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7장. 천랑국으로
진령의 기운을 흡수하고 천행궁도 회수하자, 떠나기 전 양준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유감스러운 것은 진령과의 싸움에서 소안의 얼음 침대가 완전히 녹아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얼음 침대의 등급은 진령보다 낮았다.
양준은 중도에서 2, 3일을 더 머물면서 남은 일들을 해결하고, 다시 모든 식구, 친구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드디어 여정에 올랐다. 수령은 흥분해 그의 뒤를 따르며 한 걸음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중도성 밖,
많은 사람들이 양준을 배웅해 주었다. 적지 않은 이들은 헤어지기 섭섭해 눈가가 촉촉해 지거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양준이 가면 이제 그 다른 세계도 조용할 날이 없을걸.”
곽성진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마치 무언가 예감한 듯이 말했다.
*길을 가는 내내, 수령은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그녀는 부주의로 이 세계에 오게 된 뒤, 거의 2년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보이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양준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쪽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수령도 화내지 않고 혼자 떠들어 댔다. 말하다가 힘들면 잠깐 쉬고, 다 쉬고 나면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은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날았다. 열흘이 지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자, 수령이 참다못해 물었다.
“여긴 어디야?”
“천랑국!”
“뭐, 천랑국?!”
수령은 의외라는 듯이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쪽에서 2년을 지내왔기에 천랑국에 대해서는 그녀도 들은 바가 있었다. 대한국과 인접한 다른 나라로, 사람들이 용맹하고 거칠며 땅이 척박해 대한국과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왠지 여인네들이 뻔뻔스럽다 했어.”
수령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는 소녀들을 지켜보았다. 소녀들은 그들 앞을 지나가면서 입가에 요염한 웃음을 머금은 채 양준에게 추파를 던졌다.
“이곳은 왜 왔어? 통현대륙(通玄大陸)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는 게 아니었어?”
수령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통현대륙은 바로 수령이 살고 있는 또 다른 대륙이었다. 그곳은 영기로 가득 차 있고, 문파가 즐비하며 절정 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대륙이기도 했다.
“사람 찾으러 왔어.”
양준은 한마디 대답하고는 손을 들고 외쳤다.
“잠깐만!”
소녀들은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소녀가 생글생글 웃더니 양준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양준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에 양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벌써 자맥을 통해 천랑국 여인들의 자유분방함을 겪은 바 있었고, 이곳의 풍속이 이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길 좀 묻자. 삼라전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
양준은 숨기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녀들의 얼굴빛이 급변했다. 나이 많은 소녀가 경계 어린 눈초리로 양준을 살펴보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삼라전에 가려고요?”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고서 캐물었다.
“삼라전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예요?”
양준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어렴풋이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을 찾으려고. 내가 물건을 맡겨 둔 게 있거든.”
“누구를 찾으세요? 무슨 물건인가요?”
소녀는 계속해 질문했다.
양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씩 웃었다. 낯선 곳에서 소녀들을 만나 길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의 경계심이 어찌나 높은지 마치 그가 삼라전에 찾아가 무슨 나쁜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굴었다.
그는 천랑국 그리고 삼라전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맥을 찾는 것도 애당초 그녀의 머릿속에 심어 둔 각인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각인을 남의 머릿속에 남겨 두면 양준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었고, 만약 그 사람이 죽게 되면 양준도 덩달아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양준은 자맥에게서 각인을 거둔 다음, 그녀에게 천랑국의 금지된 땅으로 데려다달라고 할 참이었다.
소녀가 너무 격하게 나오자, 양준은 살짝 언짢아졌다. 그는 얼굴을 험상궂게 구기고서 흰 이를 드러내며 연신 냉소를 흘렸다.
“뭐가 그리 궁금해? 내 물음에 대답만 하면 돼.”
그의 태도가 확 달라지자 소녀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들은 너도나도 힘을 모으는 한편, 뚱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양준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압박감이 소녀들을 덮쳤다. 그녀들은 마치 큰 산에 짓눌린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숨을 헐떡였다. 나이 많은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양준의 엄청난 실력을 알아차리고 땅에 무언가를 뿌렸다.
양준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이윽고 한쪽 손을 내밀자 손바닥에서 강한 흡인력이 흘러나왔다.
슉- 슉- 슉-
땅바닥 위의 자그마한 물체들이 양준의 손에 끌려갔다.
“공혼충?”
