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2장. 화를 자초하다
여왕 거미가 두려움 없이 신혼을 육체에서 이탈시키는 것을 보고 양준이 입가에 기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외쳤다.
“괜히 제 식해에서 허튼짓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경지는 당신보다 낮지만 신식은 보통 신유 경지 무인보다 훨씬 강하거든요. 화를 자초하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양준이 이처럼 경고하자, 여왕 거미는 오히려 의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의념으로 뜻을 전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면 난 혼교라도 하고 싶거든. 하지만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을게.”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식해의 방어를 풀었다. 그러자 여왕 거미의 신혼이 곧바로 양준의 식해에 들어왔다.
바다 위에 여왕 거미의 신혼 영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서 볼 때와 달리, 여왕 거미의 신혼 영체는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날씬한 몸매의 그녀는 양준의 신식 위쪽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7급 요수로서 실력이 초범 경지 고수와 같았다. 그에 비해 양준은 신유 경지 6단계에 불과하니 경지의 절대적인 우세 때문에 그녀는 양준의 식해에 들어왔음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양준의 신혼 영체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여왕 거미를 힐끗 보고서 눈썹을 찡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진화하고 싶은 모습인가요?”
“그래. 어때? 마음에 들어?”
여왕 거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빙그르르 한 바퀴 돌자 몸에서 아름다운 빛이 흘러나오면서 사람의 마음을 홀렸다.
“음란하군요.”
양준이 입을 삐죽거렸다.
여왕 거미는 요염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독과부 체질의 요미여왕은 음란하지 않아? 됐어. 쓸데없는 소리는 이만하고 어서 화생지의 비밀을 풀어 놔 봐.”
양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쓸데없는 소리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는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에 여왕 거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양준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양준의 수상쩍은 행동에 여왕 거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함정이었군!”
“맞아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양준은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연기가 아주 훌륭하네. 그 짓거리들이 내 신혼을 식해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니.”
여왕 거미가 냉소했다.
“미안하지만 너무 늦게 눈치챈 것 같군요.”
“지금의 네 신식 수준으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
“제가 말씀드렸죠. 그만한 재주가 없으면 나서질 않는다고요. 제가 당신을 끌어들인 이상,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거예요.”
“어쭙잖은 것!”
여왕 거미가 소리치는 동시에 그녀의 신혼 영체는 빛이 되어 양준의 식해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바다에서 파도가 굽이치더니 바닷물이 은하수처럼 쏟아지며 모든 길을 차단했다.
여왕 거미의 신혼 영체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바닷물의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본래 신혼 영체의 모습으로 돌아온 여왕 거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신식의 힘이 왜 이렇게 강해.”
양준의 신식의 힘은 자신에 못지않았으며, 심지어 한 끗 차이로 좀 더 강했다. 그게 아니면 그녀가 도망치지 못할 리 없었다.
“선경라 몸속에 있는 극독을 어떻게 해독하는지 말해 주면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요. 아니면 그냥 이곳에서 죽을 거예요.”
양준이 냉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꿈 깨. 그냥 내가 너를 먹어치우면 되거든.”
여왕 거미는 서늘한 표정으로 양준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갑자기 식해 안에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여왕 거미는 그 기운을 느끼고 당황하여 멈칫하고서는 고개를 들고 기운이 전해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공중에 떠 있던 금인독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왕 거미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서 우러러봐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을 느꼈다.
슈욱-
금인독안에서 금빛이 튀어나오더니 여왕 거미의 신혼 영체 가장자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찌르륵-
여왕 거미의 신혼 영체는 뙤약볕 아래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일부분이 정화되었다.
이내 여왕 거미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경악과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뭐야? 도대체 뭐지?”
여왕 거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제압할 수 있는 물건이에요. 만약 방금 전에 그 빛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당신은 순식간에 정화되면서 모든 생각과 의식이 사라졌을 거예요. 이건 경고일 뿐이에요. 전 당신하고 실랑이질할 시간이 없거든요. 어서 비밀을 알려주세요. 아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양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왕 거미는 양준을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금인독안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숨까지 헐떡이는 것이 대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셋까지 셀 거예요. 그 안에 대답하는 게 좋을 거예요.”
양준은 냉혹한 얼굴로 최후통첩을 전하고는 한 손을 들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잠깐만! 그 비밀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 단 비밀을 알게 되면 나를 놓아줘야 해.”
여왕 거미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약속할게요!”
