훔쳤다.
“대인께서 당신의 말을 들었으면 엄청 기뻐했을 거예요.”
“지금 전 당신하고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그동안 줄곧 선경라 옆에 있으면서 혹시 사랑의 씨앗을 제거할 방법에 대해서는 들은 적 없나요?”
양준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벽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씨앗이 이미 여물어서 제거할 방법이 없어요. 대인께서 아무 탈 없으려면 오직 당신과…….”
양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선경라가 죽지 않으면, 제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벽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당신이 죽기를 바라요.”
양준은 침묵을 지켰다.
벽락은 흐느끼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급히 말했다.
“맞아요. 전에 대인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씨앗은 제거할 수 없지만 만약 욕정을 품었을 때 체액이 독성을 띠는 문제만 해결하면… 그러면… 적어도 목숨을 잃을 위험은 없다고 했어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는 건가요?”
양준은 일말의 희망을 보게 되자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건 대인의 짐작일 뿐이에요. 구체적인 방법은 몰라요.”
벽락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양준은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것이 떠오를 듯했으나 어딘가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자, 양준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제정신인가요?”
벽락은 깜짝 놀라 투덜거렸다.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요.”
“뭐라고요?”
벽락은 기뻐하며 되물었다.
“선경라의 체질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거예요. 선경라가 전에 얘기해 준 적이 있는데, 선대 중에 부주의로 여왕 거미의 집에 들어갔다가 거미 독에 중독되었지만 다행히 죽지 않은 분이 계셨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독과부 일족이 나타나게 되었고, 매번 딸 하나만 두면서 독과부 체질을 물려받게 됐다더군요. 여왕 거미의 독이 독과부 체질이 만들어지게 된 근원이니 혹 그 요수가 무언가 알 수도 있죠…….”
말하다 보니 그 가능성이 아주 커 보였다. 양준은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한 뒤 벽락에게 물었다.
“벽락, 여왕 거미는 어디로 갔죠? 죽었나요?”
중도 결전에서 그는 지하에 있었기에 땅 위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여왕 거미는 죽지 않았어요. 그 전투에서 창운사지는 사상자가 막대했죠. 6대 사왕 중에서 넷이 죽고, 저희 대인과 섬전영왕만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의 시체를 정리하면서 여왕 거미는 보지 못했어요. 아마 도망쳤을 거예요.”
“도망친 거면 잘됐네요. 여왕 거미를 찾으면 방법이 있을 거 같군요.”
양준이 크게 기뻐했다.
“여왕 거미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벽락이 물었다.
“물론 알고 있어요.”
양준은 자신 있게 씩 웃었다.
애당초 그는 선경라와 함께 여왕 거미의 집에 떨어졌다가 큰 고생을 했기에 그 위치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표향성의 고수들을 모집해 여왕 거미를 잡아다가 물어볼 수 있어요.”
“아니요. 저 혼자 얼른 다녀올게요.”
양준이 고개를 저었다.
벽락이 미심쩍은 지 한마디 물었다.
“여왕 거미는 신유 경지 이상이에요. 이길 수 있나요?”
“좋은 소식 기다리세요.”
양준은 허허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기다리세요. 같이 가요……!”
벽락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준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양준은 표향성을 나서자마자 기억을 더듬어 여왕 거미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애당초 선경라는 뇌정수왕의 영지를 가로질러서 그곳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근처에는 호수가 있었다.
오늘날 창운사지는 4대 사왕이 죽고, 섬전영왕은 살아남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섬전영왕은 중도 쪽 고수들이 손잡고 찾아와 복수할까 두려워 종적을 감추었다. 게다가 지난번 전투로 창운사지 전체의 손실이 막대했다.
그 덕분에 양준은 가는 내내 이렇다 할 고수를 만나지 못했다. 지금 창운사지에서는 신유 경지 3단계가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창운사지는 양백의 손에 놀아난 탓에 몇십 년 내에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할 듯했다.
양준이 대놓고 창운사지를 활보해도 누구 하나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다들 멀리서 그를 보고는 서둘러 피해 버렸다.
이삼 일 뒤, 양준은 드디어 그때 지났던 수풀에 도착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 선경라와 함께 머물렀던 동굴을 찾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양준은 선경라의 식해에 들어갔고, 그녀의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자 양준은 감개무량했다. 그때 그는 겨우 진원 경지 3단계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신유 경지 6단계에 이르렀다.
양준은 방대한 신식을 널리 펼쳐 사방 백 리를 뒤덮은 다음, 조용히 느끼고 탐지했다. 이따금씩 물줄기가 느껴지면, 그때 그 호수인지 가서 살펴보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뒤, 양준은 드디어 그곳을 찾게 되었다.
그 당시 머물렀던 호숫가에 이르자 양준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몇십 리 떨어진 곳에 여왕 거미의 집이 있었다. 이어 그의 신형이 솟구치며 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 시진이 지나, 거대한 협곡 같은 곳이 양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래쪽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미 알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협곡 양옆은 희고 질긴 거미줄투성이였다. 가끔 무인의 시체가 보이기도 했다. 아마 부주의로 이곳에 들어온 무인들이 요수들에게 잡아먹힌 모양이었다.
협곡에서는 송아지만 한 거미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것이 그야말로 시끌벅적했다. 협곡의 끝자락에는 거대한 거미 석상이 있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석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다.
양준은 협곡 위 하늘에 멈춰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식을 펼쳐 거미 석상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서 초범 경지 고수 못지않은 강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여왕 거미였다.
양준의 신식이 여왕 거미의 존재를 탐지하는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깔깔… 아주 익숙한 냄새군. 이 냄새는… 중도 양씨 가문의 그 녀석 같은데?”
양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 우렁차게 외쳤다.
“저와 얘기 좀 해봅시다.”
“기왕 온 김에 그냥 내려와서 말하는 건 어때?”
감미로운 목소리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을 담고 있었다. 양준이 여왕 거미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 망정이지, 목소리만 들으면 아름다운 절색의 미인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사실, 여왕 거미의 얼굴은 그야말로 절색이었다. 얼굴만 보면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그러나 그 얼굴에 거대한 몸집과 발 여덟 개까지 더해지면 아름다움은커녕 공포심만 일으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