그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그는 손바닥 위의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를 보면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당시 유명산에서 천랑국의 무인들은 공혼충을 이용해 요수 몇백 마리와 대한의 무인들을 조종했었다. 자맥도 똑같은 수법으로 양준을 공격했으나, 그가 손쉽게 그 수를 파훼해 버렸다. 그리고 방금 전에 소녀들이 몰래 땅바닥에 뿌린 것도 공혼충이었다. 애당초 자맥이 했던 것처럼 그를 제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단이 어찌 그에게 먹혀들겠는가?
양준이 공혼충이라고 말하자, 소녀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었다. 나이 많은 소녀가 놀라서 외쳤다.
“공혼충을 어떻게 알아요?”
“당연히 알고 있지.”
그는 의기양양해하며 웃었다.
“그럴 순 없어요. 차림새로 보면 분명 대한국에서 온 무인이잖아요. 공혼충은 우리 문파의 비전 공법인데 어떻게 당신이 알고 있는 거죠?”
“비전 공법이라… 자맥과 무슨 사이야?”
양준의 말을 듣고, 소녀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비쳤다.
“사저를 아세요?”
“사저라고?”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는데 뜻밖에도 정말 자맥과 아는 사이였다.
‘헐, 그것도 사형제인 모양이네……! 운이 좋군.’
양준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맞아요. 자맥은 저희 대사저예요. 사저를 아시나요?”
소녀가 캐물었다.
“그냥 알아. 자맥의 사매라니까 공혼충은 돌려줄게.”
양준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공혼충을 던져 주었다.
소녀는 공혼충을 받아 들고 양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직 경계심은 남아 있으나 그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사저한테 데려다 줘. 네 사저한테 볼일이 좀 있거든.”
양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녀들은 그를 지켜보며 한참이나 망설였다. 이윽고 나이 많은 소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뒤처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녀들이 앞에서 걷고 양준과 수령은 뒤에서 따라갔다. 그녀들은 수시로 뒤돌아보고는 또다시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대사저가 어떻게 대한국 무인을 알게 되었는지, 둘 사이에는 무슨 갈등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듯했다.
‘설마 복수하러 찾아온 건 아니겠지?’
‘나이는 우리랑 비슷한 것 같은데, 경지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어.’
양준이 차라리 복수하러 온 거라면 소녀들은 두렵지 않았다. 삼라전 쪽에도 고수가 있기에 양준이 무작정 찾아가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소녀들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들은 가는 동안 홀가분한 표정으로 양준에게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이것저것 물었다.
양준은 소녀들의 물음에 차가운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반면 수령은 무엇이든 호기심이 동해 곧 소녀들과 한데 어울려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영리한 그녀는 소녀들이 궁금해하는 양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소녀들은 맥이 빠지게도 어떤 유용한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녀들은 여전히 이 남녀가 왜 삼라전에 찾아가는지, 자맥과는 어떤 관계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반나절이 지나자, 양준이 깜짝 놀라더니 정신을 집중해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는 친밀감이 드는 자신의 신혼의 기운을 감지했다. 자맥은 저쪽에 있는 듯했다.
소녀들은 무슨 꿍꿍이속인지 늑장을 부리며 느릿느릿 걸었다. 양준은 더 이상 그녀들의 안내가 필요없었기에 신형을 움찔하더니 기운이 전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보세요……!”
삼라전의 소녀들은 크게 놀라 다급히 외쳤지만, 양준은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반 시진이 지나 양준은 수풀 위 하늘에서 아래쪽을 굽어보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쪽은 산맥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상상 속 대형 세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삼십 리 밖에 줄줄이 이어진 건축물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거대하고 웅장해 삼십 리를 사이에 두고 있어도 수많은 고수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천랑국의 삼라전인 듯했다.
‘그런데 자맥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이곳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곧이어 양준이 자신의 기운 파동을 살짝 내뿜자, 산속에서 여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데? 우린 이미 삼라전도 떠났어. 아니면 그냥 우리를 씨까지 말리려는 거야?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지. 그래도 다 같은 문파잖아.”
양준은 순간 당황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이리 화났어? 다짜고짜 뭔 얘기들이야?”
“아니 너…….”
순간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놀라서 외쳤다.
“양준, 이 나쁜 놈!”
“나쁜 놈은 좀 빼지 그래?”
양준의 얼굴빛이 거메지며 말했다.
곧이어 맑은 웃음소리가 산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윽고 커다란 돌이 옆으로 움직이더니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동시에 안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로 자맥이었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는 자유분방한 차림새였다. 그녀는 공중에 서 있는 양준을 올려다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몇 년이 지나서 양준을 다시 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