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3장. 중도로 돌아가다
봉환루.
양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여왕 거미가 죽고 남긴 신식을 흡수해 자신의 실력과 천도, 무도에 대한 깨달음을 키우고 있었다.
이때, 코끝에 요염하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 오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벽락이 그의 앞에 반쯤 꿇어앉아 이채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양준은 살짝 경계심이 들었다. 벽락은 줄곧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우러러보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 대단하단 걸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여왕 거미를 죽인 거예요? 여왕 거미는 7급 요수란 말이에요. 대인께서는 전력을 다해도 여왕 거미를 이길 수 없다고 했거든요. 뇌정수왕도 여왕 거미와 그냥 협력 관계일 뿐, 여왕 거미를 제압한 적은 없어요. 도대체 무슨 수단으로 요단까지 취해 오신 거예요. 얘기 좀 해 주세요.”
벽락이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준이 선경라를 구한 다음부터, 본래 그에게 품고 있던 적대감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양준은 눈썹을 찌푸리고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선경라는 지금 어때요?”
“아주 좋아요. 독과부 체질은 여전하지만 몸속의 독소는 모두 제거되었어요.”
벽락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양준은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벽락은 원래부터 요염한 여인이었다. 아마 선경라와 오랫동안 함께해서 영향을 받은 듯했다.
“대인께서는 지금 자신의 벽을 깨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제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아마 실력이 더 향상되어 있을 거예요.”
“잘됐네요. 이제 저와 선경라 사이 일도 해결되었군요.”
양준은 드디어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이내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선경라가 폐관 수련을 한다니, 그럼 전 기다리지 않을게요. 얼른 중도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대신 전해주세요.”
“가지 마세요!”
벽락이 와락 달려들어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양준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남아 있을 필요가 있나요? 제가 할 일은 다한 거 같은데.”
“아무튼 가지 마세요. 대인께서 폐관 수련하고 나오면 아마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면 대인께서 슬퍼할 거란 말이에요.”
벽락의 태도에 양준은 골치가 아팠다. 소안은 몽무애에게 이끌려 다른 세계로 갔는데 지금으로서는 그쪽의 상황을 알 수 없어 답답한 상황인 데다가 중도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때, 선경라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나쁜 놈, 언제 이렇게 성인군자가 다 됐지?”
그녀의 신식은 줄곧 이쪽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양준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나 원래 성인군자였어.”
양준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선경라가 깔깔 웃었다.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 선경라는 다시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지금 가려고?”
“그래.”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봐. 이번에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가면 꼭 널 찾으러 갈 거야.”
“아마 찾지 못할걸. 내가 가려는 곳은 다른 세계야.”
“여기보다 차원이 높은 세계?”
“너도 알고 있어?”
양준은 깜짝 놀라 물었다.
“양백이 말해 줘서 조금 알고 있을 뿐이야. 네 몸속에 내 추혼인이 있으니 설령 다른 세계를 간다고 해도 난 널 찾을 수 있어.”
양준이 씩 웃었다.
“찾을 수 있으면 찾아와 봐. 갈게. 잘 지내.”
벽락은 창가에 기대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인, 이렇게 가게 내버려 둬도 되나요?”
“네가 직접 유혹해도 소용없었잖아. 아마 더 중요한 일이 있겠지. 아직 그의 마음속에 내 존재감은 그렇게 크지 않아.”
“사랑이고, 정이고 머리가 아프네요.”
벽락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한테 물건을 남겨 둔 거 같구나. 스스로 확인해 봐.”
선경라는 그녀에게 한마디 남기고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폐관 수련을 이어갔다.
벽락은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침대 가에는 물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어정쩡한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중도.
커다란 중도는 아직 반 이상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중도의 짙은 영기 때문에 수많은 세력의 무인들이 만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중도에 찾아와 재건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재건 작업을 적어도 십몇 년은 지속해야 지난날 중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듯했다.
8대 세가의 고수들은 모두 재건에 참여했다.