양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 거미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흰빛이 그녀의 신혼 영체에서 분리되어 나오더니 양준에게 날아갔다. 흰빛은 바로 비밀을 담고 있는 신식이었다. 여왕 거미가 이 부분의 신식을 분리해 냈다는 것은 일부분 기억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손실이었다.
양준은 기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가 미처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여왕 거미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여왕 거미는 아름다운 몸으로 양준을 휘감고서 방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신혼 영체를 삼켜 버릴 거야. 네 신식이 이렇게 강하니 한동안 먹을 수 있겠군. 하하! 이렇게 너와 붙어 있는데 네가 금빛을 쏠 수 있겠어?”
그녀는 양준과 붙어 있으면 섣불리 자신에게 금빛을 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사악한 신식의 기운이 양준을 공격하면서 그의 신혼 영체를 압박했다.
양준은 차갑게 여왕 거미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참 순진하군요. 내가 조종하는데 스스로를 다치게 할 리 없죠.”
여왕 거미의 웃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양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드디어 두려움이 비쳤다.
슈욱-
강한 금빛이 내리쬐면서 여왕 거미의 몸을 꿰뚫었다. 여왕 거미의 모든 생각과 의식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순수한 신식만 남게 되었다.
“죽음을 자초하는군!”
양준은 곧바로 여왕 거미가 분리해 낸 신식을 탐지해 보았다. 이윽고 그의 안색이 미묘해졌다.
여왕 거미는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그 신식에는 선경라의 체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담겨 있었다. 다만, 전제는 여왕 거미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여왕 거미의 피와 요단을 취해 선경라에게 복용시켜야만 그녀 몸속의 독소를 제거할 수 있었다. 결국 여왕 거미는 자업자득이었다.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여왕 거미가 남겨 놓은 순수한 신식을 바로 흡수하지 않고 재빨리 눈을 떴다. 양준을 에워싸고 있던 대형 거미들은 여왕 거미의 죽음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눈을 뜨는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몸속의 진원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자 거미들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6급 대형 거미는 실력이 신유 경지 무인과 맞먹었다. 이런 등급의 적은 이제 양준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진원을 내뿜자 수많은 거미들이 죽어 나갔고, 남은 놈들은 너도나도 도망치기 바빴다.
양준은 도망가는 거미들을 추격하지 않고 거미 석상 위로 뛰어올라 죽은 여왕 거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몸속에 손을 넣어 더듬더니 칠색 빛을 뿜는 요단을 꺼냈다. 요단에는 방대한 기운이 내재되어 있어 그것을 잡는 순간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손을 바라보니 어느새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정말 강한 독이군!’
양준은 곧바로 요단을 검은 책 공간에 던져 넣고는 운기 조식해 몸속의 독소를 밀어냈다. 그리고 물주머니를 꺼내 여왕 거미의 피를 담은 뒤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이틀 뒤, 표향성.
양준은 행궁에 돌아왔다. 이때 선경라의 방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안색이 바뀌며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푹푹 찌는 듯이 더웠다. 이는 선경라의 몸속에서 발산되는 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고, 온몸이 불에 달군 인두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의식도 흐리멍덩했다.
양준이 돌아온 것을 보고 운려가 기뻐하며 급히 인사했다.
“양 공자, 돌아오셨군요.”
벽락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기대감이 서린 빨간 눈동자로 긴장한 채 양준을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꽉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어때요?”
양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벽락은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상황이 매우 안 좋은 모양이었다.
“저쪽에 가 있어요.”
벽락이 자리를 비켜주자, 양준은 선경라의 침대에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리고 여왕 거미의 요단과 피를 꺼내더니 선경라의 입을 벌리고 다짜고짜 요단을 밀어 넣은 다음, 다시 물주머니 속의 피 절반을 부어 넣었다.
“대인께 뭘 먹인 거예요?”
벽락이 다급히 물었다.
양준은 여왕 거미의 요단과 피라고 말해 주었다. 이에 벽락은 깜짝 놀랐다.
“지금 여왕 거미를 죽였다는 말인가요?”
“이 방법밖에 없어요. 성공하기를 기대해야죠.”
양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대인께서 혹시라도 잘못되면… 당신, 꼭 따라가야 할 거예요.”
벽락은 억울한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무시해 버렸다. 그는 선경라의 침대에 올라가 그녀를 부축해 앉혔다. 그러고는 한 손을 그녀의 뜨거운 어깨에 얹은 뒤 진원을 돌려 여왕 거미의 요단과 피 속에 내재된 기운을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