젊은 가주 여덟 명은 윗세대 고수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건을 지휘했다.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추억몽도 바삐 보냈다. 그녀는 머리에 네모난 비단 수건을 쓰고 있어 아름다운 시골 아가씨 같았다.
“가주님, 직접 나서실 필요 없어요.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시죠. 어휴, 여리여리한 피부에 상처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추씨 가문의 한 노파가 곁에서 돕고 있는 추억몽에게 말했다.
추억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심심해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상한 생각만 떠오른단 말이에요.”
“양씨 가문의 막내 공자가 그리운 거죠? 하늘도 무정하지. 한창 나이에 가다니.”
노파는 탄식하며 한마디 했다.
“어르신! 양준은 죽지 않았어요.”
추억몽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노파는 입을 벌름거렸다. 달래고 싶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반년이 지났지만 양준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진작 나타났어야 했다. 때문에 거의 9할의 사람들은 양준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오직 양준 관저의 무인들만이 양준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굳게 믿었다. 다만 그가 세상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젊은 게 좋은 거구나. 저리 무조건적으로 한 사람을 믿을 수 있다니.’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독수리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에는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독수리의 울음소리에 추억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줄곧 하늘에서 빙빙 돌던 금빛 독수리가 중도 밖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놈은 금빛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양준을 찾는 데는 당연히 양씨 가문 금우응의 힘을 빌렸다. 그러나 열몇 마리의 금우응들이 반년 동안 찾아다녔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유독 양준 관저의 금우응만이 양준이 실종되어서부터 줄곧 중도의 하늘에서 빙빙 돌았다. 그리고 오늘에야 다른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저 독수리가 웬일이지?”
추씨 가문의 노파가 의아해했다.
추억몽은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곧이어 아름다운 눈동자가 밝아지더니 흥분해서 외쳤다.
“그가 돌아왔어요! 양준이 돌아왔어요!”
이와 동시에 몸이 움찔하더니 그녀는 곧바로 금우응이 날아간 방향으로 뒤쫓아갔다.
“정말 살아 돌아온 건가?”
노파도 경악에 찬 얼굴로 신식을 펼쳐 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30리 밖, 양준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중도에서 날아오는 금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허허 웃으며 마주하여 날아갔다.
잠시 뒤, 금우응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양준이 손짓하자 금우응은 금방 그의 어깨에 내려앉더니 살갑게 부리로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네 후각이 영민하구나.”
양준은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중도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반겨 준 이가 이 독수리일 줄은 그 역시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독수리를 뒤쫓아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났다. 추억몽은 자신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독수리와 거의 한 발 차이로 양준의 앞에 달려왔다.
“오래간만이야!”
양준은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추억몽의 상기된 얼굴에는 기쁨, 두려움, 걱정 등 여러 가지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양준과 열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눈물을 반짝이며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환각이어서 다가서는 순간 그 모습이 산산조각 날까 두려웠다.
“왜 그래?”
양준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추억몽은 심호흡을 하고서 걸음을 내디뎌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양준의 앞에 거의 다다르자, 그녀는 양준의 팔을 와락 잡아채서 꽉 깨물었다.
그녀는 팔을 깨무는 동시에, 양준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는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점차 팔을 물던 힘이 약해지더니, 그녀의 입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양준이 탄식하며 말했다.
“오자마자 왜 이리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야. 내가 너를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난… 난 네가… 정말… 죽… 죽은 줄 알았어. 반년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추억몽은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년 동안 쌓였던 걱정을 이제야 울음소리와 함께 털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듯한 가련한 모습이었다.
양준은 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한참을 기다린 뒤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나서야 손을 내밀어 끌어당겼다.
추억몽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부끄러운지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네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
양준은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뭔 악취미야!”
추억몽은 사납게 양준을 흘겨보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서야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다시 평소의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는 양준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보자 화가 나서 발로 그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중도로 걸어갔다. 그녀는 입가에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양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